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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7

열한 명이 나를 의선이라 불렀다

병실 복도에서 침대 난간이 움직였다. 철컥. 한 번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병실에 누워 있던 열한 명의 환자가 같은 순간에 난간을 내렸다. 심전도 화면에는 해진이 숨을 멈추며 만들었던 리듬이 반복되고 있었다. 빠르게 두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한 번. 서지안이 차폐실 유선전화로 병동에 지시했다. “환자들 출입문 잠그고 산소 준비하세요. 억지로 붙잡지 말고, 날카로운 물건부터 치우세요.” 인터폰 너머에서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겹쳤다. “선생님, 전부 일어났어요.” “의식은요?” “눈은 떴는데 대답을 안 해요.” 복도 카메라 화면이 모니터 한쪽에 나타났다. 환자복 차림의 남자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3화에서 간호사를 붙잡았던 남자였다. 양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얼굴에도 분노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무언가를 듣는 사람처럼. 다른 병실 문이 열렸다. 여자 한 명이 맨발로 나왔다. 그 뒤로 두 사람, 세 사람이 차례로 복도에 섰다.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영상의학과였다. 해진이 있는 MRI 차폐실 쪽이었다. “저를 찾고 있습니다.” 해진이 말했다. 지안이 차폐문 잠금 상태를 확인했다. “선생님이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맥을 따라오는 겁니다.” “여기는 전파가 차단돼요.” “그래서 입구에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들이 걸음을 옮겼다. 열한 명은 뛰지 않았다. 서로 부딪치지도 않았다. 복도 양쪽으로 나뉘어 같은 속도로 걸었다. 간호사가 앞을 막자 맨 앞의 남자가 멈췄고, 뒤의 환자들도 정확히 같은 간격을 두고 멈췄다. “병실로 돌아가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남자는 간호사를 보지 않았다. “어디…….” 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나왔다. “어디 있지?” 뒤에 선 환자들의 입도 함께 움직였다. “어디 있지?” “어디 있지?” 목소리의 높낮이는 달랐지만 말의 간격은 같았다. 해진은 자신의 손목을 짚었다. 쇠를 긁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맥박 하나가 뛸 때마다 차폐문 바깥에서 발소리가 한 번씩 가까워졌다. 그의 심장이 환자들에게 명령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들의 몸이 이미 받은 명령을 해진의 맥에 맞춰 실행하고 있었다. 지안이 해진의 손을 손목에서 떼어 냈다. “또 혼자 확인하지 마요.” “저들이 원하는 게 접촉이라면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지안은 병동에 진정 처치를 준비하되 환자들이 공격하지 않는 한 강제로 투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원인을 모르는 약물 노출자 열한 명에게 한꺼번에 진정제를 쓰는 것은 위험했다. 환자들은 영상의학과 복도 입구까지 왔다. 무선주파수 차폐 구역을 알리는 선을 맨 앞의 남자가 넘는 순간, 그의 걸음이 멎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도 차례로 멈췄다. 남자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전도 파형이 크게 흔들렸다. 차폐 구역에 들어온 몸과 아직 외부 신호를 받는 몸 사이에서 명령의 시간이 어긋난 듯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산소 가지고 접근하세요. 지금입니다.” 지안의 지시에 간호사와 보안요원이 움직였다. 남자를 들것에 눕히는 동안 다른 환자들은 차폐선 바깥에 서서 기다렸다. 공격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안쪽을 바라봤다. 해진은 유리창 너머의 얼굴들을 보았다. 공포였다. 첫 번째 난동 환자와 같았다. 몸은 명령을 따르고 있었지만 눈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해진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해진에게 닿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외삼촌의 손이 보온포 위에서 움직였다. “문……열지 마라.” 이번에는 그 목소리가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저를 찾는 이유를 아십니까?” 해진이 물었다. 외삼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놈들도 보고 있었다고 했죠.” 산소 마스크 아래의 입술이 굳었다. “무엇을 봤습니까?” 외삼촌의 시선이 지안에게 갔다가 다시 해진에게 돌아왔다. “네가……내 맥을 짚던 날.”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말하지 않은 걸 말했다.” 해진은 재활병원의 병실을 떠올렸다. 외삼촌의 손목에서 뇌출혈이 오기 직전 계단을 오르던 감각을 읽었다. 오른쪽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난간을 잡으려던 왼손이 허공을 긁은 기억이었다. 그는 외삼촌에게 물었다. 그날 계단에서 누가 뒤에 있었느냐고. 외삼촌은 아무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회색 정장 남자가 있었습니까?” 외삼촌의 눈꺼풀이 떨렸다. “있었다.” “왜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기억이 없었다.” “나중에는요?” 외삼촌이 눈을 감았다. “돌아왔다.” 잃어버린 기억을 맥으로 되찾아 준다는 세림바이오의 제안은 거짓만은 아니었다. 외삼촌은 치료를 받은 뒤 계단에서 쓰러지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그곳에 회색 정장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돌아왔다. “그들이 기억을 돌려줬습니까?” “조금씩.” “그래서 침묵했습니까?” 외삼촌은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차폐실 밖에서는 환자 열 명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먼저 쓰러진 남자는 산소를 공급받자 눈을 떴지만,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안쪽으로 기어오려 했다. “한 번만……더 받으면.” 외삼촌이 말했다. “네 어머니 얼굴도……기억날 것 같았다.” 해진의 표정이 굳었다. 외삼촌에게 누나는 해진의 어머니였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진을 치우지 못했던 사람. 뇌출혈 뒤에는 그 얼굴부터 알아보지 못했다. “그 대가로 저를 보여 줬습니까?” 외삼촌의 눈이 열렸다. “처음엔……네가 뭘 하는지 몰랐다.” “알고 난 뒤에도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미안하다.” 짧은 사과였다. 해진은 더 묻지 않았다. 이해와 용서는 다른 일이었다. 외삼촌이 피해자라는 사실도, 해진을 위험에 두고 치료를 택했다는 사실도 지워지지 않았다. 유선전화가 울렸다. 강태주였다. “윤 원장님, 지하 장치에서 새 기록이 잡혔습니다.” “무슨 기록입니까?” “조금 전 송신 시각에 파일 하나가 생성됐어요. 제목이 ‘탐색’입니다.” “내용은요?” “수신체들이 기준 신호의 위치를 찾아 이동한다. 접촉에 성공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진은 차폐실 밖의 환자들을 보았다. “다음 단계가 뭡니까?” “전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옮길 전 자입니다.” 기억을 옮긴다는 뜻인지, 명령을 옮긴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들이 해진의 몸에 닿게 두어서는 안 됐다. “장치를 끌 수 있습니까?” “전원과 통신선을 차단해도 배터리로 동작합니다. 저장 장치를 빼면 삭제된다는 경고가 있고요.” “차폐하십시오.” “뭘로요?” “장비 전체를 금속망 안에 넣으십시오. 지하실 벽과 같은 구조면 됩니다.” 태주가 주변 감식팀에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안은 통화를 들으며 병원 시설팀에 연락했다. MRI 장비를 정비할 때 쓰는 차폐 천과 접지용 금속 시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병실을 전부 차폐할 수는 없어요.” “환자가 아니라 송신기를 가려야 합니다.” 해진이 말했다. “밖에서 오는 신호와 지하 장치가 주고받지 못하게 막으면 다음 명령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명령은요?” “끝나는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모니터의 파형을 살폈다. 열한 명의 리듬은 같은 모양이었지만 속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맨 앞에서 차폐선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파형이 가장 먼저 흐트러졌다. “명령이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닙니다.” 해진이 말했다. “신호에서 멀어지면 약해집니다.” 지안이 차폐실과 복도 사이의 전실을 가리켰다. “한 명씩 들여보내면요?” “제게 닿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병원 직원들이 이동식 칸막이와 차폐 천을 가져왔다. 전실 한가운데를 막아 환자와 해진 사이에 금속층을 만들었다. 지안은 가장 상태가 나쁜 남자부터 차폐 구역 안으로 옮겼다. 남자는 들것 위에서 몸을 비틀었다. 눈은 해진이 있는 방향을 향했지만 금속 칸막이 앞에 오자 움직임이 느려졌다. 십 초. 팔에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이십 초. 심전도에서 해진의 리듬이 사라졌다. 남자 본래의 빠르고 불규칙한 맥이 돌아왔다. “이름이 뭡니까?” 해진이 칸막이 너머에서 물었다. 남자는 입술을 움직였다. “박……준호.” 3화에서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지안이 그의 의식과 동공을 확인했다. 준호는 자신이 왜 복도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해진에게 가려 하지 않았다. 나머지 환자들도 한 명씩 차폐 전실로 옮겨졌다. 명령이 풀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십팔 초에서 이십육 초 사이였다. 지안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을 기록했다. 마지막은 민도윤이었다. 도윤은 다른 환자들과 달리 걸어서 들어왔다. 눈에 초점이 있었고, 자신의 발을 멈추려고 벽을 붙잡은 흔적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차폐선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그는 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금속 칸막이 건너편의 해진을 바라봤다. “원장님.”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목소리는 들려요.” 도윤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런데 제 것이 아닌 기억이 보입니다.” 해진은 숨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맥도 짚지 않았다. “어떤 기억입니까?” 도윤의 눈앞에서 초점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눈이 많이 와요. 산 아래 사람들이 전부 쓰러져 있고…… 원장님이 지금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해진의 손끝이 굳었다. 독곡의 겨울이었다. 중원에서 백 명을 살리고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던 날.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거기서 누가 저를 부릅니까?” 해진이 물었다. 도윤의 입술이 움직였다. “의선.” 그 한마디가 금속 칸막이를 넘어왔다. 해진은 자신이 본 장면들의 시간을 다시 구분했다. 독곡의 겨울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었다. 삼십 년 전 중원에서 이미 겪고 지나온 과거였다. 환자들이 앞날을 본 것도, 존재하지 않는 환영을 꾸며 낸 것도 아니었다. 세림바이오는 해진의 맥에 남은 과거를 찾아냈다. 그가 환자의 맥에서 살의와 기억을 읽어 냈듯, 이번에는 기계와 열한 명의 몸이 해진을 거꾸로 읽고 있었다. 복도에 누운 다른 환자들도 차례로 고개를 들었다. “의선.” “의선.” 열한 명이 해진의 무림 시절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맥에서 복제된 것은 살의만이 아니었다. 윤해진이 숨겨 온 삼십 년까지 함께 전송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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