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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10

지하 삼 층의 빈 의자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먼저 왼발이 닿고, 사 초 뒤에 오른발이 닿았다. 같은 사람이 두 번 걷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표시등은 삼 층에서 멈춰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진동이 올라왔다. “태주 씨, 보안요원에게 격리실 복도를 막아 달라고 해 주십시오.” “이미 연락했습니다. 경찰 두 명이 계단 입구로 가고 있습니다.” 태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회색 정장 남자의 손목을 확인한 뒤 패치가 타 버린 자리를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지안은 남자의 호흡을 확인하고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윤 원장님, 이 환자는 맥이 너무 불안정합니다. 이동시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두면 더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지하 연구원으로 바로 내려가실 수는 없습니다.” “내려가야 합니다. 저 사람이 말한 열세 번째가 이 병원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안은 잠시 회색 정장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의 눈꺼풀은 닫혀 있었지만 손가락 끝은 일정한 간격으로 떨렸다. 떨림의 간격은 심전도에 찍힌 내 맥과 같았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이 사람이 열세 번째를 부르는 겁니까?” “아닙니다. 열세 번째가 이 사람을 통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자, 안쪽 진동이 멎었다. 대신 내 손목에서 맥이 먼저 뛰었다. 사 초 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맥이 울렸다. “문이 열리면 아무도 제 손을 잡지 마십시오.” 태주가 나를 보았다. “윤 원장님은요?” “저도 잡지 않겠습니다.” “그 약속은 지키실 수 있습니까?” “지켜야 합니다.” 태주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권총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총을 뽑지는 않았다. 지안은 회색 정장 남자의 손목 위에 차폐 천을 덮었다. “제가 신호를 볼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손대지는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안은 나에게 그렇게 대답한 뒤, 격리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말투가 낮아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안은 달라지지 않았다. 위험할수록 더 정확한 호칭을 사용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 중앙에 검은 의료용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방의 손잡이에는 흰색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태주가 먼저 복도 끝의 계단을 확인했고, 지안은 가방을 건드리지 않은 채 휴대용 탐지기를 가져왔다. “안쪽에서 전자기 신호가 약하게 잡힙니다.” “가방을 열어도 됩니까?” “잠시만요.” 나는 가방에서 새어 나오는 맥을 들었다. 기계의 진동이 아니었다. 사람의 심박을 녹음한 소리도 아니었다. 아주 약한 생체 신호가 가방 안에서 뛰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길게 한 번. 사 초 뒤에 회색 정장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열지 마십시오.” 태주가 멈췄다. “안에 환자가 있습니까?” “환자라면 이렇게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빈 맥입니다.” 가방의 지퍼가 안쪽에서 조금 움직였다. 지안이 즉시 복도 안쪽으로 물러났고, 태주가 나와 가방 사이에 섰다. 지퍼가 십 센티미터쯤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는 작은 유리병과 손목 패치 열두 개가 들어 있었다. 패치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1부터 12까지. 13번 패치는 없었다. 대신 가방 바닥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글씨는 9화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획의 시작은 가볍고, 끝은 지나치게 길었다. 내 손이 쓴 글씨와 닮았지만, 내 글씨에는 없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숫자 3을 쓸 때 가운데 획을 두 번 끊는 방식이었다. “이건 제 글씨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원장님 글씨와 같습니까?” 태주가 물었다. “제가 쓰는 손의 습관을 복사했기 때문입니다.”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신체 13은 비어 있어야 한다.` 그 아래에 다른 문장이 있었다. `빈 의자에 앉는 순간, 기억이 현재가 된다.` 나는 문장을 읽고도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가 된다는 표현은 이상했다. 기억은 이미 과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현재는 시간의 한 지점이 아니라,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 실행되는 상태인지도 몰랐다. “윤 원장님, 지하로 내려가시려면 환자 이송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지안이 말했다. “회색 정장 남자를 이송할 수 있습니까?” “산소와 모니터를 연결한 채라면 가능합니다. 다만 신호 차폐가 필요합니다.” “열한 명도 함께 이동해야 합니다.” 지안의 표정이 굳었다. “열한 명을 한 번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한 번에 움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병동에 남아 있으면 열세 번째 신호가 그 사람을 수신체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태주가 무전기를 들어 경찰에게 지시를 내렸다. 환자들을 차폐 가능한 이동식 침대로 나누어 준비하고, 복도 출입을 통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시를 마친 뒤 나에게 다가왔다. “청우통합의학연구원까지 이동 경로를 확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하 삼 층에 누가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네. 빈 의자가 있다는 말은,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는 가방 속 숫자 패치들을 보았다. “몸이 아니라, 맥입니다.” 이송 준비에는 십구 분이 걸렸다. 그동안 회색 정장 남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맥은 계속해서 네 박자 뒤의 내 맥을 따라왔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사 초 뒤에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내가 숨을 멈추면 십 초 뒤에 그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졌다. 지안은 이 현상을 기록하면서도 내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윤 원장님, 어지럽거나 시야가 겹치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숨을 참아서 파형을 바꾸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하지 않겠습니다.” 지안은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기록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가 적은 것은 내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신뢰도일 것 같았다. 태주는 구급차 두 대와 경찰 차량 한 대를 준비했다. 열한 명의 환자는 네 명, 네 명, 세 명으로 나누어 이동했다. 도윤은 마지막 차량에 탔다. 그는 차폐 천 아래에서 계속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말씀하세요.” “지하에 내려가면 주소가 바뀔 겁니다.” “주소가 바뀐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같은 곳인데, 다른 시간이 됩니다.” 지안이 도윤의 산소포화도를 확인했다. “도윤 씨, 지금 보이는 것과 기억나는 것을 구분해서 말해 주세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병원입니다. 그런데 지하 삼 층은 아직 병원이 아닙니다.” 그 말이 끝나자 회색 정장 남자의 모니터에서 잡음이 튀었다. 화면의 파형이 잠깐 평평해졌다가 다시 뛰었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이번에는 내 맥이 사 초 뒤에 따라갔다. 나는 처음으로 늦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사 초 뒤에 움직여야 할 파형이 내 몸 안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회색 정장 남자의 맥이 기준이 되고, 내 맥이 수신체가 된 것이다. 지안이 즉시 모니터를 분리하려 했지만, 태주가 손을 들었다. “지금 분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분리하지 마십시오.” “태주 씨.” “윤 원장님이 기준이 아닐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섣불리 끊으면 열한 명까지 동시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안이 나를 보았다. “윤 원장님, 결정해 주십시오.” 나는 회색 정장 남자의 손목 위에 놓인 차폐 천을 보았다. 손을 대지 않아도 맥이 들렸다. 그러나 그 맥은 이제 내 것을 복사하지 않았다. 내 몸에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송을 계속하십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야 합니다.” 차량이 병원 지하 하역장으로 내려갔다. 검은 승합차가 서 있던 자리에 흰색 페인트 가루가 남아 있었다. 태주는 그 자국을 사진으로 남기고, 바닥에 떨어진 작은 금속 조각을 집어 봉투에 넣었다. “범퍼에서 떨어진 조각 같습니다.” “차량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이미 위치를 공유했습니다. 청우 쪽 차량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태주가 나를 보았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급차가 출발했다. 창밖의 병원 불빛이 하나씩 끊겼다. 나는 회색 정장 남자와 같은 차량에 탔다. 지안은 내 맞은편에 앉아 모니터를 확인했고, 태주는 운전석 옆에서 청우의 도면을 펼쳤다. 도면에는 지하 이 층까지만 표시되어 있었다. 지하 삼 층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시설명 대신 `기록 보관실`이라는 글자만 있었다. “이 도면은 언제 작성됐습니까?” “십이 년 전입니다.” 태주가 대답했다. “그런데 건축물대장에는 지하 삼 층이 없습니다.” “없는 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병원에 있었습니다.” “청우에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계단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지안이 모니터에서 눈을 들었다. “윤 원장님, 지금 남자의 맥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회색 정장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목에서 들리던 복사 맥이 사라지고, 아주 느린 맥 하나만 남았다. 그 맥은 죽어 가는 사람의 맥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을 늦추며 기다리는 맥이었다. “누군가 깨어났습니다.” “환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요?” 나는 창밖을 보았다. 구급차의 뒤쪽 유리에는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검은 승합차의 불빛이 비쳤다. 오른쪽 범퍼가 찌그러진 차였다. 차량은 우리보다 사 초 늦게 방향을 바꾸었다. “열세 번째입니다.” 구급차가 청우통합의학연구원 앞에 멈췄다. 건물은 폐쇄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창문은 모두 검은 판자로 막혀 있었고, 정문 위의 간판에는 글자 두 개만 남아 있었다. 청우. 태주가 먼저 내렸다. 경찰들이 환자 차량 주변을 둘러쌌다. 지안은 회색 정장 남자의 산소통을 확인한 뒤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아직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제 맥이 누구의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건물 입구의 어두운 유리문에 손을 대지 않고 가까이 섰다. 유리 너머에서 맥이 울렸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사 초 뒤, 회색 정장 남자가 같은 리듬을 되풀이했다. 이번에는 내 맥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 어딘가에서 빈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내 목소리로 말했다. “윤 원장님, 이제 앉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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