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 4

맥에 심은 기억

승합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해진은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이 지하 주차장 입구의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서진 차단봉이 물살에 밀려 조금씩 돌았다. 태주가 순찰차에서 내려 무전으로 도주 방향을 전하는 동안, 해진은 손목을 짚었다. 맥은 다시 뛰고 있었다. 빠르고 단단했다. 방금 한 박자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만 빼면 젊고 건강한 사람의 맥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낯선 감각이 남아 있었다. 재활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오래된 침대의 비닐이 눌리는 소리, 외삼촌의 쉰 목소리. 청우한의원 진료실에서 본 장면인데 냄새는 재활병원의 것이었다. 기억은 장소를 틀리지 않는다. 사람이 틀릴 뿐이다. 중원에서 해진은 열병으로 헛것을 보는 환자를 수없이 만났다. 환영은 대개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얼굴과 장소를 뒤섞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본 외삼촌의 왼쪽 귀 뒤에는 작은 반달 모양 흉터가 있었다. 해진이 알지 못하는 흉터였다. “윤 원장님.” 태주가 그의 앞을 막았다. “쫓아갈 생각이면 접으세요. 교통 카메라에 차종하고 진행 방향 뿌렸습니다.” “외삼촌이 있는 재활병원에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본 게 뭡니까?” 해진은 대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승합차 안의 남자가 기기를 누른 시각. 다음 신호까지 남은 시간은 십육 분 남짓이었다. “먼저 환자들을 지하로 옮겨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 차가 보내는 신호가 전파라면 막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태주는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었지만 지금은 질문보다 시간이 먼저였다. 응급실로 돌아오자 서지안이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진정제를 맞은 남자는 처치실로 옮겨졌고, 목을 졸렸던 간호사는 산소를 공급받고 있었다. 다행히 의식은 또렷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지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차를 놓쳤습니다. 다음 주기까지 십오 분 남았습니다.” “그래서요?” “외부 신호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 병원에서 전파를 가장 강하게 차단하는 곳이 어디죠?” 지안의 시선이 해진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MRI실은 무선주파수 차폐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환자를 검사도 없이 장비 안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몸 안에 금속이 있을 가능성도 있고요.” “장비 안이 아니라 차폐실이면 됩니다.” “환자 전부를 옮기는 동안 상태가 나빠지면요?” “그래서 한 명만 옮겨야 합니다. 나머지와 비교할 수 있도록.” 지안은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모니터에 저장된 파형을 불러낸 뒤 시간을 계산했다. “이건 치료가 아니라 확인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치료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대조군은 누가 맡죠?” 해진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제가 밖에 있겠습니다.” 세 사람은 가장 상태가 안정적인 민소정을 영상의학과로 옮겼다. 검사실 책임자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경찰이 관련된 집단 약물 노출 사건이며 환자들의 심박이 같은 시각에 떨어진다는 지안의 설명을 듣고 차폐실 사용을 허락했다. 금속 탐지기로 소정의 몸을 먼저 확인했다. 경고음은 울리지 않았다. 피부 아래에 남은 것이 기계가 잡아낼 만큼 크지 않거나, 금속이 아닌 물질이라는 뜻이었다. 소정은 이동식 심전도 장치를 단 채 차폐실 안에 누웠다. 유선으로 연결한 화면은 바깥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해진과 나머지 환자들은 차폐실 밖에 있었다. 남은 시간은 사 분. 해진은 환자들의 파형 대신 얼굴을 보았다. 아직 잠든 사람, 눈을 뜨고도 천장만 바라보는 사람, 자기 손이 묶여 있는지 계속 확인하는 사람. 서로 아무 관계도 없던 이들의 몸 안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두 분. 태주에게 전화가 왔다. “외삼촌 병원에 직원 보냈습니다. 병실 확인 중입니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윤 원장님. 그 전에 대답해요. 외삼촌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도 아직 모릅니다.” 해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만 제가 모르는 외삼촌의 상처를 봤습니다.” 통화 너머가 잠잠해졌다. “어디에서요?” “제 맥 안에서요.” 태주는 이번에도 그 말을 농담으로 넘기지 않았다. “확인하고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십 초. 지안이 모든 화면의 시간을 맞췄다. 초록색 선들이 서로 다른 높이로 오르내렸다. 세 초. 해진의 손목 안에서 쇠를 긁는 소리가 시작됐다. 한 초. 심장이 멎었다. 차폐실 밖에 있는 환자들의 파형이 일제히 아래로 꺼졌다. 누군가 동시에 선을 잡아당긴 듯 정확히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민소정의 심장은 계속 뛰었다. 차폐실 안의 초록 선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봉우리를 그렸다. 지안이 화면을 확대했다. 한 번 보고도 믿지 못해 이전 기록과 겹쳤다. “외부 신호가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적어도 차폐할 수 있는 종류예요.” 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멎은 맥 사이로 또 다른 장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낮은 천장. 창문 없는 방. 외삼촌이 침대에 앉아 셔츠 단추를 풀었다. 왼쪽 귀 뒤에 반달 모양의 흉터가 드러났다. 회색 정장 남자가 그 흉터 위에 투명한 패치를 붙였다. “이번에는 조카가 볼 수 있을까요?” 남자의 질문에 외삼촌이 고개를 들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놈은 맥에 남은 걸 듣지.” 장면이 끊겼다. 해진은 차가운 벽에 손을 짚었다.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었다. 신호는 명령만 보내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에 남은 감각과 기억까지 잘라서 실어 보낼 수 있었다. 미래를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미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감각이 맥을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다만 신호를 보내는 자가 그 조각의 앞뒤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외삼촌은 해진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현대로 돌아온 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능력이었다. 맥을 짚고 살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첫 환자인 민도윤을 만나기 전까지 해진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외삼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주였다. “재활병원에 외삼촌이 없습니다.” 해진은 벽에서 손을 뗐다. “언제 나갔습니까?” “십칠 일 전입니다. 보호자 요청으로 다른 병원에 전원됐답니다.” “보호자는 접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서류에는 윤 원장님 서명이 있어요.” 해진은 청우한의원 임대 계약을 하던 날을 떠올렸다. 외삼촌의 병원비와 한의원 보증금을 처리하느라 여러 장의 서류에 서명했다. 하나하나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서명란만 따로 떼어 쓰였다면 알아챌 수 없었다. “옮겨 간 병원은 어디입니까?” “청우통합의학연구원. 그런데 등록된 의료기관이 아닙니다. 주소도 청우한의원하고 같아요.” 해진의 시선이 굳었다. 조금 전 본 장면은 과거의 기억이 아닐 수 있었다. 외삼촌은 지금 청우한의원에 있을지도 몰랐다. “갑시다.” 해진이 몸을 돌리자 지안이 팔을 잡았다. “어디를요? 지금 선생님도 환자예요.” “제 한의원에 외삼촌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방금 들었습니다.” 지안은 해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 확인한 게 뭔지는 압니다. 차폐실에서는 신호가 막혔어요. 그러면 다음 주기가 오기 전에 다른 환자도 이쪽으로 옮겨야 해요. 선생님도요.” “저까지 들어가면 저들이 무엇을 보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심장을 멈춰 가면서 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그 사람에 선생님은 빠져 있습니까?” 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중원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독곡에서 백 명을 살리고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을 때, 약동의 어린 의원이 울면서 물었다. 의선의 목숨은 환자의 목숨이 아니냐고. 그때도 답하지 못했다. 지안이 손을 놓았다. “가려면 조건이 있어요. 다음 신호 전에 돌아오거나, 차폐할 방법을 가지고 가요. 그리고 혼자 가지 마세요.” “경찰과 함께 가겠습니다.” “한 가지 더요.” 그녀가 작은 휴대용 심전도 기록기를 내밀었다. “느낀 것 말고 기록을 가져와요. 그래야 다음에는 막을 수 있으니까.” 해진은 기록기를 가슴에 붙였다. 태주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형사 두 명과 순찰차 한 대가 함께였다. 그는 해진에게 방탄조끼를 건넸다. “안에서 시키는 대로 하세요. 먼저 들어가지 말고, 보이는 것에 손대지 말고.” “환자가 있으면 맥은 짚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차량 두 대가 청우한의원으로 향했다. 새벽이 끝나 가고 있었다. 비는 약해졌지만 도로에는 아직 물이 고여 있었다. 해진은 뒷좌석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신호까지 아홉 분. 한의원 골목에 들어서자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맞은편 편의점의 간판만 젖은 유리문에 푸르게 반사됐다. 유리문은 잠겨 있었다. 해진이 열쇠를 꺼내려는 순간 태주가 막았다. 경찰이 먼저 건물 뒤편과 계단을 확인했다. 침입 흔적은 없었다. 안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문 엽니다.” 태주의 신호에 해진이 열쇠를 돌렸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해진이 떠날 때보다 강했다. 누군가 바닥과 진료 침대를 닦은 냄새였다. 진료실 불을 켜자 흰 시트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외삼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들이 치료실과 탕전실, 화장실을 차례로 확인했다.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천장 점검구에도 흔적이 없었다. 해진은 진료 침대 옆에 섰다. 조금 전 장면에서 외삼촌이 누워 있던 자리였다. 시트에는 주름 하나 없었지만, 침대 아래 바닥에 투명한 수액관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장갑을 낀 뒤 수액관을 들어 올렸다. 끝부분에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놓으세요. 감식 부르겠습니다.” 태주가 말했지만 해진은 피를 보고 있었다. 검붉은 피 속에 아주 가느다란 회색 실이 떠 있었다.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온 금속침과 같은 빛이었다. 그때 진료실 전화기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외부에서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 액정에는 ‘내선 02’라고 떠 있었다. 청우한의원에는 내선이 없었다. 태주가 통화 녹음을 켠 뒤 수화기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진에게 건넸다. “여보세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외삼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진아.” 해진은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 계십니까?” “침대 밑을 봐라.” 태주가 손짓하자 경찰 한 명이 진료 침대를 옆으로 밀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장판 한가운데에 침구멍만 한 검은 점이 보였다. 해진이 무릎을 꿇었다. 검은 점에 손끝을 대자 미세한 바람이 올라왔다.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이 있었다. “외삼촌.”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기침이 들렸다. “그놈들이 네게 보여 주는 건 내 기억이 아니다.” 다음 신호까지 일 분. “그럼 무엇입니까?” “네가 보길 바라는 기억이지.” 통화가 끊겼다. 동시에 침대 아래의 검은 점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장판 밑으로 사각형의 선이 생겼다. 숨겨진 문이었다. 태주가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총을 꺼냈다. 해진은 자신의 손목을 짚었다. 쇠 긁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 십칠 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맥 아래에서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문 아래에서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진아, 열지 마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와 달랐다. 이번 목소리는 바로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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