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문수진
딸이 펜을 내려놓았다.
공책을 도로 내 쪽으로 돌려놓고 가방을 들었다. 들 때 지퍼가 한 번에 안 닫혔다.
종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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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줄에 번호만 있다.
이름 칸은 비어 있고 그 아래는 아직 아무 줄도 없다.
공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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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를 창고 칸에 넣었다.
뜯긴 자리가 넷 다 위로 보이게 넣었다. 그렇게 놓으면 꺼낼 때 다시 뜯을 일이 없다.
셔터를 내렸다. 여섯 시인데 골목이 깜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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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토요일에 세림이 왔다.
반나절 일하고 오는 길이라 두 시가 조금 넘었다. 손등에 약을 발랐는지 번들거렸다.
"발랐네."
"엄마가 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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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놓았다.
화요일에 집에서 가져와 넣어 둔 것이다. 팔십 그램 한 장짜리고 겉면이 비어 있다.
세림이 그것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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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갈래."
"…….."
"그때는 거기 두려고 넣은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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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칠 거야?"
"몰라."
세림이 봉투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갖고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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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 물었다.
세림이 진열대 앞으로 갔다.
"두 장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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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이면 되잖아."
"…….."
"한 장이면 못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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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을 받고 영수증을 끊었다.
품목 칸에 `봉투 2`라고 적었다. 세림이 그것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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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 엄마가 전화했다.
"여덟 번째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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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썼는데."
"그건 네가 알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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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쳤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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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었다.
책상에 종이 넷이 있고 파란 줄 한 장이 가운데 있다.
넉 달째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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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주에 여섯 건을 썼다.
셋은 들어와서 세 줄을 읽고 그냥 나갔고 셋은 앉았다. 앉은 셋 중 하나가 물었다.
"이름 꼭 들어가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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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갑니다."
"…….."
"딴 데 가면 안 들어가죠."
"안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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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여긴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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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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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잠깐 있다가 수첩을 폈다.
"그럼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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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이 다섯이었다.
스물두 해 만에 연락하는 손아래 동서라고 했다. 쓰는 데 삼십 분 걸렸고 끝에 한 줄을 넣었다.
값을 받고 영수증 품목 칸에 `대필` 두 글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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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 토요일 세 시에 종이 울렸다.
나는 카운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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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에 눈이 묻어 있었다.
문 안쪽에서 한 번 털고 들어왔다.
"석 달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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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달 됐습니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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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손님 의자 앞에 섰다.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석 달째에 두 번 왔습니다. 닫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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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늦게 열었습니다."
"…….."
"압니다. 세 줄 붙은 것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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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받았다.
"그럼 그날 오셨습니까."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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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이 나오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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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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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앉았다.
외투를 안 벗고 앉아서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팔십 그램 흰 것이다. 열네 번 쓰던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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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에 놓았다.
"선생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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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은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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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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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면에 받는 사람 칸이 차 있었다.
내 이름이다. 발신인 칸에도 이름이 있고 주소가 없다.
"주소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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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칠 게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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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를 뜯었다.
풀이 얇게 발려 있어서 한 번에 떨어졌다. 팔십 그램 한 장이고 여덟 줄이다.
첫 줄이 내가 안 받은 그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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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왜 안 왔는지 묻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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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에 날짜와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시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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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에 가서 열한 시 십 분에 갔습니다. 막차가 지나가고 십 분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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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세지 않았습니다. 세면 기다리는 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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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가져갔습니다. 첫 항목이 그것이어서요.`
`비는 안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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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줄에서 손을 멈췄다.
종이를 카운터에 놓고 진열대 쪽을 한 번 봤다. 파란 줄 칸에 다섯 장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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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고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 번 더 읽었다.
거기서 무엇을 봤는지는 어디에도 안 쓰여 있었다.
읽고 종이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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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물으십니까."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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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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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손을 무릎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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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줄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대신 쓴 게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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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문 앞에 붙은 걸 보고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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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접수 공책을 폈다.
펴다가 앞쪽이 한 번 넘어갔다. 백 몇 번째 줄에 이재가 직접 쓴 이름이 있다.
이름 위에 줄이 그어져 있고 번호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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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줄은 제가 그었습니다."
"…….."
"찾아가신 걸로 해 놓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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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찾아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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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번호는 안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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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넘겨서 빈 장을 폈다.
"주소를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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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말했다.
나는 받아 적었다. 구 이름부터 동, 번지, 건물, 호수까지 받아 적고 한 번 읽어 드렸다.
여덟 해 동안 손님한테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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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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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칠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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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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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불렀다.
여덟 해 동안 선생님이라고 했다.
이재가 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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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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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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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한참 있었다.
"언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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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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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일어섰다.
외투 단추를 안 채우고 문 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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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진열대 앞에서 한 번 섰다.
파란 줄 칸을 봤다. 다섯 장이 아까 그대로 서 있었다.
손끝은 대지 않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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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반쯤 나가다가 돌아섰다.
"수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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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저는 그 줄 있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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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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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파란 줄 한 장을 책상 가운데에서 가져왔다.
띠지 밖이라 반품도 판매도 안 된 한 장이다.
앞에 놓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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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줄은 한 장뿐이라 이면지에 먼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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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항목이 됐다.
날짜를 쓰고 자리를 쓰고 그 아래에 또 날짜를 썼다. 여덟 해 동안 손님한테 받아 적던 모양 그대로다.
손이 저절로 그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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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문장으로 썼는데 두 줄에서 멈췄다.
멈춘 자리를 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 이야기였다. 그 사람이 그날 무엇을 했는지부터 적고 있었다.
두 장 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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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에 파란 줄에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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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줄이다.
쓰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여덟 해 동안 남의 편지 여섯 줄은 십오 분이면 썼다.
내 것은 그렇게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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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줄을 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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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봉을 썼다.
받는 사람 칸에 세 글자를 썼다. 이십 초 걸렸다. 남의 이름은 칸이 정해져 있다.
발신인 칸에도 세 글자를 썼다.
가게를 닫고 있던 동안에 이것이 사십 초 걸린 적이 있다. 그때는 여섯 번을 쓰고 일곱 번째를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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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십 초였다. 한 번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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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했다.
풀을 얇게 발랐다. 두껍게 바르면 나중에 뜯을 때 종이가 찢어진다.
이달 초에 뜯은 그 넷은 풀이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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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우체국에 갔다.
밤사이에 눈이 왔다. 골목에 발자국이 둘 나 있었고 하나는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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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가 셋인데 둘이 열려 있었다. 앞에 두 사람이 있어서 팔 분쯤 섰다.
봉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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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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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저울에 올렸다.
"받는 분 연락처 아세요?"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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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드렸다. 열한 자리다.
여덟 해 동안 공책에 적기만 하고 한 번도 안 눌러 본 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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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인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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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가요. 두 번 다 안 계시면 반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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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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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봉투를 뒤집어 봤다.
"발신인 주소도 적으셔야 돼요. 반송될 때 갈 데가 있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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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빌려서 뒷면에 적었다.
가게 주소다. 여덟 해 동안 남의 편지 뒷면에 적던 자리다.
거기에 내 주소를 적은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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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접수증을 내밀었다.
번호가 열세 자리다.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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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오니 눈이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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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로 돌아와서 불을 켰다.
책상 가운데가 비었다.
문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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