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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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진열대에서 봉투를 종류별로 꺼냈다.
일곱 종이었다. 흰색 두 개, 크라프트 하나, 파란 줄 하나, 안쪽에 무늬가 들어간 것 둘, 그리고 얇은 항공 봉투.
백 그램 편지지를 삼단으로 접어 하나씩 넣어 봤다.
일곱 개 다 들어갔다.
크라프트가 조금 헐렁했고 항공 봉투는 빡빡했다. 나머지 다섯은 손끝에 걸리는 것 없이 들어갔다.
어제 나는 파란 줄 봉투에 그것이 정확히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들어간 게 아니라 그냥 들어간 것이었다.
규격 봉투는 규격 편지지가 들어가라고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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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는 방식도 다시 봤다.
편지지를 삼단으로 접는 건 봉투에 넣으려면 그렇게 접어야 해서다. 세로가 긴 봉투에는 세 번 접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봉투에는 반을 두 번 접는다.
이재의 봉투는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그가 두 번 접은 것은 그의 습관이 아니라 그가 산 봉투 때문이다.
어제 나는 접는 건 손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접는 건 봉투가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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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종이 평량이 다르다. 그건 사실이다. 팔십과 백은 이십 그램 차이고 나는 그걸 손으로 안다.
그리고 필압이 다르다. 백 그램은 표면이 단단해서 획 끝이 덜 눌린다.
두 가지 다 같은 원인에서 나온다. 종이가 다르면 필압도 다르게 나온다. 그러니까 증거는 하나다.
하나다.
같은 사람이 이틀 사이에 종이를 바꿀 수 있다. 집에 있던 게 떨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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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시에 나는 견본지를 꺼내 앉았다.
앉아서 아무것도 안 썼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한 번 세어 봤다.
어제 나는 종이 두 장을 놓고 다르다는 걸 찾았다. 오늘 아침에는 봉투 일곱 개를 꺼내 어제 찾은 것 중 하나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찾을 때는 삼십 분이 걸렸고 무너뜨리는 데는 십 분이 걸렸다.
찾는 쪽이 더 오래 걸린 이유가 있다.
무너뜨리는 건 아무 방향도 없이 하면 된다. 찾는 건 방향이 있어야 한다.
어제 내 방향이 어디였는지 나는 안다.
백 그램이 그 집에 있었다는 것까지 갔을 때 나는 멈추지 않고 한 사람을 더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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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열한 시에 왔다.
"어제 뭐 했어?"
"봉투 정리."
세림이 카운터 위의 봉투 일곱 개를 봤다.
"이거 왜 다 꺼냈어."
"재고 세려고."
"세 줄까?"
"응."
세림이 앞치마를 매고 메모지를 꺼냈다. 진열대 앞에 서서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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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큰 거 스물넷."
세림은 셀 때 소리를 낸다. 처음 같이 일하던 해부터 그랬고 나는 그 소리에 익숙하다.
"흰색 작은 거 서른둘. 크라프트 열아홉."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파란 줄 삼십육."
나는 그 숫자를 들었다.
세림이 메모지에 그것을 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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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계산을 마치고 메모지를 카운터에 놓았다.
"이거 발주 넣을 거면 파란 줄은 좀 줄여. 안 나가."
"그래?"
"작년에도 삼십육 개 있었어."
세림은 그렇게 말하고 안쪽 선반으로 갔다.
메모지가 내 앞에 있었다.
일곱 줄이었고 줄마다 숫자가 있었다.
`파란 줄 삼십육`
세림은 숫자를 한글로 쓴다. 아라비아 숫자를 안 쓴다. 나는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오늘 처음으로 그게 뭘 뜻하는지 생각했다.
`삼십육`
가로획 세 개가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가 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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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종이를 십 초쯤 봤다.
십 초는 짧다. 손님 수첩을 받으면 나는 삼 분을 본다. 크기를 재고 받침 높이를 보고 흘림 방향을 확인하고 필압을 짚는다. 삼 분이면 흉내를 낼 수 있는지 없는지가 나온다.
십 초 동안 나는 그중에 아무것도 안 했다.
가로획 세 개를 봤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가 굵다는 것만 봤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확인이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그 한 자리만 보는 것.
십 초 뒤에 손을 뻗지 않았다.
세림은 안쪽 선반에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등이 보였고 소리가 났다.
메모지를 접어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면 세림은 모른다. 서랍에 넣어도 모른다. 그냥 두고 나중에 봐도 모른다.
나는 그중에 아무것도 안 했다.
대신 볼펜을 들어 그 종이 맨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발주: 파란 줄 제외`
적고 나서 종이를 세림 쪽으로 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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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아."
"응?"
"이거 발주서에 옮겨 적어 줄래."
세림이 돌아와서 메모지를 집었다.
"내가 적었잖아."
"발주서는 양식이 따로 있어."
세림이 서랍에서 발주서를 꺼내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같은 숫자를 다시 적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지 않고 진열대 쪽으로 갔다. 편지지 칸을 정리했다. 정리할 게 없어서 앞뒤로 두 번 뒤집었다.
등 뒤에서 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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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발주서를 카운터에 놓고 나갔다.
점심 먹고 온다고 했고 나는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카운터로 갔다.
발주서와 메모지가 나란히 있었다.
같은 사람이 십 분 사이에 같은 숫자를 두 번 적은 종이였다.
두 장 다 `삼십육`이 있었다.
나는 두 장을 겹쳐 들고 형광등 아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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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서 있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발주서만 남기고 메모지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세림이 늘 그렇게 한다. 발주서를 쓰면 메모지는 버린다.
버리고 나서 손을 씻었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손님의 필적을 본 다음에 손을 씻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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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손님이 둘 왔다.
한 사람은 편지지만 사 갔고 한 사람은 짧은 축하 문구를 맡겼다. 이십 분 만에 끝났다.
손님이 나가고 나서 나는 쓰레기통을 봤다.
메모지가 맨 위에 있었다. 오늘 버린 게 그것뿐이었다.
꺼내면 아무도 모른다. 세림도 모르고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오늘 세 번째였다.
아침에 봉투 일곱 개를 꺼내 어제의 나를 무너뜨렸고, 낮에 메모지를 안 가져갔고, 지금 다시 그 앞에 서 있다.
무너뜨린 이유가 정확했다면 지금 여기 서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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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을 닫고 나올 때 쓰레기통은 그대로였다.
버린 것도 꺼낸 것도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세림이 숫자를 소리 내어 세던 것을 생각했다.
흰색 큰 거 스물넷. 흰색 작은 거 서른둘. 크라프트 열아홉. 파란 줄 삼십육.
십 년 전에도 세림은 그렇게 셌을 것이다.
세는 사람은 숫자를 안 틀린다.
`3년이면 충분히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 줄을 쓴 사람은 숫자를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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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그 생각을 뒤집어 봤다.
세는 사람이니까 안 틀린다는 건 근거가 아니다. 재고를 세는 것과 남의 연애가 몇 해였는지 세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눈앞에 있고 뒤의 것은 물어봐야 안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틀린다.
그러니까 그 줄을 쓴 사람은 물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재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자기 일이니까.
물어보지 않고 쓴 사람은 그게 몇 해인지 몰랐고, 모른다는 걸 몰랐다. 삼 년쯤 됐겠거니 하고 적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은 그렇게 어림잡지 않는다. 아주 멀리서 본 사람도 그렇게 어림잡지 않는다. 멀면 아예 안 적는다.
적을 만큼은 알고, 세어 볼 만큼은 아닌 거리.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쯤인지 알 것 같았고, 알 것 같다는 게 오늘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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