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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쓰레기통이 비어 있었다.
세림이 어제 퇴근하면서 비웠다고 했다. 목요일이 재활용 수거일이라 수요일 밤에 내놓는다. 여덟 해 동안 그래 왔고, 그동안 내놓은 사람은 세림이다.
카운터에 발주서가 올라와 있었다.
메모지가 아니라 발주 용지였다. 세림이 저녁에 정서해서 올려 둔 것이다. 칸이 있고 칸마다 숫자가 있었다.
전부 아라비아 숫자였다.
발주 용지에는 그렇게 적는다. 도매상이 보는 서류라 한글로 적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봤다.
어제 내가 안 가져간 것은 메모지였고, 메모지는 어젯밤 봉투에 담겨 나갔고, 지금 남은 것은 아라비아 숫자 열두 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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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열 시쯤 왔다.
"어제 재고 다시 세셨어요?"
"아니."
"숫자 맞을 거예요."
"맞을 거야."
세림이 앞치마를 맸다.
나는 발주 용지를 들었다.
"세림아."
"네."
"이거 손으로 다시 써 줄 수 있어?"
세림이 나를 봤다.
"거기 다 적혀 있는데요."
"도매상이 팩스를 못 받는대."
세림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팩스요?"
"어제 전화 왔어."
"…….."
"그럼 사진 찍어서 보내면 되잖아요."
"손으로 쓴 게 낫대."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 이 일을 오래 하면 남의 목소리는 잘 듣게 되는데 자기 목소리는 잘 안 들린다. 오늘은 들렸다.
세림이 종이를 받았다.
"몇 장이요?"
"한 장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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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서서 썼다.
앉으라고 하지 않았고 세림도 앉지 않았다. 카운터에 종이를 대고 허리를 굽히고 썼다.
쓰는 데 이 분이 안 걸렸다.
`흰색 큰 것 스물넷`
`흰색 작은 것 서른둘`
`크라프트 열아홉`
`파란 줄 삼십육`
다 쓰고 종이를 나에게 밀었다.
"이거 맞죠?"
"맞아."
세림이 뒤쪽 선반으로 갔다. 가면서 한 번 돌아봤다.
"팩스 없는 데도 있구나."
"응."
"요새도요?"
"응."
세림은 더 묻지 않고 상자를 내렸다.
나는 그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접는 동안 손이 두 번 미끄러졌다. 종이가 얇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삼단으로 접었다. 규격 봉투에 들어가는 접이다. 넣을 봉투가 없는데 그렇게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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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손님이 하나 왔다.
예순쯤 된 남자였다. 등기 봉투를 내밀었다.
"주소만 좀 써 주쇼."
"내용물은요?"
"안에 든 건 내가 썼소. 겉만 써 주면 돼."
받아 보니 봉투가 이미 봉해져 있었다. 겉면이 비어 있었다.
"손이 떨려서."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엄지와 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 쓰면 알아볼 수가 없어."
나는 주소를 받아 적었다.
받는 사람 칸에 이름을 쓸 때 남자가 옆에서 봤다. 나는 내 획으로 썼다.
흉내 내지 않는다. 남의 말을 내 글씨로 쓰는 것이 이 일이다.
"고맙소."
남자가 나가고 나서 나는 잠깐 손을 내려다봤다.
떨리지 않았다.
앞치마 주머니가 종이 한 장만큼 두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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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닫고 서랍을 열었다.
봉투가 거기 있었다. 소인이 찍힌 쪽이 위로 오게 넣어 두었고, 넣은 지 이틀 됐다.
꺼내서 카운터에 놓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세림의 종이를 꺼내 옆에 놓았다.
두 장 사이를 손바닥 하나쯤 띄웠다. 겹치지 않게 놓는 것이 규칙이다. 겹쳐 놓으면 눈이 두 개를 하나로 읽는다.
편지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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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 씨.`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여기를 떠납니다.`
`찾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3년이면 충분히 봤다고 생각합니다.`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방은 좋은 데로 구하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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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줄이다.
십 년 동안 세 번 읽었고 세 번 다 필체를 봤다. 획의 끝, 흘림, 받침. 삼 분이면 되는 일이라고 나는 손님들에게 말한다.
오늘은 대조를 하려고 폈다.
같은 글자를 찾아야 대조가 된다. 나는 두 장에서 겹치는 글자를 찾기 시작했다.
`흰` 없다.
`색` 없다.
`큰` 없다.
`것` — 편지에 없다. 둘째 줄에 `게`가 있으나 다른 글자다.
`스` — 없다.
`줄` — 없다.
`파` — 없다.
`삼` —
나는 다섯째 줄을 봤다.
`3년`
아라비아 숫자였다.
여덟 줄에 숫자는 그것 하나뿐이고, 그것은 한글이 아니다.
세림은 숫자를 한글로 쓴다. 어제도 오늘도 삼십육이라고 썼다. 재고를 셀 때마다 그렇게 썼다.
편지에는 한글 숫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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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장을 그대로 두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대조가 안 된다.
겹치는 글자가 없으면 필적 대조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재료의 문제다. 재료가 없으면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못 한다.
내가 어제 하루를 들여 도착한 자리가 여기다.
물어보지 않고 어림잡을 만한 거리. 그 거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숫자를 한글로 쓰는 사람. 세 개를 포개면 얼굴이 하나 나오는데, 포갤 종이가 없다.
세림에게 거짓말을 해서 받아 낸 종이가 카운터에 있다.
그 종이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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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이를 찾으면 된다.
나는 그 생각을 하고 뒤쪽 선반으로 갔다. 발주 철이 삼 년치 있다. 그 앞에는 이 년치가 창고에 있고, 그 앞은 버렸다.
철을 내려 넘겼다.
숫자와 품명이었다.
흰색 큰 것. 크라프트. 파란 줄. 백 그램. 팔십 그램. 스물넷, 서른둘, 열아홉.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같은 글자가 나왔다. 세림이 손으로 쓴 것은 이것뿐이다.
문장이 없다.
편지에 있는 글자는 문장을 이루는 글자다. `모르겠습니다`의 `모`, `찾지`의 `찾`, `죄송합니다`의 `죄`. 재고 목록에 그런 글자가 나올 일이 없다.
그 사람이 쓴 문장을 나는 한 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철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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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지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획을 안 봤다.
읽었다.
십 년 만이었다. 세 번 읽었다고 했지만 세 번 다 이 여덟 줄을 문장으로 읽지 않았다. 스물둘에 한 번, 스물다섯에 한 번, 스물여덟에 한 번. 세 번 다 이재의 글씨인지를 봤다.
오늘은 뜻이 보였다.
일곱째 줄에서 멈췄다.
`방은 좋은 데로 구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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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해 이월에 방을 구하지 않았다.
그 집에 살았다. 어머니와 살았고 그 뒤로 삼 년을 더 살았다. 스물다섯에 나왔고 나올 때 부동산을 두 군데 봤다.
스물둘 이월에 나는 방을 알아본 적이 없다.
십 년 동안 나는 이 줄을 그냥 하는 말로 읽었다. 편지 끝에 붙이는 인사라고. 잘 지내라, 밥 잘 먹어라, 방은 좋은 데로 구해라. 뜻 없이 붙는 말이 있고 그런 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는 여덟 줄이다.
여덟 줄짜리 편지에 뜻 없는 줄을 넣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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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이월에 방을 구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안다. 안 지 십 년 됐다. 그때 나에게만 말했으니까.
나는 카운터에 손을 짚었다.
짚고 나서 그 손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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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상자를 열었다.
파란 줄 봉투를 꺼내 세기 시작했다.
열, 스물, 서른.
서른여섯이었다.
세림이 어제 적은 숫자와 같았다. 오늘 아침 발주 용지에 적힌 숫자와도 같았다.
맞았다.
나는 그것을 상자에 도로 넣고, 넣고 나서 다시 꺼내 세었다.
열, 스물, 서른.
서른여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