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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49

이름 칸

국수가 셋 나왔다. 주인이 둘을 먼저 놓고 하나를 나중에 놓았다. 나중 그릇이 내 앞이다. 등받이 없는 의자가 낮아서 상이 높았다. --- 세림이 안쪽이고 엄마가 맞은편이고 내가 옆이다. 셋이 앉으면 한 사람은 옆을 봐야 한다. --- 엄마가 젓가락을 갈랐다. 갈라서 세림 쪽으로 한 짝을 밀었다. 세림 앞에도 젓가락이 있었다. 세림이 그걸 받아서 자기 것 옆에 놓았다. --- "밥은 나와?" --- 엄마가 그렇게 물었다. 고개는 그릇 쪽이었다. --- "나와요." "…….." "구내식당 있어요." --- "몇 시에 먹어." "열두 시요." ---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 국수가 불기 전에 먹었다. 세림이 먼저 먹고 나보다 먼저 젓가락을 놓았다. 국물은 남겼다. 여덟 해 동안 세림은 국물을 다 먹었다. --- 계산은 엄마가 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놓고 거스름돈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세림이 문을 잡고 있었다. --- 골목에서 갈렸다. 엄마는 큰길 쪽이고 세림은 지하철 쪽이다. 나는 가게 쪽이다. 셋이 각각 다른 쪽이었다. --- 가게에 돌아와 셔터를 마저 올렸다. 네 시 반이고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십이월은 다섯 시면 밤이다. 간판 아래 세 줄이 불빛에 비쳤다. --- 카운터 아래에서 상자를 꺼냈다. 석 달 동안 창고 칸에 있던 것이다. 뚜껑을 여니 종이 냄새가 났다. 아홉 통이다. --- 세림 편지와 엄마 편지는 집 서랍에 있다. 여기 있는 아홉은 손님 것이다. --- 다섯에 이름이 있다. 넷은 겉봉이 비어 있다. --- 접수 공책을 폈다. 여덟 해 치 뒤에 빈 장이 남아 있다. 새로 사지 않았다. 이름 다섯을 찾아 번호를 옮겨 적었다. --- 첫 번째를 눌렀다. 신호가 여덟 번 가고 끊겼다. 자동응답으로 안 넘어갔다. --- 두 번째는 사람이 받았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 "거기 김영채 씨 번호 아닙니까." "아닌데요." "…….." "저 이 번호 작년에 받았어요." --- 번호는 살아 있고 사람이 바뀌었다. 없어지는 것 말고 이런 것도 있다. --- 세 번째는 없는 번호였다. 안내 목소리가 삼 년 전 그분 때와 똑같았다. 같은 문장이고 같은 억양이다. 없는 번호가 둘이 됐다. --- 네 번째를 누르기 전에 공책을 봤다. 그 줄은 번호가 두 번 적혀 있다. 앞의 번호를 긋고 뒤에 다시 적었다. 내가 받아 적고 읽어 드리면 손님이 고쳐 준다. 고쳐 준 줄은 손님이 확인한 줄이다. --- 이분은 받는다. --- 세 번 만에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여백」이라는 편지 쓰는 가게입니다." "…….." "오 년 전에 편지를 하나 맡기셨는데 아직 보관 중입니다." --- "제가요?" --- "네." "편지를요?" "…….." "아닌데요. 저 그런 거 안 했는데요." --- "번호를 확인하고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잘못 아신 거예요." --- 끊겼다. --- 나는 공책의 그 줄을 봤다. 두 번 적힌 번호가 그대로 있다. 앞의 번호는 그어져 있고 뒤의 번호는 그대로다. 확인한 줄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다. 그분이 확인해 준 것은 번호지 편지가 아니다. --- 다섯 번째는 받았고 기억했다. "아, 거기." 여자분이고 목소리가 낮았다. --- "아직 있습니다." "…….." "몇 년 됐죠." "사 년입니다." --- 한참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소리를 줄이는 것 같더니 다시 켰다. "다음에 갈게요." --- "네." "…….." "언제쯤이라고 할까요." "그건 지금 못 정하겠어요." --- 끊고 공책을 봤다. 다섯 줄에 아무것도 못 적었다. 찾아간 줄에 긋는 줄을 나는 다섯 다 못 그었다. 공책에는 온다는 말을 적는 칸이 없다. --- 여섯 시 십오 분에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다. 화면을 보고 나는 그것이 어디서 본 번호인 줄 알았다. 여름에 삼 초 울리고 끊긴 번호다. --- 받았다. "여보세요." "…….." "거기 여백이에요?" --- 여자분이고 사십 대쯤이었다. "맞습니다." "…….." "저희 엄마 물건에서 영수증이 나와서요." ---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장미숙이요." --- 나는 공책을 덮지 않았다. 삼 년 전 십일월 줄에 그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고 번호가 있고 줄이 없다. 여름에 내가 눌렀을 때 없는 번호였던 그 번호다. --- "어머님은."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 "…….." "영수증에 여기 번호가 찍혀 있어서요. 여름에 한 번 걸었는데 제가 그때 못 기다렸어요." --- "…….." "이번 주에 그 집을 내놨어요." --- "기억납니다." 내가 말했다. "삼 초였습니다." --- "지금 가도 돼요?" "오십시오." --- 일곱 시에 왔다. 외투를 입은 채로 들어와서 진열대를 안 보고 카운터로 왔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영수증이다. 삼 년 전 십일월이고 품목 칸에 `대필`이라고 적혀 있다. 내 글씨다. --- "이거 맞죠." "맞습니다." --- 상자에서 넷을 꺼냈다. 겉봉이 다 비어 있다. 팔십 그램 한 장짜리가 넷이고 크기가 같다. "이 중에 하나입니다." --- "어느 거예요." --- "모르겠습니다." --- 딸이 넷을 봤다. "이름이 왜 없어요." "안 정하신 분들입니다." "…….." "받는 사람을 안 정하시면 겉봉에 쓸 것이 없습니다." --- 딸이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엄마 글씨 가져왔어요. 이거랑 맞춰 보면 되잖아요." --- 나는 수첩을 받아서 폈다. 가계부였고 숫자가 많았다. 글씨는 작고 세로획이 왼쪽으로 기운다. 봉투 넷은 다 내 글씨다. 겉봉도 안에 든 편지도 내가 썼다. --- "맞춰 볼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어머님 글씨는 한 자도 없습니다." --- 딸이 수첩을 도로 가져갔다. 가져가서 가방에 넣다가 무릎에 놓았다. "그럼 어떻게 해요." --- 나는 봉투 넷을 카운터에 나란히 놓았다. 여덟 해 동안 나는 봉한 봉투를 뜯은 적이 없다. --- 뜯었다. --- 풀 자리가 뻣뻣해서 넷 다 끝이 조금 찢어졌다. 한 장씩 펴서 딸 앞으로 돌려놓았다. "읽으십시오." --- 딸이 읽었다. 읽는 동안 나는 카운터 안쪽에 서 있었다. 밖에서 세탁소 셔터 내리는 소리가 났다. 넷을 다 읽는 데 팔 분쯤 걸렸다. --- "이건 아니에요." 딸이 첫 번째를 밀어 놓았다. "여기 형제 얘기 나오는데 엄마는 외동이에요." --- 세 번째도 밀었다. "이것도 아니에요. 문장이 길잖아요. 엄마는 이렇게 말 안 해요." --- 두 번째와 네 번째가 남았다. --- 딸이 두 번째를 들었다. "여기 무릎 나와요. 엄마 무릎 수술했어요." --- 그리고 네 번째를 들었다. "여기는 십일월이라고 돼 있고요." --- "영수증이 십일월입니다." "네." "…….." "근데 무릎도 맞잖아요." --- 딸이 둘을 나란히 놓았다. 놓고 한참 봤다. 왼쪽을 봤다가 오른쪽을 봤다가 다시 왼쪽을 봤다. "짚어 주세요." --- "못 짚습니다." --- "하나만 말해 주시면 되잖아요." "…….." "짚으면 제가 정하는 게 됩니다." --- 딸이 나를 봤다. 나는 봉투 둘을 딸 쪽으로 반 뼘 밀어 놓았다. --- 딸이 둘을 다시 봤다. --- "둘 다 주시면 안 돼요?" "하나는 다른 분 겁니다." --- 딸이 손을 내렸다. --- 나는 펜을 들었다. 청색 볼펜이고 지난주에 산 것이다. 넷의 맨 아래에 한 줄씩 적었다. `이 편지는 문수진이 대신 썼습니다.` --- 딸이 그것을 봤다. "색이 다르네요." "삼 년 됐습니다." "…….." "오래되면 가라앉습니다." --- "이건 오늘 쓰신 거예요?" "네." --- "왜요." --- "이제 그렇게 합니다." --- 딸이 둘을 카운터에 놓고 손을 뗐다. 넷을 상자에 도로 넣었다. 뜯긴 자리가 넷 다 위로 보였다. 이제 이 상자에 봉해진 것은 없다. --- "제가 읽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머지 세 분이 오시면 그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 딸이 가방을 들었다. 들었다가 도로 놓았다. --- 공책이 카운터에 펴져 있었다. 오늘 줄이 비어 있다. 이름 칸과 번호 칸이 나란히 있고 둘 다 비어 있다. --- 딸이 펜을 집었다. 내가 내민 것이 아니다. 공책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오늘 줄에 번호부터 적었다. 열한 자리다.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 여덟 해 동안 이 공책에 손님이 직접 적은 줄은 하나였다. 적는 동안 내 손은 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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