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 2

살의를 옮기는 차

세림바이오 제3생활관은 지도에 없는 건물이었다. 내비게이션은 해진을 산업단지 끝의 막다른 길에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분명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떴지만, 전조등 앞에는 녹슨 철제 펜스와 잡초뿐이었다. 펜스 너머로 불 꺼진 공장 지붕들이 빗물에 잠겨 있었다. 해진은 민도윤이 남긴 검사 결과지를 다시 펼쳤다. 제3생활관 407호. 주소 아래 눌려 있던 숫자 중 마지막 네 자리는 건물 번호가 아니었다. 중원에서 약방의 외상 장부를 읽을 때도 비슷한 표기를 본 적이 있었다. 장소를 적는 척하면서 날짜나 수량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03-4-07. 해진은 숫자를 세 묶음으로 나누어 보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산업단지 안내도에서 세림바이오 제3물류동을 찾았다. 4구역 7번 창고. 현재 위치에서 불과 칠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앞서 진술을 받은 경찰에게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민도윤의 동생이 연락 두절 상태이며, 임상시험 대상자로 의심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곧 답장이 왔다. 순찰차를 보내겠습니다. 절대 혼자 들어가지 마십시오. 해진은 메시지를 읽고도 시동을 껐다.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옳았다. 그는 수사관도 아니었고, 삼십 년 전처럼 검을 든 무인도 아니었다. 지금 가진 것은 멸균침 한 통과 휴대전화, 사고를 겨우 피한 낡은 승용차뿐이었다. 그러나 비 너머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를 끈 검은 승합차 한 대가 공장 뒤편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차체 옆면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뒷바퀴가 고인 물을 지나갈 때마다 차가 한쪽으로 무겁게 기울었다. 사람을 여럿 실은 차의 움직임이었다. 해진은 차량 번호를 촬영해 경찰에게 보냈다. 위치 공유를 켠 뒤 차에서 내렸다. 제3물류동의 정문은 잠겨 있었지만, 빗물이 흘러내리는 외벽을 따라가자 반쯤 열린 철문이 나왔다. 문 옆에는 ‘가스 누출 점검 중’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날짜도, 담당 업체도 없는 종이였다. 안쪽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창고라면 냉각기나 환풍기 소리가 있어야 했다. 대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긴 복도에 일정하게 울렸다. 바닥에는 최근에 닦은 듯한 소독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냄새 아래로 아주 엷은 단내가 섞여 있었다. 해진은 걸음을 멈췄다. 중원에서 마취산을 만들 때 쓰던 약재와 닮은 냄새였다. 재료는 다르더라도 사람의 감각을 흐리게 만들려는 약은 끝에 비슷한 단내를 남겼다. 그는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벽의 화재경보기를 찾았다. 경보기 아래에는 투명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덮개 가장자리에 새 접착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사용하지 못하게 붙여 놓은 것이었다. 복도 끝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해진은 열린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선반과 택배 상자가 치워진 공간에 간이침대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침대마다 손목 고정띠가 달려 있었고, 머리맡의 수액걸이는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세 번째 침대 아래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이 들렸다. 해진이 몸을 숙이자 금이 간 휴대전화 하나가 보였다. 화면에는 ‘오빠’라는 이름으로 스물세 통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잠금 화면의 배경 사진에는 민도윤과 닮은 젊은 여자가 웃고 있었다. 민도윤의 동생이었다. 휴대전화 옆에는 떼어 낸 패치가 두 장 놓여 있었다. 귀 뒤에 붙일 수 있을 만큼 작은 사각형. 한 장은 접착면이 위를 향했고, 가운데에는 말라붙은 핏방울이 검게 변해 있었다. 해진은 손을 대지 않고 사진부터 찍었다. 그때 벽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한 명 확인했습니다.” “명단은 열둘이야.” “민도윤이 빠졌습니다. 병원으로 넘어갔고요.” 짧은 침묵 뒤, 낮은 욕설이 이어졌다. “그럼 동생을 두 번 잡아. 형제 표본이면 값은 맞아.” 해진의 시선이 굳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지 않고 침대 밑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증거를 들고 나가다 빼앗기는 것보다 경찰이 원래 자리에서 확보하는 편이 나았다. 문이 열렸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해진을 보고 멈췄다. 가슴에는 세림바이오 협력업체 출입증이 달려 있었지만 사진 부분이 검은 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누구십니까?” “가스 누출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해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남자의 눈이 해진의 젖은 셔츠와 손에 든 침통을 차례로 훑었다. “어느 업체죠?” “사람부터 대피시켜야 합니다.” “업체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가 오른손을 뒤로 숨겼다. 해진은 그의 어깨가 아니라 발을 보았다. 발끝은 도망갈 문이 아니라 해진의 왼쪽 무릎을 향하고 있었다. 공격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남자가 달려들었다. 해진은 옆으로 반 걸음 물러서며 침통으로 손등을 쳤다. 남자의 손에서 짧은 전기충격기가 떨어졌다. 곧바로 팔꿈치가 날아왔다. 해진은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충격이 턱을 스치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삼십 년의 기억과 젊은 몸은 아직 서로를 믿지 못했다. 기억은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두 번째 공격이 복부로 들어왔다. 해진은 팔로 막고 뒤로 밀렸다. 선반 모서리가 등을 찍었다. 숨이 막혔다. 남자가 바닥의 전기충격기를 다시 집으려 몸을 숙였다. 해진은 침 하나를 뽑았다. 눈이나 목을 노리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예전의 손은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 끝을 남자의 팔 바깥쪽에 얕게 찔러 넣었다. 근육이 수축하는 지점이었다. 남자의 오른손이 순간 굳었다. 전기충격기가 다시 바닥을 굴렀다. 해진은 그 틈에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시간을 벌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복도 반대편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두 사람이 이동식 침대를 밀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귀 뒤의 붉은 사각형 자국과 민도윤을 닮은 눈매. 잠금 화면에서 본 얼굴이었다. “민도윤 씨 동생분!” 해진이 소리치자 여자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작업자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은 침대를 놓고 해진에게 달려왔고, 다른 한 명은 승합차가 있는 출입구 쪽으로 더 빠르게 밀기 시작했다. 해진은 벽의 경보기 덮개를 팔꿈치로 내리쳤다. 한 번. 금이 갔다. 두 번. 덮개가 깨졌지만 안쪽 레버는 움직이지 않았다. 접착제가 틈을 모두 막고 있었다. 뒤에서 손이 해진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몸을 돌리는 대신 그대로 낮췄다. 달려오던 사람의 무게가 앞으로 쏠렸다. 해진은 손목을 붙잡아 벽 쪽으로 흘려 보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어깨가 경보기 아래에 부딪혔다. 깨진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졌다. 해진은 조각을 집어 접착제 틈에 밀어 넣었다. 손끝이 베였다. 피가 묻은 조각을 비틀자 굳어 있던 레버가 아래로 내려갔다. 경보음이 창고 전체를 찢었다. 잠시 뒤 천장의 살수 장치에서 물이 쏟아졌다. 단내가 옅어졌고, 닫혀 있던 방들 안에서 기침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 방이 아니었다. 복도 양쪽에 있던 철문 네 개가 동시에 열렸다. 안에는 침대에 묶인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스스로 일어나려 했고, 누군가는 눈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출입구로 향하던 작업자가 욕설을 내뱉었다. 침대를 버리고 혼자 달아날지, 여자를 차에 실을지 판단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망설임이면 충분했다. 멀리서 사이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구급차 한 대의 소리가 아니었다. 순찰차와 소방차의 음이 겹쳐 빗속을 갈랐다. 작업자는 침대를 놓고 옆문으로 달아났다. 해진은 쫓지 않았다. 민도윤의 동생에게 달려가 목 옆의 맥박을 확인했다. 느리고 약했다. 손가락을 대는 순간, 살의의 잔향이 밀려들었다. 차가운 고무장갑. 흰 천장에 번지는 검은 물자국. 여자의 팔에 매직으로 숫자를 쓰는 손.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C군은 병원으로 보내. 의사가 이상을 알아차리는지 봐야 하니까. 해진은 숨을 멈췄다. 그들은 부작용을 숨기려 한 것만이 아니었다. 일부러 환자를 병원으로 보냈다. 어떤 의사가, 어느 검사까지 알아차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살의가 사람을 죽이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미끼로 남겨 두는 것 역시 살의였다. “들립니까?” 해진은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오빠…….” “병원에 있습니다. 살아 있어요.” 그 말에 불규칙하던 맥이 아주 조금 길어졌다.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민……소정.” “민소정 씨. 곧 구급대가 옵니다. 잠들지 말고 제 목소리를 들으세요.” 소정은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해진의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침대 아래를 가리키는 듯했다. “바닥…… 숫자.” 해진이 고개를 숙였다. 침대의 금속 프레임 아래에 검은 펜으로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12-7-1. “이게 뭡니까?” “열두 명이…… 아니에요.” 소정의 숨이 끊어질 듯 얕아졌다. “열두 번째…… 일곱 번째 투여…… 첫 번째 생존.” 해진은 명단을 떠올렸다. 적합군 12명이라는 문장은 사람 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합군 자체가 열두 번째 묶음이었다. 그 전에 적어도 열한 개의 군이 있었다. 몇 명이 시험을 거쳐 갔는지 계산할 수 없었다. 소방대원들이 출입구를 열어젖혔다. 뒤이어 들어온 구급대가 환자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소정의 상태와 들은 말을 전달하고, 자신이 들어왔던 방의 침대 아래에 휴대전화와 패치가 있다고 알렸다. 경찰은 현장에서 작업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을 붙잡았다. 나머지는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검은 승합차도 사라졌지만 해진이 찍어 둔 번호가 있었다. 새벽 네 시가 가까워서야 마지막 환자가 이송됐다. 해진은 구급차에 동행하지 않았다. 현장에 남아 진술을 마치고, 손바닥의 상처에 임시로 붕대를 감았다. 아까 턱을 스친 충격이 뒤늦게 욱신거렸다. 형사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신고는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들어가지 마세요. 선생님까지 실려 갈 뻔했습니다.” “그러겠습니다.” 해진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청우한의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 그는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떨어진 침과 깨진 물건을 정리했다. 경찰이 가져간 주사기 자리에는 증거물 표식의 접착 자국만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민도윤이 이송된 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였다. 도윤과 소정 모두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으며, 창고에서 발견된 다른 환자들도 치료 중이라고 했다. 다만 일반적인 약물 검사로는 원인 물질을 특정하지 못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의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민도윤 씨 혈액에서 나온 대사산물하고 동생분에게서 나온 게 달라요. 같은 패치를 썼다는데 서로 다른 물질처럼 보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약을 썼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몸 안에서 전혀 다르게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확인해야 합니다.” 통화가 끝난 뒤 해진은 창고에서 베인 손바닥의 붕대를 풀었다. 상처는 얕았다. 소독을 하려고 손목을 뒤집는 순간, 손끝에서 이상한 박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맥이었다. 빠르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 쇠붙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해진은 움직이지 못했다. 살의의 잔향은 독이 든 사람의 몸에서만 들려야 했다. 적어도 중원에서는 그랬다. 젖지 않은 회색 소매. 검은 흉터가 있는 검지. 누군가 청우한의원의 문을 바깥에서 촬영하는 화면. 그리고 기계음처럼 납작한 목소리가 자신의 맥 안에서 흘러나왔다. —윤해진, 반응 확인. 다음 투여 대상으로 전환한다. 해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손잡이 아래에 젖은 사각형 패치 하나만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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