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날짜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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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열 시에 세림이 왔다.
앞치마를 매고 재고를 셌다. 소리를 내어 셌다.
나는 카운터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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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아."
"응."
"너희 방 상자 내가 열었어."
세림이 세다가 멈췄다.
"어디."
"엄마 집. 옆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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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진열대에서 돌아섰다.
"거기 아직 있어?"
"있어."
"…….."
"뭐가 있는데."
"참고서랑 수첩이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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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앞치마 끈을 한 번 당겼다. 어제 맬 때 이미 당긴 것이다.
"언제 열었어."
"이 주쯤 됐어."
"…….."
"지금 말하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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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내가 말했다.
세림이 카운터로 왔다.
"뭐가 미안한데."
"남의 상자 열었어."
"…….."
"그건 미안한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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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의자에 앉았다.
"뭐 봤어."
"사진 한 장."
나는 그것을 말했다.
"비 오는 날 찍은 거. 문구점 앞이고 우산이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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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의 손이 무릎에서 한 번 움직였다.
"그거 있었네."
"기억나?"
"기억나지."
세림이 창 쪽을 봤다.
"내가 찍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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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 네 글씨 있었어."
"뭐라고 적혔는데."
"유월 이일 비."
"…….."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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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웃지 않고 말했다.
"그거 필름이었어. 스물네 장짜리. 다 찍고 나서 사진관 맡기면 사흘 걸렸어."
"…….."
"뒷면에 안 적으면 나중에 언제 건지 몰라. 스물네 장이 다 섞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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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스물세 장은."
"몰라. 어디 있겠지."
세림이 손등으로 카운터를 한 번 쓸었다.
"그 상자에 열대여섯 장 있었잖아. 나머지는 어디 갔는지 몰라."
"…….."
"그 한 장은 왜 남았을까."
"남은 게 아니라 안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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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을 도로 넣고 왔다.
그 말도 했다.
"왜 도로 넣었어."
"네 거니까."
세림이 나를 봤다.
"가져오지."
"…….."
"내가 볼 사람이 아니야."
"너 나온 사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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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에 대답을 못 했다.
세림이 그 사진에서 나를 뺐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그 사진을 세림의 물건으로 봤고, 세림은 그 사진을 나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본다.
같은 종이를 놓고 둘이 다르게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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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들었다.
세림은 여백에 적는 사람이다. 뒷면도 여백이다.
"세림아."
"응."
"너 그날 우산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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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나를 봤다.
"그거 내 우산이야."
"…….."
"뭐?"
"내 우산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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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밖에 없었어."
세림이 말했다.
"그날 비 온다는 걸 나만 알았거든. 아침에 라디오 들었어. 그래서 하나 갖고 나갔어."
"…….."
"너 준 거야?"
"너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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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너는."
"문구점 처마 밑에 있었어."
세림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쪽이었다.
"거기가 좀 나와 있어. 한 사람은 서 있을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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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운터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 우산을 나는 십 년 넘게 우리 둘 사이의 물건으로 알았다. 하나뿐이어서 나눠 썼고, 나눠 썼기 때문에 그날이 남았다.
하나뿐이었던 게 아니라 하나를 가져온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가져온 사람은 그 밑에 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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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있었어?"
"이십 분쯤."
"…….."
"그동안 뭐 했어."
"사진 찍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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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한 장 찍고 나머지는 그냥 있었어. 필름 아까우니까."
"…….."
"그날 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기억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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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 나."
세림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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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아."
"응."
"너 그 사람 얼굴 기억나?"
세림이 잠깐 있었다.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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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다음을 안 물었다.
물으면 세림이 말해 줄 것이다. 눈이 어떻고 턱이 어떻고, 웃을 때 어느 쪽이 먼저 올라가는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들으면 나는 그걸 얹는다.
십 년 동안 내가 한 것이 그거였다. 어디선가 가져다 얹고 그걸 기억이라고 불렀다. 남의 말로 채운 얼굴은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수진아."
"…….."
"안 물어봐?"
"안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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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었다.
"그건 안 적었으니까."
세림이 진열대로 돌아갔다.
흰 큰 것 스물넷부터 다시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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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손님이 둘 왔다.
하나는 봉투를 사고 하나는 이름 하나를 써 달라고 했다. 봉투 겉면에 세 자였다. 오 분 걸렸다.
값을 받는데 손님이 물었다.
"이거 안에 뭐 쓰는 건 안 하세요?"
"합니다."
"…….."
"그런데 오늘은 겉만 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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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나가고 세림이 진열을 고쳤다.
"저런 사람 많아?"
"많아."
"…….."
"겉만 시키는 사람."
"많아. 안은 자기가 써."
세림이 봉투 한 줄을 앞으로 당겼다.
"그게 낫지."
"…….."
"뭐가."
"안은 자기가 쓰는 거."
세림은 그 말을 하고 더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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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에 세림이 은행에 갔다.
가게에 나 혼자 있었다.
나는 이면지를 한 장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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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통화를 옮겨 적었다.
그가 한 말이 넷이다. 갔습니다. 비는 안 왔습니다. 세면 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것.
마지막 것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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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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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이었다.
적고 나서 나는 그 두 줄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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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여덟 달 동안 나에게 준 것이 열네 장이다.
전부 그의 글씨였고 전부 두세 줄이었다. 이천십육년 이월 십육일, 우체통 앞. 시청 앞 정류장, 비, 우산 하나.
날짜와 자리다.
열네 장이 다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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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가 준 것도 그것이다.
다음 달. 극장.
날짜가 하나고 자리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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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을 놓았다.
십 년 전 그가 못 쓴 것이 그것이었다. 청색 세 번째 줄이 날짜와 자리는, 에서 끊겨 있다. 획 하나를 긋다 말았다.
어제 그는 그것을 말로 했다.
편지가 아니라 전화로, 종이가 아니라 소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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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에 한 줄을 붙였다.
오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한 줄이 있어서 그것은 약속이 아니다. 날짜와 자리만 있고 요청이 없으면 그건 항목이다.
항목은 문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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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그걸 알고 했는지 생각했다.
한참 생각할 것도 없었다.
오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를 안 붙였으면 그건 요청이다. 요청이면 나는 가거나 안 가거나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 정하면 대답을 해야 하고, 대답하면 그 대답이 우리 사이에 남는다.
붙였으니 요청이 아니다.
요청이 아니면 거절할 것이 없고, 거절할 것이 없으면 나는 정할 것이 없다.
정할 것이 없으면 다음 달까지 안 정한 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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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문장을 손으로 짚었다.
이면지에 적은 두 줄 옆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오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는 안 적었다.
적으면 그것도 항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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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달 동안 그는 내가 항목으로 문장을 만드는 것을 열네 번 봤다. 항목을 주면 내가 채운다는 걸 안다.
어제 그는 항목만 주고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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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도 내 말투를 배웠다.
세림은 그걸로 자기를 정리하려고 했다. 뭘 넣고 뭘 빼는지 나누면 편해지니까. 그러다 셈이 안 서서 무너졌다.
이재는 반대다.
그는 그걸로 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항목만 놓으면 아무것도 확정이 안 된다.
같은 걸 배워서 하나는 정리하려고 쓰고 하나는 안 정하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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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 세림이 돌아왔다.
봉투를 하나 들고 왔다. 은행 봉투다.
"뭐 해."
"적어."
"…….."
"뭘 적어."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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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이면지를 봤다.
두 줄이 보였을 것이다. 세림은 그것을 읽고 아무것도 안 물었다.
읽고 나서 은행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저녁에 뭐 먹을래."
"아무거나."
"국수 말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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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문을 닫았다.
세림이 먼저 갔다. 나는 카운터를 정리하고 서류함을 열었다.
셋째 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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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의 항목 종이가 열네 장 있다.
날짜순으로 겹쳐 놨고 맨 아래가 첫 번째다. 열네 장 다 그의 글씨다.
여덟 달치가 손가락 두 마디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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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적은 이면지를 반으로 접었다.
접어서 그 위에 놓았다.
열다섯 번째 것은 내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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