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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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통입니다."
나는 봉투를 안 만졌다.
카운터에 놓인 채로 있었다. 위가 접혀 있고 옆면이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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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씨."
"네."
"그건 이재 씨 겁니다."
"…….."
"값을 치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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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봉투에서 손을 뗐다.
"값은 치렀습니다."
"그러면 이재 씨 겁니다."
"…….."
"쓴 사람은 수진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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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받았다.
"쓴 건 접니다."
"…….."
"그런데 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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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손님 의자에 안 앉았다.
서 있었다. 카운터 앞에 서서 봉투 옆에 손을 놓고 있었다.
"수진 씨."
"네."
"제가 이걸 여덟 달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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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다 읽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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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통을 언제 읽으셨습니까."
"받는 날마다요."
"…….."
"그날 밤에 읽었습니까."
"그날은 안 읽었습니다."
이재가 봉투 위를 조금 폈다.
"이틀쯤 두었다가 읽었습니다. 열네 번 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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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들었다.
받는 날 안 읽고 이틀 뒤에 읽는다. 그건 정해 놓고 하는 사람의 방식이다.
"왜 이틀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이틀이었고 그다음부터 이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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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가 조용했다.
안쪽에서 세림이 상자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창고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세림은 안 나온다.
이재가 그쪽을 한 번 봤다.
"세림 씨 계십니까."
"있습니다."
"…….."
"인사는 안 하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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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안 받았다.
세림과 이재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 나는 안다. 십 년 전에 뭐라고 불렀는지도 안다.
두 사람이 그걸 안 바꾼 채로 십 년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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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드리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다 읽었으니까요."
"…….."
"그게 이유입니까."
"그게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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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봉투를 봤다.
"이재 씨."
"네."
"저는 사본을 안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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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나를 봤다.
"압니다."
"여덟 해 됐습니다."
내가 말했다.
"쓴 걸 손님한테 드리고 나면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뭘 썼는지 다음 날이면 반쯤 잊습니다."
"…….."
"그래서요."
"이걸 받으면 그게 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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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봉투에서 손을 뗐다.
뗐다가 다시 놓았다.
"안 받으시면 제가 갖고 갑니다."
"…….."
"갖고 가시면 됩니다."
"수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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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이걸 어디 두고 죽을지 정해야 하는 나이가 아닙니다."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건 그 전에 정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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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의 뒤를 안 물었다.
물으면 그가 설명하게 되고, 설명하면 오늘 다 말하게 된다. 오늘 다 말하면 그가 다음에 올 이유가 없어진다.
"두고 가십시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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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봉투에서 손을 뗐다.
이번에는 안 놓았다.
"열어 보십시오."
"오늘은 안 엽니다."
"…….."
"언제 여십니까."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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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요."
"…….."
"이재 씨."
"네."
"제가 안 열면 이건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이재가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압니다."
"그래도 두고 가십니까."
"두고 갑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문 쪽으로 갔다.
두 걸음 가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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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 씨."
"네."
"열네 통 중에 한 통은 제가 항목을 안 드렸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었다.
"…….."
"몇 번째입니까."
"그건 안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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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봉투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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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를 열었다.
봉투는 열었고 편지는 안 폈다.
안에 봉투가 열넷 있었다. 우리 진열대에 있는 흰색 규격이고 겉면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때 그렇게 드렸다.
한 통씩 꺼내서 카운터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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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개가 두 줄로 놓였다.
일곱 개씩이다. 나는 그것을 순서대로 놓지 못했다. 겉면에 아무것도 없으니 어느 게 첫 번째인지 알 수가 없다.
두께가 다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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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장씩 넘겨 봤다.
넘기면 소리가 난다. 안에 종이가 들면 소리가 낮고, 비면 높다. 열넷 다 낮았다.
당연한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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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집은 것이 제일 두꺼웠다.
손톱에 걸렸다. 백 그램이 두 장 들었을 때 그렇게 된다.
두 장을 쓴 날이 있었다는 뜻이다.
무슨 날이었는지 나는 기억이 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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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봉투 하나를 들고 형광등 아래로 갔다.
풀칠 자리가 마른 그대로다. 이재는 열넷 다 뜯었을 텐데 뜯은 자국이 없다.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안 뜯고 접착제 마른 데부터 벌린 것이다. 십오 화 전에 그가 자기 편지를 열 때 그렇게 했다.
같은 손이 열넷을 다 그렇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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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봉투를 도로 놓았다.
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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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면 알 수 있다.
무슨 말을 썼는지, 어느 날에 무엇을 안 썼는지, 빈 줄을 몇 개 남겼는지 다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화에 내가 한 줄을 비웠고 그는 그 빈 줄에서 손이 떨렸다고 했다.
그 빈 줄이 몇 번째 봉투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찾으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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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면 안 되는 이유를 대라면 하나뿐이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손님한테 사본을 안 준다고 했고, 안 준다는 것은 나도 안 갖는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건 사본이 아니다.
원본이다.
원본을 손님이 돌려주면 그건 무엇이 되는지 나는 정해 놓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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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개를 다시 큰 봉투에 넣었다.
넣고 서랍 아래 칸을 열었다.
거기 상자가 있다. 안 찾아간 편지 열두 통이 든 상자다.
나는 그 상자를 안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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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안 찾아간 게 아니다.
찾아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나는 서랍 위 칸을 열어서 큰 봉투를 거기 넣었다. 위 칸에는 도장하고 인주하고 여분 펜이 있다.
봉투가 들어가니 칸이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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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창고에서 나왔다.
앞치마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등으로 한 번 털었다.
창고에서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상자 옮기는 소리가 이십 분 동안 났는데, 이십 분이면 창고를 두 번 정리하고도 남는다.
"갔어?"
"갔어."
"…….."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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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주러 왔대."
"뭘."
"내가 쓴 거."
세림이 카운터로 왔다.
카운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다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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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통이야."
내가 말했다.
세림이 서랍 쪽을 봤다.
"거기 넣었어?"
"위 칸에."
"…….."
"왜 위 칸이야."
"아래는 다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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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해 동안 이 가게에 있었으니 아래 칸이 뭔지 안다.
"수진아."
"응."
"그거 네 거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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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림을 봤다.
"응."
"근데 왜 받았어."
"…….."
"안 받으면 저 사람이 갖고 가."
세림이 앞치마 끈을 고쳐 맸다.
"갖고 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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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을 안 했다.
세림이 더 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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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문을 닫았다.
세림이 가방을 메고 나가기 전에 카운터에 종이를 놓았다.
어제 그 종이다. 백 그램이고 접힌 자리가 하나다.
"오늘도 한 줄만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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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안 폈다.
"두 줄이 됐네."
"응."
"…….."
"뭐 썼는지 안 물어봐?"
"안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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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웃었다.
"물어봐도 되는데."
"…….."
"어제는 안 물어봐서 좋았어?"
"좋았어."
세림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오늘은 좀 물어봐 줬으면 했고."
"안 물어."
내가 말했다.
"물어보면 네가 대답하고, 대답하면 그게 항목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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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종이를 도로 집었다.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거 좀 그만해."
"뭘."
"그 말."
세림이 가방을 멨다.
"어제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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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혔다.
나는 카운터를 닦고 불을 껐다.
끄기 전에 서랍 위 칸을 한 번 열었다.
봉투가 거기 있었다. 도장하고 인주 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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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랍을 닫았다.
닫고 잠갔다.
열쇠는 카운터 밑 못에 걸려 있다. 여덟 해 동안 거기 있었고 한 번도 안 썼다.
이 서랍을 잠근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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