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진은 자신의 손목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윤해진, 반응 확인. 다음 투여 대상으로 전환한다.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맥박 사이사이에 가느다란 마찰음이 남았다. 마른 칼날을 숫돌에 천천히 미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유리문 밖의 사각형 패치를 바라봤다.
패치는 문손잡이 바로 아래에 붙어 있었다. 한의원에 들어오는 사람이 무심코 손등을 스칠 만한 자리였다. 표면에는 빗물이 맺혀 있었지만 접착면 가장자리는 들뜨지 않았다. 방금 붙인 것이 분명했다.
해진은 맨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과 핀셋, 멸균 용기를 꺼냈다. 휴대전화로 위치를 촬영한 뒤 문 안쪽에서 잠금을 풀었다. 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소독약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섞여 밀려왔다.
패치 한가운데에 육안으로 겨우 보이는 구멍이 있었다.
해진은 용기 뚜껑을 닫고 손바닥의 상처를 확인했다. 창고에서 경보기 덮개를 깨다가 베인 자리였다. 피는 이미 멎었지만 상처 가장자리에 회색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핀셋으로 건드리자 가느다란 조각이 빠져나왔다.
머리카락보다 짧은 금속침이었다.
그 순간 기억이 이어졌다. 창고의 살수 장치가 터졌을 때, 손바닥으로 민소정의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금속 프레임 아래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투명한 테이프가 한 겹 감겨 있었다.
그들은 침대에도 같은 장치를 붙여 둔 것이다.
해진은 금속침을 별도의 용기에 넣었다. 한의원 전화가 아니라 자신의 휴대전화로 조금 전의 형사에게 연락했다.
“강태주 형사입니다.”
목소리에는 잠을 포기한 사람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윤해진입니다. 제 손에서 패치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금속침이 나왔습니다.”
짧은 침묵 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어디십니까?”
“한의원입니다. 문밖에도 패치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만지지 마세요. 안에 계시고, 문 잠그십시오.”
“이미 증거 용기에 옮겼습니다. 장갑을 썼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꼭 저희보다 한 단계씩 먼저 가 계시네요.”
“이번에는 제가 표적입니다.”
해진은 자신의 맥에서 들은 문장을 말하려다 멈췄다. 독이 든 사람의 맥에서 살의를 듣는다는 말을 형사가 그대로 믿을 가능성은 낮았다. 믿는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정보는 수사를 흐릴 수 있었다.
“패치를 붙인 사람이 그렇게 알리고 갔습니다.”
“직접 쓴 경고가 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우연히 붙은 위치는 아닙니다.”
태주는 더 묻지 않았다.
“십 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기다리지 말고 119부터 부르세요.”
통화가 끝났다.
해진은 진료 침대에 앉아 자신의 상태를 기록했다. 체온 37.4도. 혈압은 평소보다 조금 높았고 맥박은 분당 아흔둘이었다. 동공 반응과 손가락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다만 손바닥 상처를 중심으로 차가운 기운이 손목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중원에서 독에 당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공포였다. 독의 이름을 모르면 사람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독의 탓으로 돌렸다. 심장이 빨라지는 것도, 입이 마르는 것도, 심지어 살아남으려는 몸의 반응까지 죽음의 징조로 오해했다.
해진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어 종이에 적었다.
확인: 피부를 뚫은 금속침.
확인: 민도윤·민소정과 다른 노출 경로.
미확인: 체내 유입 물질.
미확인: 맥에서 들린 목소리의 의미.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죽는다거나, 변한다거나, 누군가를 해치게 된다는 말은 아직 사실이 아니었다.
문밖에서 차가 멈췄다. 잠시 뒤 태주가 제복 경찰 두 명과 들어왔다. 그는 문 앞의 패치와 해진이 분리해 둔 금속침을 확인하고 감식팀에 연락했다.
“문밖 CCTV는요?”
“경찰이 어제 저장 장치를 가져갔습니다.”
“그걸 알고 오늘 왔다는 뜻이군요.”
태주는 유리문 위쪽을 살폈다. 맞은편 건물의 편의점 카메라가 골목 일부를 비추고 있었다.
“저쪽 영상부터 확보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병원으로 가시죠.”
“민도윤 씨가 간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왜 거깁니까?”
“같은 사건의 노출자들을 본 의사가 있습니다. 비교할 자료도 있고요.”
“구급차 부릅니다.”
해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송되는 동안 맥박은 분당 백을 넘었다가 다시 내려왔다. 살의의 잔향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구급차가 급회전할 때마다 손목 안쪽에서 무언가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느낌이 났다.
응급실 앞에서 서지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로만 대화했던 응급의학과 의사는 해진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다. 밤새 환자를 본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흐리지 않았다. 그녀는 해진의 손바닥 상처와 활력징후 기록을 번갈아 보았다.
“본인이 직접 기록하셨어요?”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보통은 인터넷부터 검색합니다.”
“이름을 모르는 물질은 검색할 수도 없으니까요.”
지안은 대답 대신 장갑을 꼈다. 채혈과 기본 검사가 진행됐다. 경찰이 가져온 금속침은 병원 검사가 아니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민도윤 씨와 민소정 씨는 어떻습니까?”
해진이 묻자 지안은 주변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의식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어젯밤 일을 끊어서 기억해요. 도윤 씨는 한의원에 간 건 기억하는데 회색 정장 남자는 모릅니다. 소정 씨는 창고 안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끌려갔는지 기억하지 못하고요.”
“다른 환자들은요?”
“비슷합니다. 기억이 없는 구간이 서로 달라요.”
지안은 태블릿 화면을 열었다. 환자들의 검사 수치가 이름 대신 번호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한 건 여기입니다. 간 수치, 염증 수치, 신경 반응이 전부 제각각이에요. 같은 물질에 노출된 집단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같아요.”
그녀가 심전도 파형을 확대했다.
“정확히 십칠 분마다 한 번씩, 심박이 정상 범위 안에서 동시에 떨어집니다. 병실도 다르고 투여 중인 약도 다른데요.”
“동시에 말입니까?”
“초 단위까지 같습니다.”
해진은 화면 위에 손가락을 얹지 않은 채 파형을 따라갔다. 각각 다른 속도로 뛰던 심장이 일정한 간격마다 한 박자씩 쉬고 있었다.
맥에는 사람의 삶이 남는다. 나이, 습관, 병, 두려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라 해도 완전히 같은 맥을 갖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열두 사람의 심장에 같은 쉼표를 넣었다.
“마지막으로 동시에 떨어진 시간이 언제죠?”
“육 분 전입니다.”
“다음은 십일 분 뒤군요.”
해진은 자신의 손목을 짚었다.
지안이 물었다.
“뭘 확인하는 겁니까?”
“제가 같은 집단에 들어갔는지요.”
“선생님 심전도는 아직 특이 소견이 없습니다.”
“기계가 놓치는 한 박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안의 표정이 굳었다. 한의사가 현대 장비보다 손을 믿는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해진은 덧붙였다.
“기계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부터 같이 보자는 뜻입니다.”
지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타이머를 켰다.
“좋아요. 십일 분 동안 계속 측정하죠.”
해진은 침대에 누워 모니터를 바라봤다. 초록색 파형이 일정하게 움직였다. 지안은 다른 환자들의 화면도 한쪽에 띄웠다.
삼 분.
손바닥의 냉기가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육 분.
입안에서 희미한 쇠 맛이 났다.
아홉 분.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처치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창고 환자 한 분이 갑자기 난동을 부려요.”
지안이 화면을 보았다.
“아직 이 분 남은 시간이—”
모든 모니터의 숫자가 동시에 흔들렸다.
정확히 십칠 분째였다.
해진의 심장이 한 박자 멎었다.
고통은 없었다. 대신 멎은 자리로 목소리가 들어왔다.
—방해 요소를 제거한다.
복도에서 비명이 들렸다.
해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안이 막기도 전에 처치실을 나섰다. 두 병실 건너에서 환자복 차림의 남자가 간호사의 목을 팔로 감고 있었다. 창고에서 구조된 사람 중 하나였다. 눈은 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가까이 오지 마!”
남자가 소리쳤다.
말과 표정이 맞지 않았다.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지만 얼굴에는 공포만 떠 있었다. 오른손에는 부러진 수액걸이의 금속 막대가 들려 있었다.
보안요원 두 명이 접근하자 남자가 간호사의 목을 더 조였다.
해진은 손을 보이도록 들고 멈췄다.
“이름이 뭡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
“당신에게 묻는 겁니다. 시키는 사람에게 묻는 게 아니고.”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입술은 움직였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막대가 해진을 향했다.
—방해 요소 윤해진을 제거한다.
이번 목소리는 자신의 맥이 아니라 남자의 목 근처에서 들렸다. 같은 문장이었지만 결이 달랐다. 자신의 몸에 들어온 것은 명령을 받는 표식이었고, 남자의 몸에 든 것은 명령을 실행하는 약이었다.
해진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남자의 시선도 따라왔다.
다시 한 걸음.
간호사의 목을 감은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명령은 해진을 향하게 만들었지만, 인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못했다.
“저를 봐요.”
해진이 말했다.
“죽이려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하지만 당신이 죽이고 싶은 건 아닙니다.”
남자의 손이 떨렸다.
“닥쳐…….”
“당신의 살의가 아니니까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겁니다.”
해진은 조금 더 옆으로 움직였다. 남자가 막대를 휘둘렀다. 간호사는 그 순간 몸을 낮춰 팔 아래로 빠져나왔다. 보안요원이 달려들려 했지만 해진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남자는 이제 인질 없이 해진만 보고 있었다.
그가 달려왔다.
해진은 피하지 않고 손목을 잡았다.
맥이 손끝에 닿았다.
검은 승합차 안.
남자의 귀 뒤에 패치를 붙이는 회색 정장.
“십칠 분마다 신호를 주면 돼요. 처음에는 심장만 듣고, 일곱 번째부터는 몸도 듣습니다.”
그리고 운전석 앞에 놓인 작은 송신기. 화면에 떠 있는 열한 개의 초록 점과 하나의 붉은 점.
붉은 점 아래에는 해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진은 손목을 비틀어 막대를 떨어뜨렸다. 동시에 반대 손으로 남자의 팔 안쪽을 눌렀다. 남자의 몸이 크게 떨리더니 무릎을 꿇었다. 지안과 간호사들이 준비해 둔 진정 처치를 시작했다.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해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차…….”
“검은 승합차 말입니까?”
“병원…… 아래.”
해진은 창문으로 달려갔다.
응급실 진입로 건너편에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2화에서 촬영한 것과 번호판은 달랐지만, 뒷문 오른쪽 아래가 찌그러진 모양은 같았다.
차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십칠 분의 다음 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해진은 태주에게 전화를 걸며 계단 쪽으로 달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자신의 맥에서 쇠 긁는 소리가 커졌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승합차는 이미 출구로 움직이고 있었다.
태주가 병원 정문으로 들어오다 무전을 받고 차를 돌렸다. 순찰차가 차단기를 막았지만 승합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차단봉을 부수고 도로로 튀어나갔다.
해진은 차량 뒷유리를 보았다.
회색 정장 남자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남자가 손에 든 기기를 한 번 눌렀다.
해진의 가슴 안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심장이 또 한 박자 멎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소리 대신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청우한의원 진료실.
침대에 누운 외삼촌.
뇌출혈로 쓰러져 재활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을 뜨고 있었다.
외삼촌이 해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한의원, 네가 고른 줄 알았니?”
승합차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해진은 멎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세림바이오가 그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오늘 밤부터가 아니었다.
그가 청우한의원의 문을 다시 열기 전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