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21

목요일

월요일에 세림이 늦었다. 열 시에 오는 사람인데 열한 시 반에 왔다. 들어와서 앞치마를 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버스가 안 왔어." "응." "두 대 그냥 갔어."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을 뻔했다. 받아 적는 건 손님한테 하는 일이다. 세림은 손님이 아니다. --- 화요일에도 늦었다. 이번에는 열두 시가 넘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안 했다. 대신 봉투 재고를 세었다. 세면서 소리를 안 냈다. 세림은 늘 소리를 내어 셌다. 흰색 큰 거 스물넷. 흰색 작은 거 서른둘. 그 소리가 가게 안쪽에서 들리면 나는 카운터에서 그게 몇 번째 줄인지 알았다. 화요일에는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했다. 말하려면 왜 소리를 안 내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그건 소리를 내라는 말처럼 들린다. --- 나는 안 물었다. 물으면 세림이 설명하게 된다. 설명하려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뺄지 골라야 하고, 고르는 동안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감추는지 스스로 알게 된다. 그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화요일 오후 세 시였다. --- 수요일에 세림은 열 시에 나갔다. 수요일에는 원래 나간다. 가게를 연 첫해부터 그랬고 나는 어디 가느냐고 물은 적이 한 번 있다. 삼 년쯤 전이었고 세림은 "볼일" 하고 말았다. 그 뒤로 안 물었다. 이번 수요일에는 옷을 안 차려입었다. 늘 회색 코트에 목도리를 하고 가방을 두 번 바꾸는데, 이번에는 앞치마만 벗고 나갔다. --- 수요일에 손님이 셋 왔다. 첫째는 감사 카드였다. 병원에 두 달 있었고 간병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항목이 넷이었고 나는 여섯 줄로 만들었다. 넷을 여섯으로 늘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인사말 두 줄을 앞뒤로 붙이면 된다. 손님은 그 두 줄을 제일 좋아했다. 둘째는 아이 이름을 봉투에 써 달라는 사람이었다. 돌잔치 답례였고 봉투가 스무 장이었다. 같은 이름을 스무 번 쓰는 일이라 손이 알아서 한다. 열두 번째에서 손이 멈췄다. 멈춘 이유는 없었다. 글자를 틀린 것도 아니고 손이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멈췄고, 삼 초쯤 있다가 다시 썼다. 셋째가 오래 걸렸다. --- 쉰쯤 된 여자였다. 앉아서 십 분쯤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건 이 일의 절반이다. "딸한테 쓸 건데요." "네." "…….." "뭐라고 쓸지 모르겠어요." --- "항목만 주십시오." "항목이요?" "하고 싶은 말을 낱개로요. 문장이 아니어도 됩니다." 여자가 손가락을 접었다. "미안하다. 그런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운 건 안다." "셋이요." "셋이요." --- 나는 적었다. 미안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걸 안다. 여자가 나를 봤다. "무슨 일인지 안 물으시네요." "안 묻습니다." "…….." "왜요." --- 나는 늘 하던 대답을 했다. "물으면 손님이 설명하게 됩니다." "…….." "설명하면 말이 정리되고, 정리된 말은 편지에 안 어울립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편한 방식이네요." ---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여자는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얼굴이 그랬다. 칭찬에 가까운 얼굴이었고, 칭찬으로 들으면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손이 펜을 놓고 있었다. "누구한테 편해요?" 내가 물었다. 여자가 잠깐 생각했다. "둘 다한테요." --- 여자가 나가고 나서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물으면 상대가 설명하게 되니까 안 묻는다. 그 문장을 몇 번 말했는지 모른다. 손님이 물을 때마다 했고, 물어보지 않아도 한 적이 있다. 그 문장에는 뒤가 없다. 안 물으면 나는 아무것도 안 들어도 된다. 항목 세 개만 받으면 되고, 세 개로 여섯 줄을 만들면 값을 받는다. 편하다. 일요일에 엄마가 나한테 한 말이 그것과 닮아 있었다. 대신 써 주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그건 네가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도 대신 쓴 게 되잖아, 하고. 대신 쓰는 것과 안 묻는 것은 다른 일인 줄 알았다. 오늘 보니 같은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둘 다 상대가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게 한다. --- 목요일에 세림이 안 왔다. 여덟 시 오십 분에 가게 문을 열고 나는 안쪽을 봤다. 세림은 열 시에 오는 사람이라 그 시각에 없는 게 이상하지 않은데도 봤다. 아홉 시 반에 문자가 왔다. `오늘 못 나가요.` `응.` `죄송해요.` 나는 답을 쓰다가 지웠다. 두 번 썼다가 두 번 지웠다. `쉬어.` --- 혼자 가게를 열었다. 봉투 진열을 정리하고 카운터를 닦고 재고를 셌다. 세면서 소리를 냈다. 흰색 큰 거 스물넷. 흰색 작은 거 서른둘. 크라프트 열아홉. --- 파란 줄에서 손이 멈췄다. 칸이 비어 있었다. --- 나는 상자를 열었다. 없었다. 상자 안에 흰 봉투가 두 묶음 있었고 그 사이에 파란 줄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자리는 그대로였다. 옆의 흰 묶음이 안 무너져 있었다.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빼낸 사람이 손으로 받치고 뺐다는 뜻이다. 급하게 뺀 게 아니다. 서랍 옆 칸도 열었다. 클립으로 묶어 둔 사본 뭉치가 있고 그 옆이 비어 있었다. 파란 줄 봉투를 그 자리에 옮겨 둔 게 이 주 전이다. 서른여섯 장이 통째로 없었다. --- 나는 창고를 봤다. 세림이 상자를 옮기는 걸 봤다. 보름쯤 전에도 봤고 지난주에도 봤다. 옮기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그게 정리라고 생각했다. 창고에 파란 줄이 없었다. 발주 철을 폈다. 지난달 발주에 파란 줄 서른여섯이 있다. 들어온 것도 서른여섯이다. 나간 기록이 없다. --- 나는 카운터에 앉았다. 파란 줄 봉투는 잘 안 나간다. 요새 사람들은 흰 봉투를 쓴다. 파란 줄은 옛날 문구점에서 묶음으로 팔던 것이고, 지금 파는 데는 우리 말고 두 군데쯤이다. 십 년 전에 어머니 집 서랍 두 번째 칸에 있던 것이 그것이다. 세림이 문 밑에서 받은 봉투도 그것일 것이다. --- 나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지 않았다. 밀면 다음이 나온다. 다음은 세림이 왜 지금 서른여섯 장을 가져갔느냐다. 여덟 해 동안 안 가져가다가 이 주 사이에 가져갔다. 이 주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가 한 일뿐이다. 다음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오늘 확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발주 용지를 꺼냈다. 파란 줄 서른여섯이라고 적었다. --- 적고 나서 그 종이를 봤다. 내 글씨였다. 아라비아 숫자로 36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매상이 보는 서류라 그렇게 적는다. 한글로 다시 적어 봤다. `삼십육` --- 내 글씨였다. 세림의 것과 안 닮았다. 삼 자의 첫 획이 나는 위에서 시작하고 세림은 아래에서 올린다. 그건 두 주 전에 확인했다. 확인했는데 대조는 못 했다. 편지에 한글 숫자가 없었으니까. --- 여섯 시에 문을 닫았다. 목요일은 여덟 시까지 여는 날인데 두 시간 일찍 닫았다. 세림이 없으면 저녁 손님을 혼자 받아야 하고, 혼자 받을 수 있는데도 닫았다. 닫기 전에 서랍을 한 번 더 열었다. 십 년 전 편지가 거기 있었다. 어제 넣어 뒀다. 파란 줄 봉투에 넣어 두려다가 봉투가 없어서 그냥 넣었다. --- 불을 껐다. 문을 잠그고 골목으로 나왔다. 세림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안 걸었다. 걸어서 뭐라고 할지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하고 걸면 그건 대필이 된다. 정하지 않고 걸면 물어보게 된다. ---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정류장에 사람이 넷 있었다. 셋은 앉아 있었고 하나는 서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나는 그 손목을 봤다. 가죽 줄이 아니었다. 버스가 두 대 지나갔다. 두 번째가 지나갈 때 앉아 있던 사람 하나가 일어섰다가 도로 앉았다. 자기가 탈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세 번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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