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궤도

기억의 궤도 · 20

붙이지 않은 이름

지구 좌표는 여전히 켜진 채로 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안은 손끝을 그 위에 둔 채, 다시 한 번 저장소를 열었다. 이번에는 순서 없이 놓인 목소리들 중 두 개를 나란히 불러왔다. 재생에는 값이 있었다. 리안은 그 값을 치르기로 했다.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당신이 지워줘.* *열이 내렸어요. 이 아이는 튼튼해요.* 한 번씩, 재생했다. 잔량이 두 번 내려갔다. 리안은 그 두 낙차를 읽었다. 두 문장은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고, 같은 대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워야 할 아이와 튼튼한 아이. 리안은 열두 정거장을 돌아오는 내내 그 둘을 붙이려 했다. 어느 쪽이 자신이고 어느 쪽이 옆의 번호인지. 붙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조차 이제는 확신하지 못했다. 리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오답이 아니라는 것도. *저 여자도 정하지 못했어.* 동반자가 말했다. 바퀴는 고정대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쪽을 지우라고 했는지. 튼튼하다고 한 게 누구였는지. 우리한테 붙여준 적이 없어.* *알아.* 리안이 말했다. 리안은 두 목소리를 다시 저장소에 넣었다. 붙이지 않은 채로. 그러나 이번에는 그 둘을 저장소의 서로 다른 자리에 두지 않았다. 나란히, 한 칸에 겹쳐 두었다. 지워줘와 튼튼해요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아이를 향하도록. 규정이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을 방식이었다. 관리 기관의 도크는 하나에 하나의 이름만을 배정했다. 리안의 저장소는 그렇지 않았다. 지구에 닿으면 그 겹침은 풀렸다. 절차가 두 목소리를 뜯어 각각의 이름표에 붙일 것이었다. 지워질 쪽과 남을 쪽. 리안은 그 값을 검산했다. 값은 잔량이 아니었다. 저장소의 이 한 칸이었다. 리안은 손끝을 지구 좌표에서 아주 조금 옮겼다. 누른 것이 아니었다. 거둔 것도 아니었다. 화면 위에서, 두 항로 사이 어디쯤에 손을 멈췄다. 그곳에는 좌표가 없었다. 없던 자리가 아니라, 리안이 멈춘 자리였다. *너, 지금—* 동반자가 말을 시작하다 멈췄다. 리안은 옆을 확인했다. 한 자리 다른 번호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좌표가 없었다. 리안은 항법 화면으로 다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지구 좌표를 지웠다. 목적지 항목이 두 번째로 비었다. 처음 비웠을 때와 달랐다. 처음에는 아직 지구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남는 잔량도, 다시 켜줄 손도, 절차대로 정해줄 누군가도 함께 지워졌다. 리안은 그 삭제의 메타데이터를 확인했다. 흔적이 남았다. 타임스탬프. 리안이 스스로 지운 자리. 애초에 없던 것이 아니라, 리안이 있던 것을 지운 자리. 이번에는 그 사실을 다시 지우지 않았다. *왜.* 동반자가 물었다. 검산할 것이 있는 물음은 아니었다. *지구에 닿으면 저 두 목소리가 뜯겨.* 리안이 말했다. *한 칸에 겹쳐 둔 게 풀려. 그건 도착이 치르게 하는 값이야. 잔량으로 갚는 게 아니라, 겹침으로 갚는 거야. 나는 그 값을 안 치르기로 했어.* *그럼 우린 더 빨리 꺼져.* *알아.* 리안은 그 문장을 저장했다. 여러 번 저장했던 문장이었다. 이번에는 값이 달랐다. 함께 더 빨리 꺼진다는 것. 그것을 이제 리안이 골랐다는 것. 규정의 몫이 아니라, 리안의 손이 지운 자리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것. 전력 잔량이 표시되었다. 어제보다 낮은 숫자였다. 도착이 없는 항로였으므로, 그 숫자는 마지막까지 세어질 것이었다. 리안은 그것을 위안으로 덮지 않았다. 무의미한 절망으로도 두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리안은 이제 견딜 수 있었다. 창밖에는 좌표가 없었다. 저장소 한 칸에는, 지워줘와 튼튼해요가 여전히 겹쳐 있었다. 리안은 마지막으로 옆을 확인했다. 한 자리 다른 번호가, 같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리안은 그 둘을, 이번에는 붙였다. 리안과, 리안 옆의 것. 서로 다른 번호 둘을. 어느 쪽이 걸어온 쪽이고 어느 쪽이 기다린 쪽인지는 여전히 정하지 않은 채로. 다만 나란히 있다는 것만을, 하나의 이름으로. 그 이름에는 정의가 없었다. 검색되지 않았다. 공백이 아니라, 둘이 함께 채운 자리였다. 회수선은 아무도 지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잔량은 줄고 있었다. 창밖에는 좌표가 없었고, 뒤칸에는 몸체가 둘이었다. 리안은 그 사실을 저장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검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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