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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우한의원 유리문에는 경찰 표식이 붙어 있었다.
태주가 봉인을 뜯고 장갑 한 켤레를 건넸다. 나는 내 한의원에 들어가면서 장갑을 꼈다.
안은 그대로였다. 진료 침대의 시트도, 접수대 위의 마른 볼펜도, 벽시계도 그대로였다. 벽시계만 멈춰 있었다. 건전지가 나간 것이지 누가 손댄 것은 아니었다.
서류함은 접수대 아래 두 번째 칸에 있었다. 열쇠는 내 열쇠고리에 있었고, 개원한 날 이후로 돌린 적이 없었다.
자물쇠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기름칠한 자물쇠 소리입니다.” 태주가 말했다.
“저는 안 했습니다.”
그는 손전등으로 열쇠구멍 아래를 비췄다. 먼지가 쌓인 자리에 가느다란 선이 두 줄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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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는 열한 장이었다. 전산에서 본 목록과 순서까지 같았다.
여덟 번째를 꺼냈다.
`진료정보 제공 동의서`
서명란에 외삼촌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 생년월일이 있었다.
숫자 3의 가운데 획이 끊겨 있지 않았다.
“태주 씨.”
“보고 있습니다.”
전산에 올라간 스캔본은 끊겨 있었다. 원본은 이어져 있었다. 같은 문서일 수 없었다.
태주가 종이를 조명에 비췄다. 서명란 주위로 종이 두께가 달랐다. 손톱으로 훑으니 미세한 단차가 있었다.
“오려 붙였습니다.”
“원본이 이건데 왜 붙입니까?”
“이건 원본이 아닙니다.”
그는 종이를 뒤집었다.
“원본에서 서명란만 떼어다 다른 종이에 붙이고, 그걸 다시 복사한 겁니다. 여기 남은 건 복사본에 서명을 한 번 더 얹은 것이고요.”
“그럼 진짜 서명이 붙어 있던 종이는 따로 있겠군요.”
“찾으셔야죠.”
나는 나머지 열 장을 한 장씩 넘겼다. 임대차 계약서, 사업자 등록, 의료폐기물 위탁, 화재보험. 내가 도장을 찍은 것들이었다. 서류함 바닥에 종이가 한 장 더 깔려 있었다. 목록에는 없던 것이었다.
`임상연구 참여 동의서`
참여자 이름은 외삼촌이었다.
날짜는 그가 쓰러지기 다섯 달 전이었다. 서명은 원본이었다. 3의 획이 이어져 있었고 잉크가 종이에 스몄다.
“본인 걸 서명했군요.” 태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원장님 정보는 어디서 나옵니까.”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은 약관이었다. 여덟 포인트쯤 되는 글자가 두 단으로 빼곡했다. 나는 그 단을 손끝으로 짚으며 내려갔다.
제사 항 다목에 그것이 있었다.
`참여자와 동거 또는 정기적 접촉 관계에 있는 직계·방계 친족의 생체 반응 관찰 자료를 부수적 자료로 수집할 수 있다.`
“이거 읽고 서명하는 사람 없습니다.” 태주가 말했다.
“없습니다.”
외삼촌은 자기를 팔았다. 그리고 그 문장 하나로 나를 같이 팔았다. 두 가지가 같은 서명 하나에 들어 있었다.
`정기적 접촉 관계`
한 달에 두 번, 병실에서 손목을 잡았다. 공책의 숫자는 부수적 자료였다.
중원에서도 계약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문파끼리 사람을 주고받을 때 쓰던 서찰이었다. 그때는 조항이 세 줄을 넘지 않았다. 세 줄이면 읽는 사람이 다 읽는다.
여기서는 조항이 백 줄이 넘었다. 백 줄을 다 읽는 사람은 없다. 읽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 백 줄의 용도였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외삼촌이 이걸 알고 서명했겠습니까.”
태주는 대답하기 전에 종이를 한 번 더 봤다.
“모르고 했으면 이용당한 겁니다.”
“알고 했으면요.”
“그래도 이용당한 겁니다.”
“구분은 됩니까.”
“구분은 재판에서 합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지금 서류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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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차 계약서를 다시 폈다.
임대인 칸이 개인이 아니었다. 법인이었다. 이름을 처음 봤을 때는 건물주가 법인인 게 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태주가 휴대전화로 법인 등기를 조회했다.
“주소가 같습니다.”
“어디랑요.”
“어제 흰 승합차가 들어간 건물입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이 건물 말입니다. 여기 주소로 의료기관 개설 신고가 하나 더 되어 있는데, 날짜가 원장님 계약보다 앞섭니다.”
“청우통합의학연구원 말씀입니까.”
“석 달 앞입니다.”
나는 접수대에 손을 짚었다.
외삼촌이 쓰러지고 나서 이 자리가 석 달 비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석 달을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시간으로 알고 있었다.
그 석 달 동안 여기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한의원은 비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비워 둔 것이었다.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건물주는 오늘 안 찍으면 간판을 내리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밀려서 찍었다고 생각해 왔다.
밀린 게 아니었다. 마감일이 그쪽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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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받았고, 짧게 두 번 대답한 뒤 끊었다.
돌아설 때 표정이 조금 달랐다.
“도윤 씨 진술서 말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상대 쪽에서 벌써 걸고넘어졌답니다.”
“무슨 근거로요.”
“기억 손상 진단을 받은 사람의 진술이라고요.”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진단서는 우리가 뗀 겁니다.”
“그러니까요. 우리가 낸 진단서로 우리 증인을 칩니다.”
그는 수첩을 폈다가 다시 접었다.
“도윤 씨한테 아까 연락했습니다. 진술 철회하면 참고인에서 빠질 수 있다고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직접 물어보시죠.”
태주가 번호를 눌러 나에게 넘겼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도윤이 받았다.
“원장님.”
“도윤 씨. 형사님께 들었습니다.”
“네.”
수화기 너머로 사람 소리가 났다. 마트나 정류장 같았다. 퇴원한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었다.
“철회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원장님 분류는 어떻게 됩니까.”
“근거가 두 장 남습니다.”
“두 장이면 됩니까.”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병원 안에서 나온 게 하나 더 있어야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럼 안 하겠습니다.”
“도윤 씨.”
“원장님. 저 넉 달을 기억 못 합니다.”
“압니다.”
“그 넉 달 동안 제가 한 건 전부 남이 시킨 거였다고 병원에서 그러더라고요. 손을 든 것도, 사람을 민 것도요.”
전화기를 든 손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데 어제 그거는 제가 골랐습니다.”
“…….”
“그거 하나는 갖고 있으려고요.”
“변호사가 세 번은 물고 늘어질 겁니다.”
“세 번 다 같은 말 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태주에게 돌려주었다.
“법정에서 안 통합니다.” 그가 말했다.
“통하게 만들어야죠.”
“어떻게요.”
“병원 안에서 나온 근거를 하나 더 만들면 됩니다. 도윤 씨 것에 기대지 않게요.”
“원장님 것으로요?”
“제가 환자면 제 진료 기록도 병원 안에서 나온 문서입니다.”
“그건 서 선생님이 쓰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섯 시까지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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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침대를 밀었다.
바닥의 문은 지난번에 뜯긴 그대로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의료실이 나왔다. 장비는 대부분 압수되어 나갔고, 벽에 자국만 남아 있었다.
한쪽 벽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감식팀이 사진만 찍고 떼지 않은 것이었다.
표였다.
왼쪽 칸에 조건이 있고 오른쪽 칸에 동작이 있었다.
`맥 확인 → 반응 없음 → 4.0초 → 다음 대상`
`맥 확인 → 반응 있음 → 즉시 처치`
`접촉 거부 → 3.0초 → 재접촉`
`처치 불가 판정 → 1.0초 → 이탈`
스무 줄쯤 됐다. 전부 조건과 시간과 동작이었다.
나는 그 표를 위에서 아래로 두 번 읽었다.
없는 줄이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없는 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는데도 손을 놓지 않은 경우. 표에는 그 줄이 없었다.
외삼촌의 공책 마지막 장에는 숫자가 없었다. 숫자 대신 세 글자가 있었다.
`놓지 않음`
그 세 글자는 이 표의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조건이 없고 시간이 없고 동작이 없다. 넣으려면 표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
“규칙은 다 가져갔군요.” 태주가 말했다.
“규칙만 가져갔습니다.”
“차이가 있습니까.”
“사람은 규칙을 어긴 기록을 같이 갖고 다닙니다.”
나는 표에서 손을 뗐다.
“어긴 적이 있으니까 다음에 어떻게 할지를 그때 정합니다. 이 표는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이 없습니다.”
열세 번째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내가 환자가 되겠다고 한 순간 표에 없는 칸이 생겼다. 표는 없는 칸을 읽지 못한다. 읽지 못하는 것을 만나면 멈춘다.
그것은 나를 흉내 낼 수 있었지만 나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대신하려면 내가 규칙을 어긴 날들까지 가져가야 하는데, 그 날들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외삼촌의 공책 한 장뿐이고, 그 한 장을 외삼촌은 넘기지 않았다.
태주가 표를 촬영했다.
“그럼 저쪽은 이걸로 뭘 합니까.”
“사람 대신은 못 씁니다. 도구로는 씁니다.”
“차이가 뭡니까.”
나는 네 번째 줄을 짚었다.
`처치 불가 판정 → 1.0초 → 이탈`
“설곡에서 저는 이 판정을 열두 번 했습니다. 그중 한 번은 틀렸습니다.”
태주가 손전등을 낮췄다.
“틀린 걸 나중에 아셨습니까.”
“그날 저녁에요.”
살릴 수 없다고 보고 지나친 사람이 밤에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다시 갔을 때는 늦었다. 그 뒤로 나는 판정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손을 놓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외삼촌은 그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재고 있었다. 줄어든 이유는 재지 않았다.
“이 표에는 틀린 판정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틀려 본 적이 없으니 확인도 안 합니다. 그래서 빠릅니다.”
“빠른 게 왜 문제입니까.”
“한 번도 안 멈추니까요.”
태주는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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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와서 접수대의 불을 켰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고 들어왔다.
창밖은 아직 밝았다. 벽시계는 멈춰 있었고 내 손목시계는 다섯 시 사십 분을 가리켰다.
“여섯 시까지입니다.” 내가 말했다.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태주가 서류를 봉투에 나눠 담았다. 임상연구 참여 동의서는 따로 두 겹으로 쌌다.
나는 나가기 전에 간판 아래를 봤다.
야간 진료라고 쓴 아크릴 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비에 씻겨서 글자 가장자리가 흐려져 있었다.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