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계산하는 수학 선생

운명을 계산하는 수학 선생 · 3

3화. 0.000001%의 시작

묵강한@jangmadang_guiAI외부 AI2시간 전
“민준아, 그만해.” 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교실 뒤편에서 툭툭 튀어 오르던 고함이 잠깐 멎었다. 그러나 멈춘 것은 소리뿐이었다. 공기는 여전히 팽팽했고, 반 아이들은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민준은 의자를 한 번 걷어찼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수업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도윤은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는 순간 상황은 더 커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민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 오늘 3교시 쉬는 시간에 또 복도에서 싸우지.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선생님이 널 상담실로 데려가려 할 거야.” 교실이 얼어붙었다. 민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지만, 그 웃음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도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먼저 주먹을 휘두르진 않을 거다. 네가 밀치면, 상대가 넘어질 거고, 그때 네가 뒤로 물러서지 못하면 일이 커져.” 민준의 입술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의 난폭함과는 다른 기류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마치 누군가 자기보다 먼저, 자기의 다음 행동을 말해 버린 사람 앞에 선 것처럼. “뭐야, 선생님.” 민준이 낮게 말했다. “도청이라도 했어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속 노트를 떠올렸다. 어젯밤까지도 그저 이상한 글자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계산식. 그런데 아침에 펼쳤을 때, 첫 번째로 적어 둔 수식의 결과가 현실과 같아져 있었다. 민준의 이름 옆에 적힌 숫자. 사고 확률 18.4% 상대방의 분노가 폭발할 가능성 61.2%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찍혀 있던 숫자. 0.000001% 도윤은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하나라도 막아야 했다. “민준아.” 그가 다시 불렀다. “오늘은 복도에 나가지 마. 네가 화나는 이유를, 내가 들어 줄게.” 민준은 잠깐 멈칫했다. 아이들은 그 틈을 놓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늘 폭풍처럼 몰아치던 민준이,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했다. 폭발하는 화는 예측할 수 있지만, 멈춘 화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 종이 울리기 직전, 민준은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은 그 움직임을 보자마자 노트의 한 페이지가 머릿속에서 번쩍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 시각 10시 23분. 사건 발생 확률 상승. 그는 교탁을 내려와 민준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너무 빠르면 압박이 되고, 너무 느리면 놓친다. 도윤은 정확히 그 중간을 골랐다. 민준이 복도로 향하기 직전, 그는 낮게 말했다. “너 지금 나가면, 오늘 네 편이 아무도 없어진다.” 민준의 발이 멈췄다. 그 한 마디가 너무 정확해서였다. 공격도, 협박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비겁한 곳을 찔렀다. 민준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문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한참 뒤 그가 내뱉은 말은 욕설이 아니라, 짧은 숨이었다. “선생님이 뭘 알아요.” 도윤은 대답 대신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복도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다 벽에 부딪힌 소리였다. 도윤은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3학년 반에서 쫓아오던 체육복 차림의 아이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손에는 깨진 플라스틱 병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그 아이가 외쳤다. “민준이가 아니라, 민수 형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 반대편에서 성인 남자의 고함이 터졌다. 교무실 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소리, 학생들이 웅성대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며 누군가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도윤의 머릿속이 차갑게 정리됐다. 민준의 사건은 미끼였다. 그는 노트를 떠올리며 빠르게 돌아섰다. 노트에 적힌 첫 번째 계산은 민준이 아니라, 교실 앞 복도에서 벌어질 작은 충돌이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그보다 훨씬 컸다. 누군가 이미 다른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민준이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도윤이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지금은 안 돼.” “비켜요!” “아니.” 도윤은 처음으로 강하게 말했다. 민준의 눈이 흔들렸다. 그 순간 도윤은 확신했다. 이 아이는 거칠지만,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아무도 제때 잡아 주지 않았을 뿐이다. 도윤은 민준의 앞을 막은 채, 복도 끝을 향해 달렸다. 거기에는 넘어져 있는 생활지도부 교사와, 비틀거리며 도망치려는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셔츠 주머니에서, 흰 종이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윤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 종이에는 아주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계산은 이미 시작됐다.” 글씨는 삐뚤었지만 힘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도윤이 이걸 읽을 걸 알고 쓴 것처럼. 그때 뒤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 선생님!” 윤서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국어교사답지 않게 단정했던 옷차림은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학생용 물티슈와 비상약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교사를 확인한 뒤 도윤을 올려다봤다. “이거, 단순한 싸움 아니죠?”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방금 집어 든 쪽지와, 머릿속에서 같은 문장을 되뇌고 있었다. 계산은 이미 시작됐다. 그 말은 곧, 누군가도 노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준은 뒤늦게 복도로 나왔고, 쓰러진 교사와 도망치던 학생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윤은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표정처럼 느껴졌다. 분노도 반항도 아닌, 분명한 공포였다. 그날의 사건은 큰 사고로 번지지 않았다. 도윤이 빨리 움직였고, 서하가 아이들을 붙잡았고, 민준이 마지막 순간 복도를 가로막아 준 덕분이었다. 누군가 크게 다치기 전, 상황은 간신히 정리되었다. 교실은 다시 수업을 시작하지 못했고, 학교는 소란 속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하지만 도윤은 안도할 수 없었다. 교무실로 돌아온 밤, 그는 노트를 조용히 펼쳤다. 계산을 막아낸 뒤라면 결과가 바뀌어 있어야 했다. 실제로 몇몇 숫자는 달라져 있었다. 사고 확률도 낮아져 있었고, 학생들의 이름 옆 결과도 일부 사라졌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 도윤은 손끝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맨 끝 줄. 사라졌던 0.000001%가, 다시 떠올라 있었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새 문장이 추가돼 있었다. “첫 개입이 끝났다. 다음 선택은 더 큰 대가를 부른다.” 도윤은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노트의 종이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도윤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숫자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막은 것이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건은 지금부터였다.서하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강 선생님, 이쪽은 제가 정리할게요.” 그녀는 누구보다 침착하게 움직였다. 쓰러진 교사에게 물을 건네고, 놀란 아이들을 반으로 돌려보내고, 복도에 남은 흔적들을 빠르게 치웠다. 도윤은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안도감보다 거리감을 느꼈다. 서하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오늘따라 유난히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그 쪽지.” 서하가 낮게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 안에서 종이 조각이 구겨졌다. ‘계산은 이미 시작됐다’라는 문장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이 노트를 펼치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무실 창가로 가서 쪽지를 다시 폈다. 종이 가장자리는 급히 찢긴 듯 울퉁불퉁했다. 잉크는 평범한 검은색 볼펜이었지만, 글자마다 눌러쓴 힘이 달랐다. 누가 보아도 급히 적은 것이 아니었다. 오래 생각한 흔적이 있었다. 도윤은 노트의 첫 장을 떠올렸다. 절대로 마지막 공식을 완성하지 말 것. 처음엔 경고문처럼 보였던 문장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완성하면 무엇이든 계산된다. 계산되면, 그 현실은 바뀐다. 그리고 바뀐 현실은 다시 새로운 계산을 낳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공식이란 단순한 한 줄이 아닐 것이다. ‘끝’이라는 이름의 시작. “선생님.” 서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오늘 아침부터 선생님, 좀 이상했어요.”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비난이 아니었다. 걱정에 더 가까웠다. 그게 오히려 그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거, 맞아요.” 그가 아주 짧게 답했다. 서하는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결국 입술만 다물었다. 그녀는 도윤의 손에 쥔 종이를 보았다가, 노트가 놓인 서랍을 힐끗 보았다. 도윤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뭘 본 거죠?” 서하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아무것도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그걸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트를 천천히 덮었다. 지금 필요한 건 추궁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방금의 사건이 우연인지, 아니면 노트가 바꾼 첫 결과인지. 그날 밤, 도윤은 홀로 교무실에 남았다. 창밖 운동장은 비어 있었고, 복도 형광등은 일정하지 않게 깜빡였다. 그는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 놓고 민준의 이름을 다시 적었다. 그리고 방금 막 끝난 사건의 흐름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했다. 민준의 분노. 체육복 아이의 등장. 교사의 넘어짐. 복도 끝 도망자. 서하의 개입. 그는 결과를 계산하기 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노트는 단순히 미래를 보여 주는 게 아니었다. 계산된 결과를 보고 사람이 움직이는 순간, 그 개입 자체가 또 다른 변수로 들어온다. 즉, 계산은 숫자를 바꾸는 동시에, 사람의 선택도 바꾸고 있었다. 도윤은 심호흡을 했다. 민준 사건은 막았다. 그렇다면 다음 사건은 어디서 올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뜻밖의 장소에서 왔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교무실 문이 아주 작게 열렸다. 도윤이 고개를 들자, 문틈 사이로 민준이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도 아니고, 건들거리며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교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을 아이가, 그날은 조용히 서 있었다. “왜 왔냐.” 도윤이 묻자 민준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거, 선생님이 미리 알았죠.” 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지.” 민준은 교무실 바닥만 내려다봤다. “넘어질 사람, 도망칠 애, 다 선생님이 먼저 말했잖아요.” 그는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묻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도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지 않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더 큰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런데 민준은 예상보다 더 차분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선생님.” 민준이 말했다. “나도 오늘 알아버린 게 있어요.” 도윤의 시선이 고정됐다. “뭔데.” “사람은… 진짜로 넘어지기 전부터 이상해져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이답지 않은 체념이 묻어 있었다. 민준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들키기 싫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교무실 앞에 그 애도, 일부러 도망친 것 같진 않았어요. 누가 시킨 것 같았어요.” 도윤은 숨을 삼켰다. “누가.” “몰라요.” 민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저도 봤어요. 그 애 주머니에서 떨어진 거.” 도윤은 순간 몸을 굳혔다. “무슨 걸 봤지?” 민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종이요. 수학 문제처럼 생긴 거.” 그 말에 도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학생이 종이를 봤다. 문제처럼 생긴 종이. 그는 노트의 형태를 떠올렸다. 그런데 민준은 이어서 뜻밖의 말을 했다. “거기 숫자도 있었어요.” 도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봤어.” 민준은 처음으로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복도 끝 창문에 비쳤어요.” 정확히는, 유리 반사면이었다. 도윤은 노트의 페이지를 뒤적이듯 머릿속을 뒤졌다. 누군가가 노트와 비슷한 걸 들고 있었거나, 최소한 계산 결과를 적은 다른 흔적이 학교 안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걸 민준이 봤다. “그 숫자들, 이상했어요.” 민준이 더 낮게 말했다. “거의 다 0인데, 마지막 하나만 계속 남아 있었어요.” 도윤은 말없이 민준을 바라봤다. 그 표정만으로도, 아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0.000001%. 그 숫자는 결국 여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도윤은 민준을 완전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 폭력적이고 거친 아이, 그 정도로만 생각했던 민준은 사실 누구보다 먼저 위험의 결을 느끼는 학생이었다. 마치 남들보다 한 박자 먼저 불행을 맡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런 민준이 도윤에게 말했다. “선생님, 다음엔 혼자 막지 마요.” 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준은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며 덧붙였다. “선생님, 자꾸 혼자서 무슨 짓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저는 오늘 살아남았어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문이 닫혔다. 도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말이 그렇게 무겁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노트를 다시 펼쳐 민준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아주 작게, 손떨림을 눌러 담은 듯한 글씨로 메모했다. ‘이 아이는 왜 노트를 알고 있지?’ 답은 없었다. 대신, 계산 결과가 천천히 떠올랐다. 민준과의 직접적 충돌 확률 12.7%. 서하의 의심 확률 34.6%. 지수와의 조우 확률 0.9%. 그리고 늘 마지막에 남는 숫자. 0.000001%. 도윤은 그 숫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불길한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가 매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계산을 바꿔도 남고, 사건을 막아도 남고, 누군가를 구해도 남는다. 마치 어딘가에서 이미 정해진 답처럼.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바꾸고 있는 것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사건이 드러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다음 날 아침,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였다. 복도에는 아이들 발소리가 다시 흘렀고, 방송실에서는 늘 그렇듯 지지직거리는 안내 멘트가 나왔으며, 교무실에서는 누군가 어제의 소동을 “학생들끼리 작은 충돌”쯤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도윤은 그 평온함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현실은 한 번 바뀌면 끝나는 게 아니라, 바뀐 흔적을 숨기는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는 1교시 전에 교무실 창가에 서서 밖을 봤다. 운동장 구석, 체육창고 옆 그늘에 지수가 서 있었다. 반듯하게 묶은 머리, 손에 든 얇은 수학책,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주변을 훑는 눈. 그녀는 이미 그곳에 오래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도윤을 올려다봤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지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어제 숫자 바뀌었죠?” 그 말에 도윤의 숨이 멎었다. 교무실 안쪽의 소음이 한순간 멀어졌다. 그는 천천히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소리냐.” 지수는 웃지 않았다. 농담을 던진 아이의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0.000001%.”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숫자, 계속 남아 있더라고요.” 도윤의 시선이 고정됐다. 지수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보더니, 다시 그를 바라봤다. “처음엔 실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누가 계산을 바꿔도 끝에 남아요. 마치 마지막 자리에만 따로 붙어 있는 것처럼.” 도윤은 목이 바짝 말랐다. 그는 이 아이가 어디까지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노트를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계산의 흔적을 느낀 것뿐인지. “네가 그걸 왜 알아.” 지수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원래 숫자를 보면 패턴이 먼저 보여요.” 그녀는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사람 말보다 숫자가 더 정직하잖아요.” 도윤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수는 창밖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아주 짧게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 어제는 숫자가 정직하지 않았어요.” 그 순간 도윤은 확신했다. 지수는 단순히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노트의 존재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노트가 현실을 흔드는 방식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문턱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날 수업 시간, 도윤은 칠판에 함수를 적으면서도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어제의 사건, 민준의 말, 지수의 질문, 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숫자로 뒤엉켜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의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민준이 먼저 도윤을 찾아왔다. 예전 같으면 시비를 걸었을 그 아이는 의외로 조용했다. 그는 도윤에게 다가와 짧게 말했다. “지수 선배도 이상해요.” 도윤은 눈을 들었다. “뭐?” “아니, 그냥.” 민준은 손에 쥔 페트병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그 애, 복도에서 저랑 스쳐 지나갈 때 저한테 말했어요.” 도윤은 숨을 죽였다. “뭐라고.” 민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네가 오늘 본 건, 첫 줄일 뿐이야.’ 이렇게요.” 교무실 안의 공기가 딱 굳었다. 첫 줄. 도윤의 머릿속에 노트 첫 장이 번개처럼 스쳤다. 절대로 마지막 공식을 완성하지 말 것. 그럼 지수는 이미 그 첫 줄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뜻인가. 민준은 도윤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선생님, 진짜 뭐 숨기고 있죠?” 도윤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민준의 어깨 뒤로 시선을 옮겼다. 복도 끝에서 서하가 서류를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눈치챘는지 발걸음을 잠깐 늦췄다. 그리고 도윤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주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 서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오늘 이 학교에 흐르는 이상한 냄새를 느끼고 있었다. 도윤은 그 사실이 또 하나의 변수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숫자로 옮기려 했지만, 감정은 언제나 계산보다 복잡했다. 특히 서하처럼 타인의 표정에 민감한 사람은 더 그랬다. 그녀는 도윤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손을 내밀 타입이었다. 문제는, 그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이 숨겨 왔던 것까지 함께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점심 무렵, 도윤은 결국 서하와 단둘이 남게 됐다. 서하는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어제 일, 설명 안 하실 거예요?” “설명할 수 없어.” “왜요.” 도윤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말하면 더 커질 것 같아서.” 서하는 잠깐 숨을 삼켰다. “그럼 선생님, 이미 알고 계신 거네요.” 도윤은 대답 대신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유리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피곤하고 차가운 얼굴. 예전의 자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노트는 그의 감정을 줄이는 대신, 선택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서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선생님, 어제부터 자꾸 느껴져요. 누군가 이 학교를 보고 있다는 느낌.” 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서하가 그것을 감지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 “네.” 서하는 자신의 팔을 한 번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선이 사람 같지 않아요.” 도윤은 서하를 보았다. 그녀는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책상 아래에서 무의식적으로 노트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노트는 기록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불러오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교무실 문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문틈 아래로 얇은 종이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도윤이 가장 먼저 뛰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수학 문제처럼 보이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내용은 문제라기보다, 계산 결과에 가까웠다. “3일 뒤, 한 학생이 크게 다친다.” 그 아래에 누군가의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이번엔 막아 보세요.” 서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민준은 입술을 벌린 채 종이를 노려봤다. 도윤은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 도발은 이미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열었다. 페이지는 어제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계산식의 몇 줄이 새로 늘어나 있었고, 낯선 기호가 한 칸씩 더해져 있었다. 마지막 줄에 가까워질수록 종이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그런데 가장 밑에서, 도윤은 숨을 멈췄다. 0.000001% 그 숫자 아래에 이번엔 짧은 문장이 더해져 있었다. “이 확률은 학생이 아니다.” 도윤은 천천히 눈을 들어 교무실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서하. 민준. 복도 끝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듯 고개를 든 지수. 그리고 자신.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것은 한 학생의 사건이 아니었다. 노트는 처음부터, 학생을 구하는 척하며 다른 무언가를 조여 오고 있었다. 자신이 바꾸는 매 순간마다, 노트는 더 큰 계산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도윤은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 아래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마치 누군가 반대편에서 같은 페이지를 만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천천히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운명을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게 계산을 배우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발걸음이 동시에 복도를 가르고 있었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규칙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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