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결석한 날
토요일에 가게를 안 열었다.
두 번째다. 지난번은 어머니한테 갔고 이번에는 집에 있었다.
붙박이장 위에 상자가 셋 있다. 이사할 때마다 열어 보지 않고 옮긴 것들이다. 스물다섯에 나와서 서른둘까지 세 번 이사했고 세 번 다 옮기기만 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 셋 다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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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상자에 옷이 있었다.
둘째에 책이 있었다. 대학 교재가 대부분이고 그 사이에 노트가 여섯 권 끼어 있었다.
셋째에 사진이 있었다. 그 아래에 서류 봉투가 둘 있었다.
나는 둘째부터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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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한 권씩 폈다.
내 글씨였다.
십 년 전 내 글씨를 보는 건 오랜만이다. 지금보다 획이 컸고 받침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자음 하나에 획을 두 번 그은 데도 있다. 지금은 한 번에 긋는다.
같은 사람 글씨인데 안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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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한참 봤다.
십 년이면 필적이 변한다. 손님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옛날 편지를 들고 와서 같은 사람이 쓴 게 맞느냐고 물으면, 나는 십 년 차이면 판단이 어렵다고 말한다.
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손이 굳고, 쓰는 도구가 바뀌고, 빨리 쓸 일이 많아진다. 대학 노트는 받아 적는 것이라 크게 쓰고, 카운터에서 봉투 겉면을 쓰는 일은 칸이 좁아서 작게 쓴다.
내가 작게 쓰게 된 건 이 일을 하고 나서다.
말하면서 내 것으로는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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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의 글씨도 변했을 것이다.
지금 세림은 삼 자의 첫 획을 아래에서 위로 올린다. 두 주 전에 발주서를 받아서 확인했다.
십 년 전에도 그랬는지는 모른다.
모르는데 나는 그동안 대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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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여섯 권을 다 넘겼다.
넷째 권 가운데쯤에서 손이 멈췄다.
글씨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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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쪽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획이 작고 촘촘했고 줄 간격이 일정했다. 받침이 안 늘어졌다.
세림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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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를 봤다.
십일월 열이렛날.
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나는 건 그 학기에 내가 결석을 많이 했다는 것이고, 결석한 날은 세림이 필기를 대신 해 줬다는 것이다.
두 쪽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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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두 쪽을 읽었다.
무슨 수업인지 지금은 모르겠다. 사람 이름과 연도가 나오는 걸 보면 역사 쪽이었던 것 같다.
세림은 교수가 한 말을 그대로 적지 않았다.
줄여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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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기 기록은 대부분 나중에 정리된 것`
`— 정리한 사람이 누구냐가 내용을 정한다`
`— 그래서 원본이 없으면 정리본이 원본이 된다`
세 줄이었다.
한 시간 반 수업을 세 줄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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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세 줄을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줄에서 손끝이 멈췄다.
원본이 없으면 정리본이 원본이 된다.
스무 살 세림이 수업에서 적은 말이고, 스물두 살 어머니가 딸에게 한 일이고, 서른둘 내가 손님들에게 해 주는 일이다.
세 개가 같은 문장 아래 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 봤다.
세림은 필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하는 사람은 다 적는다. 세림은 골라서 적었고, 고르려면 무엇이 중요한지 정해야 한다.
정하는 건 대신 해 주는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세림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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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이걸 받아서 읽었을 것이다.
읽고 시험을 봤을 것이다. 세 줄로 시험을 볼 수 있었으면 세림이 잘 고른 것이다.
그 학기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건 기억난다.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것은 세림이 노트를 돌려주면서 뭐라고 했다는 것뿐인데 그 말도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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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쪽 아래 여백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작게 적혀 있었다. 수업 내용이 아니었다.
`너 오늘 안 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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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였다.
물음표도 없고 마침표도 없었다.
나는 그 여섯 자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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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뒤에 세림은 어머니한테 넉 자를 썼다.
`언제까지요`
그것도 물음표가 없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기억 안 난다고 했지 없었다고 하진 않았는데, 있었으면 있었다고 했을 것이다.
두 문장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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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다는 것을 필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보는 건 십 년 전 글씨고, 어머니가 받은 건 없어졌다. 봉투만 남았고 봉투에는 글자가 없다.
대조할 것이 없다.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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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트를 덮었다.
덮고 나서 다시 폈다. 폈다가 또 덮었다. 세 번째에는 편 채로 뒀다.
`너 오늘 안 왔더라`
세림은 이 줄을 여백에 적었다. 본문이 아니라 여백이다. 여백에 적으면 안 읽어도 그만이다.
읽으라고 적은 게 아니라 적고 싶어서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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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상자를 열었다.
사진이 있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것이고 대부분 여럿이 찍은 것이다.
세림이 나온 게 넷 있었다.
넷 다 내 옆에 서 있었다. 어깨가 닿은 것도 있고 한 사람 건너 선 것도 있는데, 넷 다 나를 기준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세어 보고 나서 사진을 도로 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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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봉투 둘을 꺼냈다.
둘 다 겉면이 비어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안 적어 두는 버릇이 나에게도 있다.
하나에 졸업장이 들어 있었다.
다른 하나에 전세 계약서가 있었다. 스물다섯에 처음 얻은 방이고 보증금이 이천이었다.
날짜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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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십일월이었다.
내가 그 집을 나온 게 스물다섯 십일월이다.
세림이 나간 건 스물둘 이월이고, 나는 그 뒤로 삼 년을 더 그 집에 살았다.
세 해를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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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면 충분히 봤다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맞았다.
어머니가 세림을 두고 세 해쯤이라고 어림잡았다고 했다. 세림은 두 해 살았고 어머니가 잘못 셌다고.
그런데 내가 그 집에서 세림이 나간 뒤로 산 것이 정확히 세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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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약서를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
종이가 오래돼서 접힌 자리가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펴려다 더 갈라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우연일 수 있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어머니는 두 통을 나흘에 걸쳐 썼고, 두 통에 들어갈 문장을 섞었다. 섞은 것이 일곱째 줄만이라는 보장이 없다.
다섯째 줄도 섞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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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삼 년은 세림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 된다.
내가 그 집에서 세림 없이 산 세 해.
편지에 적힌 것은 이재와 나의 사 년이 아니라 다른 셈이었다는 말이 된다.
나는 그 생각을 밀었다가 도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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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지 않은 이유는 오늘 밀 데가 없어서다.
지난 두 주 동안 나는 생각을 밀 때마다 세림에게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어볼 사람이 옆에 있으면 생각을 끝까지 안 밀어도 된다.
세림이 사흘째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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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상자에 안 넣었다.
넷째 권만 빼서 가방에 넣었다. 나머지 다섯 권과 옷과 사진은 상자에 도로 담아 붙박이장 위에 올렸다.
셋을 다 올리는 데 십 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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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가게에 갔다.
가려고 나선 게 아니라 걷다가 그쪽으로 갔다. 집에서 가게까지 버스로 스물두 정거장인데 오늘은 걸었다. 한 시간 사십 분 걸렸다.
토요일 저녁이라 골목에 사람이 없었다. 불을 켜지 않고 카운터에 앉았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넷째 권 가운데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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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빛이 유리문으로 들어와서 글자가 읽혔다.
`너 오늘 안 왔더라`
나는 서랍을 열었다.
발주 용지가 있었다. 어제 적은 것이고 파란 줄 일흔둘이 적혀 있다.
아직 안 보냈다. 토요일에는 도매상이 안 받는다는 게 이유인데, 금요일 저녁에 넣어 두면 월요일에 나간다.
금요일 저녁에 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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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용지를 꺼냈다.
`추가 서른여섯`이라고 적은 줄을 봤다.
지울까 하다가 안 지웠다.
대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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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 나서 그 넉 자를 봤다.
발주 용지에 적을 말이 아니다. 도매상이 보면 뭘까 할 것이다.
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접은 자리가 세 군데였다. 삼단으로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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