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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8

열두 번째는 죽지 않았다

“원장님이 지금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민도윤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꿈을 설명하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을 순서대로 꺼내는 사람처럼 단어 사이의 간격이 일정했다. 서지안이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왔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겁니까, 아니면 기억나는 겁니까?” 도윤은 대답하기 전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빠르게 움직였다. “기억입니다.” “본 적 없는 장소인데도요?” “예.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도윤의 오른손이 침대 시트 위를 더듬었다. 손가락이 위에서 아래로 완만한 선을 그렸다. “산길이 여기서 꺾입니다. 왼쪽에는 소나무가 세 그루 있고, 오른쪽 아래로 지붕이 보여요. 사람들이 쓰러진 곳은 그다음입니다.” 해진은 그 길을 알고 있었다. 중원의 북쪽 끝, 설곡으로 들어가는 고개였다. 겨울이면 무릎까지 눈이 쌓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길의 모양이 달라졌다. 소나무 세 그루 가운데 하나는 벼락을 맞아 속이 비어 있었다.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현대의 민도윤이 알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해진은 아는 것을 바로 말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짐작하는 것을 섞으면 상대의 기억까지 오염될 수 있었다. “제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검푸른 옷입니다. 소매가 넓고 허리에는 작은 주머니가 많이 달렸어요.” 의원들이 약재와 침을 나누어 넣던 의대였다.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침갑을 들고 있습니다.” 도윤의 숨이 한 번 막혔다. 모니터의 맥박이 빨라졌다. 해진의 심장도 사 초 뒤 같은 간격으로 뛰었다. 외삼촌의 박동을 따라 하던 동조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 위에 도윤의 불안이 얇게 겹쳤다. 지안이 도윤에게 천천히 숨을 내쉬게 했다. “쓰러진 사람은 몇 명입니까?” “열둘입니다.” 해진의 시선이 도윤에게 고정됐다. “전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도윤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열한 명은 원장님을 보고 있습니다.” 차폐실 밖에 있던 환자 수와 같았다. “나머지 한 명은요?” 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얼굴이 없습니다.” 지안이 질문을 끊었다. 도윤의 산소포화도는 정상이었지만 호흡이 지나치게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뜬 뒤에도 한동안 천장을 보지 못했다. 시선은 눈앞에 없는 산길을 따라 움직였다. “제 기억이 아닙니다.” 도윤이 말했다. “그런데 제 기억보다 먼저 떠오릅니다.” 그 말이 가장 위험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빈자리를 남의 장면으로 채우면,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쪽이 자신의 삶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지안은 도윤에게 어머니의 이름과 자신의 집 주소를 물었다. 이름은 바로 대답했지만 주소에서는 아파트 동을 기억하지 못했다. 주민등록번호 뒤 네 자리도 두 번 틀렸다. “차폐 전에는 대답했던 내용이에요.” 지안이 낮게 말했다. 새 기억이 들어온 만큼 원래 기억이 밀려난 것인지, 신호가 일시적으로 회상 경로를 막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해진은 금속 칸막이 밖의 환자들을 바라봤다. “나머지 사람들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서로 말을 맞출 수 없게 한 명씩요.” 지안은 병실을 세 구역으로 나눴다. 질문은 모두 같았고, 앞사람의 답은 다음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강태주가 경찰 두 명과 함께 기록을 맡았다. 첫 번째 환자 박준호는 눈 냄새를 말했다. “피 냄새가 아니었습니다. 단 냄새였어요. 젖은 나무를 태울 때처럼.” 두 번째 환자는 쓰러진 사람들의 입술이 검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해진이 눈 위에 침 열두 개를 한 줄로 놓았다고 말했다. 네 번째는 그중 하나를 다시 침갑에 넣었다고 했다. 다섯 번째는 해진의 왼손이 피에 젖어 있었다고 말했다. 여섯 번째는 아무 장면도 보지 못했다. 대신 처음 듣는 이름을 반복했다. “설곡. 설곡. 설곡.” 일곱 번째는 사람들이 해진을 무엇이라 불렀는지 기억했다. “의선.” 그 말을 들은 순간 외삼촌의 심전도가 흔들렸다. 사 초 뒤 해진의 가슴에서도 같은 조기 수축이 일어났다. 태주가 기록하던 펜을 멈췄다. “윤 원장님이 중국에 있었던 적은 없다고 했죠?” “현대의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럼 저 사람들이 본 건 뭡니까?” “제 기억과 닮은 장면입니다.” “같은 장면이 아니라요?” 해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설곡에서 그는 열두 사람을 치료했다. 산 아래 마을의 우물에 독이 풀렸고, 물을 마신 사람들이 눈밭까지 도망쳐 나온 뒤 차례로 쓰러졌다. 해진은 열한 명을 살렸다. 한 명은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해진은 침 열두 개를 눈 위에 놓지 않았다. 필요한 침은 사람마다 달랐고, 사용하지 않은 침을 눈에 펼쳐 둘 이유도 없었다. 왼손에도 피가 묻지 않았다. 기억의 뼈대는 같았으나 세부가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해진의 과거를 본 뒤 알아보기 쉬운 장면으로 다시 구성한 것 같았다. “섞여 있습니다.” 해진이 말했다. “제가 겪은 일과, 제가 겪지 않은 일이 함께 있습니다.” 태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짜 기억입니까?” “가짜라고 부르기에는 진짜가 너무 많습니다.” “진짜라고 부르기에는 틀린 것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현재인지 과거인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장면은 분명 과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누구의 과거이며, 누가 어떤 부분을 고쳤느냐였다. 여덟 번째 환자는 눈 속에 쓰러진 사람의 손을 기억했다. 아홉 번째는 해진이 독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열 번째는 얼굴 없는 열두 번째 사람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마지막 환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이 끝나자 자신의 손목을 잡고 중얼거렸다. “다시 담아야 해.” “무엇을 말입니까?” 지안이 물었다. “흩어진 걸.” 환자는 자신이 한 말을 듣고 놀란 얼굴이었다. “제가 말한 겁니까?” 열한 명의 진술은 한 사람의 기억을 잘게 나눈 것처럼 이어졌다. 각자 가진 장면은 짧았고 서로 겹치지 않았다. 도윤만 여러 조각을 연결해 하나의 길로 볼 수 있었다. 그가 다른 환자들보다 오래 신호에 노출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해진을 찾으라는 명령도 설명할 수 있었다. 흩어진 기억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였다. “‘전이’는 살의를 옮기는 단계만 뜻하지 않았습니다.” 해진이 말했다. “기억 조각을 수신체에 다시 넣는 과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지안이 해진의 손바닥을 보았다. “환자들이 선생님에게 닿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릅니다.” “추측은요?” “저 장면을 기억하게 되었을 겁니다.” 해진은 잠시 뒤 말을 덧붙였다. “대신 제가 가진 다른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도윤이 주소를 잊은 것처럼. 외삼촌이 어머니의 얼굴을 되찾는 대가로 다른 기억을 내놓은 것처럼. 차폐실 한쪽에서 외삼촌이 산소 마스크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지안이 막기 전에 입을 열었다. “눈을……봤다.” 해진이 다가갔지만 손목에는 닿지 않았다. “치료 중에 봤습니까?” 외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네 기억인 줄 몰랐다.” “그들이 무엇을 물었습니까?” “몇 명을……살렸냐고.”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열한 명.” 외삼촌의 눈에 후회가 스쳤다. “못 살린 사람은……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해진은 설곡의 마지막 환자를 떠올렸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다. 독이 심장까지 퍼진 뒤였고 해진은 맥을 짚는 순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침을 놓았다.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거두지 못했다. 아이는 새벽이 오기 전 숨을 거뒀다. 얼굴이 없지는 않았다. 이름도 있었다.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을 외삼촌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 “얼굴은요?” “보이지……않았다.” 외삼촌도 얼굴 없는 열두 번째 사람을 보았다. 그것은 해진의 기억이 아니었다. 강태주의 전화가 울렸다. 지하 장치를 조사하던 감식팀이었다. “파일을 하나 복구했습니다.” 태주는 통화를 스피커로 바꿨다. “제목은 ‘귀환 기준 기억’입니다. 수신체 열한 개에 분할 저장하고 기준체와 접촉하면 병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안이 물었다. “기준체가 윤해진 원장입니까?” “수신체 13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병합 뒤 실행할 항목이 하나 더 있어요.” “무엇입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구제 반응 재현.” 사람을 살리려 했던 순간의 맥. 세림바이오는 해진의 살의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그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디에 침을 놓고, 살릴 수 없는 사람에게도 언제까지 손을 거두지 않는지를 배우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명령에 살리는 반응이 왜 필요합니까?” 태주가 물었다. 해진은 열한 명의 환자를 보았다. “살의를 숨길 수 있으니까요.” 맥에는 거짓말이 남았다. 사람을 죽이려는 몸에서는 아무리 표정을 감춰도 살의가 들렸다. 그러나 살리려는 맥을 그 위에 씌우면 달라질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의심받지 않는 살인자. 상대를 붙잡고 맥을 짚는 순간까지도 의사처럼 보이는 몸. 세림바이오가 원한 것은 해진의 능력이 아니었다. 해진이 평생 몸에 새긴 의술의 흔적이었다. 병원 유선전화가 울렸다. 응급실 접수대였다. “서 선생님, 신원 미상 환자 한 명이 추가로 왔습니다. 교통사고 신고인데 외상은 없고 의식이 없습니다.” “왜 저한테 바로 연결했죠?” “귀 뒤에 같은 패치가 있습니다.” 지안과 해진이 동시에 시계를 봤다. 열한 명의 차폐가 끝난 지 십이 분이었다. “누가 데려왔습니까?” “택시 기사가 도로에 쓰러져 있는 걸 봤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했어요. 환자 옆에서 검은 승합차가 출발했다고요. 뒷문이 찌그러져 있었답니다.” 태주가 먼저 차폐실을 나갔다. “번호판 확인하겠습니다.” 해진과 지안도 응급실로 이동했다. 새 환자는 격리 처치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삼십대 남자였고 깨끗한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주삿바늘 자국도, 저항한 흔적도 없었다. 귀 뒤에는 투명 패치가 붙어 있었다. 심전도는 안정적이었다. 너무 안정적이었다. 열한 환자의 맥과 달랐고 외삼촌의 맥과도 달랐다. 일정한 간격 사이에 작은 흔들림 하나가 반복됐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해진이 차폐실에서 만든 리듬이었다. “이 사람이 열두 번째입니까?” 지안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손목을 잡지 않고 확인할 방법은요?” 해진은 모니터를 보았다. 파형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이 남자는 해진의 맥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 열한 명과 떨어져 지금 도착했는지는 접촉하지 않고 알 수 없었다. 해진은 장갑을 두 겹 꼈다. 지안이 차폐 천을 준비하고 태주가 문밖에 보안요원을 세웠다. “오 초만 확인하겠습니다.” “이상하면 바로 떼어 냅니다.” 해진은 남자의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맥이 닿는 순간 눈이 내렸다. 설곡의 소나무 세 그루가 보였다. 눈 위에는 열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과거와 같았다. 해진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 검푸른 의대를 입고 열한 사람 사이를 움직였다. 그리고 얼굴 없는 열두 번째 사람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눈발 사이에서 드러났다. 회색 정장 남자였다. 해진이 손을 떼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뒤집혔다. 장갑 위로 해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모니터의 두 파형이 완전히 겹쳤다. 남자가 눈을 떴다. “이번에는 열두 명을 전부 살려 보십시오.” 그가 해진의 목소리로 말했다. “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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