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이름을 세탁하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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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서를 다시 꺼낸 건 다음 날 밤이었다. 아홉 시 십 분 전이었고 4번 세탁기는 조용했다. 나는 카운터 서랍을 열고 어제 접어 넣은 종이를 폈다. 주문자 칸이 채워져 있었다. 어제도 채워져 있었다. 어제는 그것을 보고 서랍을 닫았다. --- 이름 석 자였다. 획이 옅었다. 볼펜이 안 나와서 눌러 쓴 것처럼 자국만 남은 데가 있고, 어떤 획은 아예 없었다. 첫 자에서 가로획 하나가 없었다. 셋째 자에서 아래쪽 받침이 없었다. 없는 자리에 종이가 눌린 자국도 없었다. 지운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안 그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석 자를 소리 내어 읽어 봤다. 읽혔다. 없는 획이 둘인데도 읽혔다. --- 읽고 나서 입안이 이상했다. 내 이름이다. 스물여섯 해 동안 쓴 이름이고, 시험지 맨 위에 몇백 번 적었고, 전화로 몇백 번 말했다. 그런데 방금 읽은 것이 내 이름 같지 않았다. 발음은 같았다. 혀가 움직이는 자리도 같았다. 다른 데가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 붙어 있다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의 이름을 대신 읽어 준 것 같았다. ---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뒤집어서 세탁표를 봤다. `품목: 이름 한 벌` `세탁 방법: 흐르는 물에 오래` `기한: 없음` 기한 칸에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주문에는 다 기한이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세 번 돌릴 것. 마르기 전에. 없음은 처음이었다. --- 나는 장부를 폈다. 첫 장부터 넘겼다. 내가 온 뒤로 적힌 것이 스물두 건이고 그 앞은 내 글씨가 아니다. 앞쪽으로 갈수록 글씨가 달랐다. 어떤 장은 획이 굵고 어떤 장은 눕혀 썼다. 나는 그것을 세어 봤다. 글씨가 바뀌는 자리가 셋이었다. --- 넷이 아니었다. 내 글씨까지 넣으면 넷인데, 앞의 셋 중 하나는 두 번 나온다. 중간에 끊겼다가 뒤에서 다시 나온다. 끊긴 자리에 다른 글씨가 열한 줄 있고, 그 열한 줄이 끝나면 원래 글씨가 돌아온다. 돌아온 뒤의 글씨는 앞보다 옅었다. --- 4번 세탁기가 돌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났다. 배수관이 없는 기계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나는 이제 세 번째로 듣는다. 세 번째부터는 놀라지 않는다. 놀라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 통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봤다. 빈 통이 반 바퀴 돌고 멈췄다. 멈춘 자리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젖어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것을 뗐다. 손끝에서 찢어질 것 같아서 두 손으로 뗐다. --- 세탁표였다. `품목: 이름 한 벌` `세탁 방법: 흐르는 물에 오래` `기한: 없음` 같은 것이었다. 서랍에 있는 것과 글자가 같았다. 주문자 칸을 봤다. 이름 석 자가 있었다. --- 획이 하나 더 없었다. 어제 없던 자리가 아니라 새로 하나가 더 없어졌다. 둘째 자의 세로획이었다. 나는 서랍의 것을 꺼내 나란히 놓았다. 두 장이 같은 이름이고 다른 이름이었다. --- 읽어 봤다. 이번에는 안 읽혔다. 한 번 더 봤다. 획이 셋 없으면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읽을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는데도 안 읽혔다. 알고 있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른 일이라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 젖은 종이를 카운터에 널었다. 마르면 획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젖어서 안 보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십 분쯤 뒤에 마른 것을 봤다. 돌아오지 않았다. --- 아홉 시가 됐다. 나는 불을 껐다. 카운터 등부터 끄고 안쪽 형광등을 끄고 간판을 껐다. 문을 잠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골목 끝까지 스물세 걸음이다. 나는 그것을 센다. 세면서 걸으면 뒤에 신경이 안 간다. 열일곱에서 소리가 났다. --- 물소리였다. 잠근 가게 안에서 나는 소리였고, 아까 그 소리와 같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셋에서 골목이 끝났다. --- 집에 와서 주머니를 뒤졌다. 세탁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카운터에 두고 온 줄 알았는데 들어 있었다. 꺼내서 불빛에 대 봤다. 두 장 다 주문자 칸에 획이 셋 없는 이름 석 자가 있었다. 같은 것이 두 장이었다. --- 나는 그것을 접어 서랍에 넣었다. 넣고 나서 손을 씻었다. 씻으면서 수도를 오래 틀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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