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정장 남자의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싼 순간, 응급실의 소리가 모두 한 겹 늦게 들렸다.
심전도 모니터의 삑 소리가 먼저 울리고, 그 뒤에야 간호사의 비명이 따라왔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도 한 박자 늦었다. 내 피부에 닿은 손은 차갑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아니라, 방금 데운 금속의 온도에 가까웠다.
나는 손을 빼려 했다. 남자는 놓지 않았다.
“놓으세요.”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도착하기 전에 남자가 웃었다. 아니, 웃은 것은 입술뿐이었다. 눈은 여전히 빈 얼굴 안에 박힌 작은 구멍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의선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내 맥이 두 번 뛰었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남자의 손목에서도 같은 리듬이 따라왔다. 단, 늦었다. 정확히 사 초 뒤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박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네 번째 박자가 끝나는 순간, 남자의 피부 아래에서 내 맥이 되풀이됐다. 복사된 파형이었다. 전에는 내가 남의 맥에서 살의를 들었다. 이번에는 남의 맥이 내 몸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해진아!”
서지안이 달려와 남자의 팔을 잡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지안을 향해 말했다.
“열한 명은 아직 깨어 있습니다.”
지안의 손이 굳었다.
“누구냐고 물었어.”
“열두 번째입니다.”
그가 내 손목을 조금 더 세게 눌렀다. 압박점이 요골동맥 위에 정확히 놓였다.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또 설곡이 나올 것 같았다. 대신 응급실 천장을 보며 현재의 모양을 붙잡았다. 금이 간 형광등 두 개. 벽시계의 초침. 간호사 명찰의 파란 줄. 지금은 응급실이고, 오늘은 목요일이며, 태주는 주차장 카메라를 확인하러 나갔다. 나는 윤해진이다.
그 문장들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장소가 겹쳐졌다.
유리 벽 너머로 열두 개의 침대가 놓인 방. 침대마다 손목에 은색 패치가 붙어 있었다. 패치의 선은 한쪽 벽에 꽂힌 검은 장치로 이어졌다. 장치에는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 날짜였다. 그러나 화면의 구석에는 오래전에 폐쇄된 세림바이오 임상센터의 로고가 떠 있었다.
열두 번째 침대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짚고 있었다. 내 손이었다.
나는 손을 뿌리쳤다. 환상이 끊겼다.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방금 뭘 보여 준 거야?” 지안이 물었다.
“보여 준 게 아니야.” 나는 숨을 고르며 손목을 문질렀다. “전송된 거야.”
남자가 처음으로 눈을 깜박였다.
“전송은 양쪽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그의 맥을 짚었다. 이번에는 손가락 끝만 닿게 했다. 하나의 맥 아래에 두 개가 있었다. 빠른 맥은 내 것이었다. 느린 맥은 남자의 것이었다. 느린 맥이 한 번 뛸 때마다 빠른 맥이 사 초 앞에서 먼저 울렸다.
“네가 나를 복사하는 게 아니군.”
“복사는 불완전합니다.”
“그럼 뭘 원하는데?”
남자는 입을 열었지만, 나온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다.
“구제 반응을 재현하십시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내 손끝에 환자의 팔이 겹쳐졌다. 첫 번째 환자의 창백한 손, 두 번째 환자의 떨리는 손가락, 도윤이 주소를 잊기 직전 내 소매를 붙잡던 손. 열한 명의 손이 차례대로 포개졌다. 그들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이 자기 몸 안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살리는 척하면서 사람을 움직였지.”
“움직인 뒤에 살릴 수 있습니다.”
“그건 치료가 아니야.”
“당신은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로 겹쳤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잡음이 들렸다. 금속 바늘이 유리병을 긁는 소리. 나는 그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팔 안쪽을 더듬었다. 피부 아래 패치가 있었다. 중앙신경 가까이에 얇은 섬유가 박혀 있었다. 8화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구조였다. 다만 이번에는 섬유가 심장 쪽으로 이어지지 않고, 손바닥의 감각신경을 향하고 있었다.
“지안, 가위.”
“뭐 하려고?”
“절단하지 않아. 위치만 확인할 거야.”
지안이 의료용 가위를 건넸다. 내가 남자의 소매를 조금 자르자, 검은 점 하나가 드러났다. 점 주위로 피부가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때 주차장 쪽에서 태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진아, 차를 찾았어!”
태주는 휴대전화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화면에는 검은 승합차의 뒤쪽 사진이 떠 있었다. 오른쪽 범퍼가 안으로 찌그러져 있었고, 그 옆에 흰색 페인트가 길게 묻어 있었다.
“번호판은 가짜야. 그런데 이 찌그러진 자국이 지난달 세림바이오 폐쇄동 앞 카메라에 찍힌 차와 같아. 주차 기록을 역추적했더니 오늘 새벽 십칠 분 동안 이 병원 지하 하역장에 들어왔고, 그다음엔 구 청우통합의학연구원으로 갔어.”
“청우는 폐쇄됐잖아.”
“서류상으로는. 전력 사용량은 살아 있어.”
태주의 말이 끝나자 병동 안쪽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환자 격리실 세 곳의 모니터가 동시에 깜박였다. 지안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다른 환자들이 반응해.”
나는 남자의 손목에서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그의 맥이 사 초 앞에서 먼저 뛰었다. 내 손가락 아래의 맥이 따라가려는 순간, 격리실의 모니터가 같은 리듬을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이대로 두면 열한 명의 맥이 하나로 묶인다. 첫 번째 환자부터 마지막 환자까지, 모두가 한 사람의 명령을 받게 된다. 남자가 말한 ‘전부 살린다’는 말은 한꺼번에 움직이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나는 반대로 맥을 만들었다.
빠르게 한 번.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내가 환자들에게 배웠던 불규칙한 리듬이었다. 몸이 스스로 살기 위해 만들어 내는 작은 오류. 남자의 복사된 맥이 그 리듬을 따라오려면 사 초가 필요했다. 그 틈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그의 요골동맥을 눌렀다.
“해진아, 무슨 짓이야?”
“전송을 끊는 게 아니라, 늦추는 거야.”
“그러다 둘 다 멈추면?”
“멈추지 않아. 내 맥은 이미 혼자 뛰는 법을 배웠으니까.”
나는 네 박자마다 한 번씩 리듬을 바꿨다. 남자의 맥은 네 박자 뒤에서 따라왔다. 첫 번째 모니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모니터의 파형이 흔들렸다. 세 번째 모니터에서는 환자의 이름 대신 숫자 하나가 떠올랐다.
12.
남자의 손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꺾이기 직전, 태주가 그의 어깨를 받쳤다. 빈 얼굴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늦추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알아.”
“사 초 뒤에는 당신의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내 오른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남자의 목을 향했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붙잡았다. 근육이 내 의지와 반대로 떨렸다. 사 초 뒤의 손이, 지금의 손을 밀어내고 있었다.
지안이 내 팔을 눌렀다.
“해진아, 나 봐. 지금은 여기야.”
“알아.”
“벽시계 초침 봐.”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열두 칸을 지나고 있었다. 열두 칸. 열두 명. 숫자가 겹치자 다시 설곡의 눈이 내 안쪽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눈밭이 아니었다. 폐쇄된 연구원 지하실이었다. 검은 장치 앞에 열세 번째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의자에 붙은 패치에서 아주 약한 맥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목소리가 지하실의 스피커에서 울렸다.
“열두 번째가 비면, 열세 번째가 들어갑니다.”
나는 환상 속 의자의 바닥을 보았다. 희미한 흰 페인트 자국. 태주가 보여 준 승합차 범퍼의 자국과 같은 색이었다.
“청우로 가야 해.”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지금 아니면 사 초 뒤에 누군가 대신 갑니다.”
남자는 의식이 흐려진 채 웃었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굴의 윤곽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눈, 코, 입이 있는 자리마다 얇은 안개가 덮였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그가 중얼거렸다. “이름이 생기기 전의 맥을 기억하는 겁니다.”
태주가 그를 제압하려 하자 남자의 손목에서 패치가 짧게 빛났다. 응급실의 모든 모니터가 동시에 꺼졌다.
정전은 십이 초 동안 이어졌다.
그 십이 초 동안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으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맥이 먼저 뛰었고, 사 초 뒤에 남자의 맥이 따라왔다. 또 사 초 뒤에 격리실 안의 열한 명이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이 병원에 오지 않은 누군가의 맥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길게 한 번.
지안의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불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패치는 타 버린 듯 검게 변했고,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태주가 종이를 펼쳤다. 주소 하나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청우통합의학연구원 지하 삼 층. 수신체 13 교정실.`
나는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글씨는 낯설지 않았다. 획의 시작과 끝이 내 필체와 닮아 있었다. 누군가 내 손을 빌려 쓴 것처럼.
복도 끝 격리실에서 도윤이 갑자기 말했다.
“선생님, 이번엔 주소를 알아요.”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도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가리켰다.
“사 초 뒤에 오는 사람이, 거기 있어요.”
도윤의 맥이 뛰었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나는 아직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맥이 먼저 대답했다.
사 초 뒤, 복도 저편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내 심장보다 먼저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