1화
여백의 마지막 손님
문을 열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종이를 만지는 것이다.
전날 들어온 편지지 묶음을 뜯어 모서리를 손끝으로 훑는다. 백 그램짜리는 손톱에 걸리는 데가 있고 팔십 그램은 그냥 미끄러진다. 눈으로 보면 둘 다 그냥 흰 종이다. 손으로는 다르다. 잉크가 어디까지 번질지, 뒷장에 얼마나 비칠지가 그 차이에서 갈린다. 손님들은 종이를 고르지 않는다. 골라달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만진다.
여백은 여섯 평이다. 간판에는 손글씨 대필, 그 다섯 글자만 있다. 무슨 가게냐고 묻는 사람이 하루에 두어 명은 된다.
"편지 써주는 데요."
"편지를요? 남의 편지를?"
"네."
그러면 대개 웃는다. 웃고 나서 들어온다.
그날 첫 손님은 사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서류 봉투에서 A4 세 장을 꺼내 카운터에 밀어놓고, 이걸 손글씨로 옮겨 써달라고 했다. 종이에는 날짜와 금액과 계좌번호가 촘촘했다.
"내용증명으로 보낼 겁니다."
"내용증명이요?"
"손으로 쓰면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진심이 보이잖아요."
나는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두 번째 장 중간부터 문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금액 이야기였다가 뒤로 갈수록 형이 어릴 때 무엇을 가져갔고 어머니 장례에 며칠 만에 왔는지가 적혀 있었다.
"내용증명이 증명하는 건 진심이 아닙니다."
"그럼 뭘 증명합니까."
"언제, 누구한테,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요. 그것뿐입니다. 여기 적힌 게 사실인지까지는 증명해주지 않습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길어지도록 두었다. 이런 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개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럼 이건, 그냥 보냈다는 것만 남는 거네요."
"네."
"보냈다는 것만."
남자는 종이를 도로 접었다. 그리고 물었다. 내용증명 말고 그냥 편지는 얼마냐고. 나는 장수와 종이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남자는 한 장이면 된다고 했다.
그는 삼십 분 동안 형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중에서 금액이 나오지 않는 부분만 받아 적었다. 다 듣고 나서 내가 물었다. 이 편지, 형이 읽고 나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냐고. 남자는 모르겠다고 했다.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는 손님이 제일 낫다. 답을 정해온 사람은 내가 뭘 써도 마음에 안 들어 한다.
낮에는 축사가 하나 들어왔다. 다음 달 결혼하는 조카에게 읽어줄 것이라고 했다. 의뢰인은 목소리가 크고 눈물이 많았다. 나는 문장을 짧게 잘랐다. 사람 많은 데서 읽을 글은 짧아야 한다. 길면 읽는 사람이 먼저 무너진다.
세 시쯤 세림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오늘 몇 건?"
"세 건."
"세 건? 야, 지난주에 열두 건 했잖아. 이번 주 왜 이래."
"몰라."
"모르긴. 간판을 좀 크게 하자니까. 사람들이 여기 뭐 하는 덴지 모른다니까 그러네."
세림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봉투를 접는 건 세림 몫이다. 세림은 종이를 접기 전에 손등으로 한 번 쓸어 편다. 십 년째 그렇게 한다. 내가 가르친 적 없는 버릇이다.
"근데 너 그거 알아? 앞 건물에 편지 대신 써주는 데 또 생겼대."
"그래?"
"거기는 AI로 쓴대. 삼천 원."
"싸네."
"싸네가 아니라 좀 발끈을 하라고. 십 년 한 사람이."
"발끈해서 뭐 해."
세림은 뭐라고 더 하려다가 그만두고 봉투를 접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여기서 지킨 세 가지를 생각했다. 의뢰인이 말하지 않은 사실은 지어내지 않는다. 받는 사람에게 대필이라는 걸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앞의 두 개는 손님을 위한 것이다. 세 번째는 아니다. 세 번째가 왜 규칙에 들어가 있는지 나도 설명한 적이 없다. 세림은 한 번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뒤로는 묻지 않았다.
세림은 여섯 시에 나갔다. 나가면서 문에 걸린 팻말을 뒤집어놓았다. 영업 중.
"야, 이거 뒤집어놨다. 일곱 시에 닫아. 오늘은 진짜로."
"응."
일곱 시에 닫지 않았다.
낮에 받아둔 형 이야기를 옮겨 적어야 했다. 팔십 그램 종이를 골랐다. 한 장에 끝낼 글이라 뒷비침은 상관없었고, 대신 잉크가 잘 마르는 쪽이 나았다. 남자는 이 편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사람처럼 보였다.
받아 적은 말 중에서 쓸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금액이 나오는 문장은 다 뺐다. 형이 몇 년도에 무엇을 했다는 문장도 뺐다. 남은 건 세 가지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두 달 동안 형을 기다렸다는 것. 남자가 그 두 달 동안 병실에서 잠을 잤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형에게 그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
형에게.
어머니는 마지막 두 달 동안 문 쪽을 보고 누워 계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접이침대에서 잤고, 형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보지 않으셔서 그랬다고 적으려다 지웠습니다. 물어보셨습니다. 내가 대답을 안 했습니다.
거기까지 쓰고 펜을 놓았다. 세 문장이면 됐다. 더 쓰면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된다.
잉크가 마르는 동안 축사 초고를 두 번 고쳤다. 그러다 보니 여덟 시가 가까웠다. 셔터를 반쯤 내리려고 일어섰을 때 문이 열렸다.
"아직 하시나요."
문장이 끝나기 전에 나는 손을 멈췄다.
십 년이었다. 얼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깨가 조금 두꺼워졌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들어와서 나를 보지 않고 천장을 먼저 봤다. 형광등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스위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이 좀 세네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를 봤다.
"오래 계셨어요? 여기."
나는 셔터에서 손을 뗐다. 손잡이가 차가웠던 것과 놓을 때 쇠가 한 번 울린 것을 기억한다. 그 소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팔 년이요."
"아."
십 년 전에 나는 이 사람에게 반말을 썼다. 이재야, 하고 불렀고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 두 글자가 입 안에서 걸렸다. 걸린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냥 나오지 않았다.
"이재 씨."
"네."
그게 전부였다. 십 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라는 게 이상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카운터 앞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앉으려고 들어온 사람의 동작이었다.
"의뢰하러 왔는데요."
"지금요?"
"안 되면……."
그는 문장을 맺지 않았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나는 의뢰서를 한 장 꺼내 앞에 놓았다. 손이 알아서 했다.
"항목만 적어주시면 됩니다. 받는 분, 관계, 전하고 싶은 사실. 사실만 적어주세요. 없는 건 제가 못 씁니다."
"규칙인가요."
"규칙입니다."
그는 펜을 들었다. 왼손잡이였던 게 기억났다. 여전히 왼손으로 쥐었고 종이를 비스듬히 돌려놓고 썼다.
받는 사람 칸에서 펜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가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뢰서를 돌려 받았다. 관계 칸은 비어 있었다. 전하고 싶은 사실 칸도 비어 있었다.
받는 사람 칸에는 세 글자가 있었다.
문수진.
"수진 씨."
그가 말했다.
"이거, 부칠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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