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국밥 한 그릇의 값

1

빈 그릇

겨울 아침의 국은 종일 끓인 것보다 첫 국자가 뜨겁다. 정만호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김이 낮은 처마를 밀고 올라 서리 낀 문살에 닿았다. 사골을 밤새 고아 뽀얗게 오른 국물 위로 기름이 얇게 돌았다. 그는 국자로 한 번 저어 밑을 훑고, 뚝배기를 데우려 물을 받았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밖에서 든 찬 기운이 발목을 감았다. 아직 장은 서지 않은 아침이었다. 오일장은 닷새 뒤에나 어귀를 채울 것이고, 그 사이 붙박이로 문을 여는 집은 이 국밥집뿐이었다. 손님이 있을 시각이 아니었다. 문지방에 마른 처녀가 서 있었다. 열아홉이나 되었을까. 두 손으로 그릇 하나를 받쳐 들고 있었다. 낡은 그릇이었다. 손끝이 트고 갈라져, 그릇을 쥔 자리가 붉었다. "국밥을 파신다지요." 또박또박한 존대였는데, 끝이 날카로웠다. "앉아라." 정만호는 국자를 내려놓았다. "뜨거우니 천천히." 처녀는 앉지 않았다. 그릇을 부뚜막 가까이 내밀었다. "빈 그릇을 든 건, 값을 치를 게 이것뿐이라서 말입니다." 정만호는 그 그릇을 보았다. 손잡이 없는 오지그릇. 이 빠진 자리가 두 군데. 오래 쓴 물건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받았다. 오른손이었다. 그릇을 쥘 때 그의 엄지 아래 두덩에 박인 굳은살이 그릇의 거친 겉면에 걸렸다. 그는 그 손을 슬쩍 오므렸다. "밥값은 됐다. 앉아라." "공으로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닙니다." 처녀의 눈이 부뚜막을 지나 그의 얼굴에 닿았다. "이 그릇, 밑을 보셔야지요." 정만호는 그릇을 뒤집었다. 밑바닥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칼끝으로 그은 획이 아니라, 오래 눌러 파낸 글씨였다. 흙물이 배어 검게 남은 자국. 그는 그 글자를 읽었다. 읽는 순간, 국물 끓는 소리가 멀어졌다. 이십 년이었다. 그 겨울, 어느 객주의 뒷마당. 관의 은밀한 심부름으로 그가 벤 사내. 죄인인 줄 알았고, 죄인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 성이 이 그릇 밑에 있었다. 그의 손이 그릇 가장자리를 쥐었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손마디가 하얘졌다. 그는 이내 손을 폈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처녀가 말했다. "여기 저잣거리 어딘가에 있다고, 어미가 그리 적어 두었지요." 정만호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부뚜막에, 소리 나지 않게. "이름만 알고 왔느냐." "이름과, 그자의 얼굴을 말입니다." 처녀는 품을 눌렀다. 안에 접힌 무엇이 있었다. "어미가 남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제가 모릅니다. 본 적이 없으니." 밖에서 다리를 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복단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다 처녀를 보고 멈칫했다. "아이고, 손님이셨네. 이 아침에 어디서 오셨수?" 복단은 이내 정만호를 보았다. "어르신, 여각 쪽에서 또 사람이 왔다 갔거든요. 터 이야기를 또…" "됐다." 정만호가 끊었다. 그는 뚝배기를 집었다. 데운 물을 따라 버리고, 국자로 뜨거운 국물을 부어 밥을 데웠다. 한 번, 두 번.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며 밥알에 온기를 먹였다. 집간장으로 간을 잡고, 파를 얹었다.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쓴 손이었다. 그는 처녀 앞에 뚝배기를 놓았다. "먹어라. 얼굴은 천천히 찾아라." 그가 말했다. "값은 다음에." 처녀는 뚝배기를 내려다보았다.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트고 갈라진 손이 뚝배기를 감쌌다. 뜨거울 텐데, 놓지 않았다. "어르신." 처녀가 물었다.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정만호는 국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궂은 날도 아닌데, 오른 어깨가 한 번 결렸다. "정가다." 그는 다시 국자를 들었다. 처녀의 이름은 남설이라 했다. 남가의 딸이었다. 그릇 밑의 이름은, 그가 이십 년 전 벤 사내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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