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 1

환자의 맥에서 비명이 들렸다

빗방울이 앞유리를 때리는 순간, 윤해진은 자신이 죽었던 날의 냄새를 맡았다. 젖은 아스팔트와 오래된 방향제, 식어 버린 커피. 그리고 브레이크 패드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 해진은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경적이 귀를 찢었다. 왼쪽 차선을 달리던 화물차가 그의 승용차 앞을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쓸고 지나갔다. 차체가 휘청였고, 조수석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침통 하나가 굴러 브레이크 페달 아래에 부딪혔다. 해진은 갓길에 차를 세운 뒤에도 한동안 손을 운전대에서 떼지 못했다. 손등은 매끈했다. 검상도, 독에 문드러진 흔적도 없었다. 손가락 끝에는 한의사로 일하며 생긴 옅은 굳은살만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2026년 8월 2일이 떠 있었다. “돌아온 건가.” 목소리가 낯설었다. 삼십 년 만에 듣는 자신의 젊은 목소리였다. 해진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풍경이 눈꺼풀 안쪽에서 되살아났다. 검게 탄 대전의 기둥, 피에 젖은 백의,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던 어린 제자의 손. 중원에서 의선이라 불린 삼십 년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선명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채 삼 초도 지나지 않았다. 화물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교차로로 뛰어드는 순간, 그는 분명 충돌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름도 모르는 산골의 시체 더미 속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약초를 씹었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침을 들었다. 그렇게 삼십 년을 살다가 다시 눈을 뜨니 충돌 직전이었다. 해진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서류를 주웠다. 맨 위에는 임대차 계약서가 있었다. 청우한의원. 외삼촌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석 달째 비어 있던 작은 한의원이었다. 오늘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하면 건물주는 간판을 내리겠다고 했다. 사고 전의 해진은 정리만 하고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환자도, 빚도, 책임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마지막 맥을 짚고 돌아온 지금은 그 네 글자가 다르게 보였다. 청우한의원. 아직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곳처럼. 일주일 뒤, 해진은 간판 아래에 작은 아크릴 판을 하나 더 달았다. 야간 진료. 낮에는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저녁 여섯 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열었다. 무림에서 익힌 의술을 현대에서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이곳의 법과 진단 체계가 있었다. 해진은 검사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았고, 응급 환자는 지체 없이 병원으로 보냈다. 다만 현대의 지식이 놓치는 틈을 삼십 년의 경험으로 들여다볼 뿐이었다. 문제는 환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밤 열한 시 사십 분. 해진은 오늘도 빈 접수대의 불을 끄려 했다. 그때 유리문 밖에서 무언가가 쓰러졌다. 쿵. 해진이 문을 열자 검은 후드 차림의 남자가 문턱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쯤. 얼굴은 비에 젖었지만 입술은 이상할 만큼 말라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누른 채 짧고 얕은 숨을 쉬었다. “진료…… 끝났습니까?” “아직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남자는 일어서려다 벽을 짚었다. 해진이 팔을 받치는 순간, 옷 아래에서 비정상적인 열기가 느껴졌다. 대기실 의자에 앉힌 뒤 산소포화도와 혈압부터 확인했다. 맥박은 빠르고 혈압은 낮았다. 체온계는 39.1도를 가리켰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민도윤.” “어디가 가장 아프죠?” “배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도윤은 구겨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사흘 전 대학병원 응급실 검사 결과였다. 복부 영상과 혈액검사에서 당장 수술할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고, 증상이 지속되면 재내원하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사흘 전보다 심해졌습니까?” “네. 오늘은 손도 떨리고.” 해진은 그의 손톱과 눈동자, 목 주변을 살폈다. 왼쪽 귀 뒤에 작은 사각형 자국이 있었다. 밴드를 오래 붙였다 뗀 흔적처럼 붉은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여기는 뭡니까?” 도윤의 시선이 흔들렸다. “피로 회복 패치요. 회사에서 나눠 줬습니다.” “무슨 회사죠?” “세림바이오 물류센터요. 야간 배송 전에 붙이면 덜 피곤하다고…….” 말끝이 흐려졌다. 도윤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해진은 그를 진료 침대에 눕히고 119에 연락해 주소와 상태를 알렸다. 전화를 끊은 뒤 손목 아래에 손가락 세 개를 얹었다. 빠르고, 가늘고, 불규칙했다. 현대의 해진이 알던 맥이라면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손끝 깊은 곳에서 낯선 울림이 올라왔다. 쇠붙이를 긁는 소리. 어두운 계단참. 목덜미를 누르는 차가운 손가락. —움직이면 동생도 같은 꼴이 된다. 해진은 손을 뗐다. 진료실의 형광등이 희게 떨렸다. 도윤은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중원에서 독살당한 사람들의 맥을 수없이 짚었다. 독에는 독을 만든 자의 의도가 남았다. 살리기 위한 약과 죽이기 위한 독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도 맥 안에서 전혀 다른 결을 냈다. 그 차이를 해진은 ‘살의의 잔향’이라 불렀다. 그 감각까지 따라왔을 줄은 몰랐다. “민도윤 씨.” 도윤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패치, 자발적으로 붙인 것 맞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지금 숨기면 치료가 늦어집니다. 병원에 전달해야 해요.” 한참 뒤 도윤이 입술을 열었다. “돈을 준다고 했습니다. 한 달만 테스트하면 삼백만 원. 합법이라고 했어요.” “동의서는요?”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복벽이 단단하게 긴장했다. 맥은 아까보다 더 흐트러졌다.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해진은 서랍에서 일회용 멸균침을 꺼냈다. 중원에서라면 내공으로 막힌 경맥을 밀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몸에는 단전에 모래 한 줌만 한 기운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정확한 자리와 깊이를 기억하는 손뿐이었다. “응급실로 가기 전까지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돕겠습니다. 의식이 흐려지면 바로 말하세요.” 도윤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호흡과 맥박을 계속 확인하며 침을 놓았다. 한 번에 기적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과도하게 흥분한 몸이 조금이라도 버틸 시간을 벌고, 구급대에 인계할 때까지 상태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첫 번째 침이 들어가자 도윤의 굳은 어깨가 미세하게 내려갔다. 두 번째 침 뒤에는 끊어질 듯하던 호흡이 조금 길어졌다. 세 번째 침을 잡는 순간, 한의원 문이 열렸다. 우산을 접으며 들어온 남자는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빗속을 걸어온 사람답지 않게 구두에 흙탕물 한 점 없었다. “민도윤 씨가 여기 있습니까?” 해진은 침을 든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보호자십니까?” “회사 동료입니다. 이 친구가 자꾸 쓸데없는 데를 돌아다녀서요.” 남자는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침대 위 도윤과 접수대의 휴대전화, 벽에 붙은 CCTV 안내문을 차례로 훑었다. 도윤의 맥이 손가락 아래에서 갑자기 튀었다. 공포였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의 잔향이 더 선명하게 터졌다. 목덜미를 누르던 손. 검지 두 번째 마디에 박힌 검은 가시. 그리고 귓가에서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 —계약을 어기면 부작용으로 죽은 게 되는 겁니다. 해진은 회색 정장 남자의 오른손을 보았다. 검지 두 번째 마디에 가느다란 검은 흉터가 있었다. “데려가겠습니다.” 남자가 침대로 다가왔다. 해진이 그의 앞을 막았다. “환자는 곧 구급대가 인계합니다.” “가족도 아닌데 선생님이 뭘 안다고 이러십니까?” “가족이 아니라서 압니다.” 해진은 남자의 젖지 않은 어깨와 마른 구두를 바라봤다. “환자를 걱정해 빗속을 뛰어온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까.” 남자의 미소가 지워졌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잠시 문 쪽을 보더니 재킷 안으로 오른손을 넣었다. 해진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목을 잡고 반 걸음 비켜서며 팔꿈치를 접었다. 내공은 없었지만 사람의 관절이 어느 방향으로만 움직이는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남자의 상체가 접수대 위로 무너졌다. 재킷 안에서 작은 주사기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명한 약액이 든, 바늘 덮개조차 없는 주사기였다. 남자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해진은 더 힘을 주는 대신 엄지로 손목 안쪽을 눌렀다. 힘이 빠진 손가락이 접수대를 긁었다. “이거 놓으시죠.” “구급대가 경찰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신고할 때 의심스러운 사람이 오면 경찰 협조를 요청해 달라고 덧붙여 둔 참이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사이렌이 건물 앞에서 멎었다. 문밖으로 구급대원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해진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남자는 팔을 거칠게 빼냈다. 피부가 쓸려 피가 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해진은 쫓지 않았다. 도망치는 자보다 살려야 할 사람이 먼저였다. 구급대원들이 들어오자 해진은 도윤의 활력징후와 증상 변화, 귀 뒤 패치 자국, 임상시험에 관한 진술을 빠르게 전달했다. 바닥의 주사기는 손대지 않은 채 위치를 가리켰다. 도윤이 들것에 실리기 직전 해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선생님.” “네.” “제 동생도…… 같은 패치를 붙였습니다.” 해진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세림바이오 기숙사요. 오늘 밤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구급차 문이 닫혔다. 붉은 불빛이 빗물 고인 골목을 훑으며 멀어졌다. 잠시 뒤 도착한 경찰이 주사기와 CCTV 영상을 확보했다. 해진은 목격한 일을 진술하고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혼자가 되었다. 진료실에는 도윤이 가져온 검사 결과지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해진이 종이를 집어 들자 뒷면에 희미한 자국이 보였다. 볼펜으로 눌러 쓴 글씨가 다음 장에 흔적으로 남은 것이었다. 연필심을 비스듬히 문지르자 주소와 숫자가 떠올랐다. 세림바이오 제3생활관 407호. 그리고 그 아래, 명단처럼 적힌 열두 개의 이름. 민도윤의 이름 옆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해진은 맨 아래의 문장을 읽었다. 적합군 12명. 2차 투여 개시.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삼십 년 전, 해진은 살리기 위해 무림의 전쟁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다짐했다. 하지만 죽이려는 자가 환자의 몸 안에 칼을 숨겨 놓았다면, 의원이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해진은 침통을 챙겨 들었다. 청우한의원의 야간 진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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