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열네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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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가게에 나왔다.
문을 안 열고 안에만 있었다. 셔터를 반만 올리면 밖에서 보기에는 닫힌 것과 같다.
카운터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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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홉 시에 나왔다.
일요일에 여기 나온 것은 여덟 해 동안 두 번이고 두 번 다 예식장 축사 때문이었다. 오늘은 축사가 없다.
어제 서랍을 잠그고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잤다. 자고 일어나서 다시 밥을 먹었다.
그 사이에 서랍 생각을 몇 번 했는지는 안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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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밑 못에서 열쇠를 뺐다.
어제 처음 걸었다. 그 전에는 못에만 걸려 있었고 손이 간 적이 없다.
서랍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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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봉투가 도장 옆에 있었다.
꺼내서 카운터에 놓고 열네 개를 다 꺼냈다.
두 줄로 놓았다. 일곱 개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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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모른다.
겉면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때 그렇게 드렸고,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안 적었다.
두께로는 안 된다. 두꺼운 것이 나중 것이라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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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에서부터 집었다.
풀칠 자리를 마른 데부터 벌렸다. 이재가 하던 대로 했다. 손톱으로 뜯으면 종이가 상한다.
한 장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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폈다.
내 글씨였다.
여덟 달 전에 쓴 것이고 그 뒤로 한 번도 안 봤다. 첫 줄을 읽는데 다음 줄이 안 떠올랐다.
내가 쓴 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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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정류장에 서 있었습니다.`
`비가 왔고 우산이 하나였습니다.`
`당신은 우산을 이쪽으로 기울였고 그래서 당신 왼쪽 어깨가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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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줄이었다.
내가 그때 항목 세 개로 세 줄을 만들었다.
나는 그 세 번째 줄을 두 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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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인 쪽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재가 준 것에는 그런 게 없었다. 정류장, 비, 우산 하나. 세 낱말뿐이었다.
왼쪽 어깨는 내가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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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종이를 옆에 놓고 다음 것을 열었다.
두 번째로 집은 것은 다섯 줄이었다. 세 번째는 여덟 줄. 네 번째는 넉 줄.
순서를 모르는 채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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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그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시계를 봅니다.`
`몇 시인지 보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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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이라는 말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이 말은 물건에 쓰는 말인데, 사람한테 쓰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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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 앞에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앞에 있었다는 것과 넣었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저는 그 차이를 여덟 해 동안 손님들한테 설명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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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에 빈 줄이 하나 있었다.
가운데쯤이고 앞뒤로 글이 있다. 다섯 번째 것이었다.
그가 이 줄에서 손이 떨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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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빈 줄을 한참 봤다.
비어 있는 자리라 볼 것이 없는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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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과 뒷줄 사이가 한 줄 반쯤 떠 있었다.
한 줄을 비우면 대개 딱 한 줄이 뜬다. 한 줄 반이 뜬 것은 쓰다가 손을 뗐다가 다시 댔다는 뜻이다.
그때 내가 뭘 쓰려고 했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는 것을 종이는 안 적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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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에 국숫집이 나왔다.
`고춧가루를 두 번 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넣고 손목을 한 번 더 칩니다.`
내가 그걸 왜 편지에 넣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준 것에 국숫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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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에는 신발이 나왔다.
`양말이 발가락 쪽부터 젖었습니다.`
`차가운 게 아니라 미지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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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에는 버스 번호가 있었다.
`육십일 번이 먼저 왔고 저는 안 탔습니다.`
육십일 번이 그 노선에 있는지 나는 확인한 적이 없다. 그때 그냥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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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통에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 중간에서 가방이 난간에 걸렸습니다.`
`걸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적지 않겠습니다.`
그건 세림이 본 것이고 세림한테 들은 것이다. 이재가 준 것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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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에는 삼백 원이 있었다.
`삼백 원을 대신 넣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못 봤습니다.`
두 줄이 그것뿐이고 그 뒤가 없다. 내가 그때 뒤를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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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부터 열둘까지는 짧았다.
세 줄, 네 줄, 세 줄, 다섯 줄이었다. 그 무렵에 그가 항목을 두 개씩 줬고 나는 그것을 늘리지 않았다.
늘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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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에 손목이 나왔다.
`가죽 줄이었습니다.`
`구멍이 다섯인데 세 번째를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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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두 줄에서 손을 멈췄다.
구멍이 다섯이고 세 번째라는 것을 나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이재가 준 것에는 손목시계가 없었다. 손목시계는 십 년 전 편지에 있었고 그 편지는 엄마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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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그날 거기 없었다.
없는 사람이 쓴 한 줄이 십 년을 지나 내 손으로 다시 나왔다. 나오면서 구멍이 다섯 개 붙었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내가 붙였다.
세 번째라는 것도 내가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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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는 이 편지를 읽었다.
읽고 이틀 뒤에 읽었다고 했다. 읽고 나서 다음 것을 부탁했고 그다음 것도 부탁했다.
읽으면서 아니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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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를 폈다.
`오늘은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했습니다.`
한 줄이 더 있었다.
`정하는 것도 대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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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것이었다.
항목 없이 쓴 것.
그가 몇 번째라고 안 말했는데 열네 개를 다 읽고 나니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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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네 장을 카운터에 늘어놓았다.
세로로 두 줄, 일곱 장씩.
순서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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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를 한 장 꺼냈다.
거기 나온 것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정류장` `비` `우산` `왼쪽 어깨` `시계` `가죽 줄` `구멍 다섯` `세 번째 구멍` `반송` `우체통` `빈 줄` `고춧가루` `손목` `양말` `발가락` `미지근` `육십일 번` `버스` `국숫집` `계단` `삼백 원` `봉투` `풀칠` `소인` `이월`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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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데 이십 분이 걸렸다.
한 통을 다시 열고 적고, 넣고, 다음 통을 열었다. 열네 번 그렇게 했다.
같은 것이 두 번 나오면 안 적었다. 우산은 세 통에 나왔는데 한 번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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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개였다.
한 통에 하나씩은 아니었다. 어떤 통에는 넷이 있고 어떤 통에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스물여섯 개를 다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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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있는 것이 열아홉이었다.
우산, 시계, 줄, 봉투, 종이 같은 것. 손에 잡히는 것들이다.
나머지 일곱은 시간이거나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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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스물여섯 개 옆에 아무것도 안 적었다.
손님 것이면 여기서 한 번 더 한다. 이게 뭘 뜻하는지 손님이 말하게 하고, 말한 것을 옆에 짧게 적는다. 그래야 나중에 문장이 된다.
오늘은 안 했다.
옆에 적을 사람이 나뿐이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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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뒤집어서 아무것도 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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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가 넘었다.
밥을 안 먹었다. 안 먹은 걸 한 시가 지나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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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쯤에 셔터 밖으로 사람이 지나갔다.
일요일 오후라 골목에 사람이 적다. 그 발소리가 지나가고 나서 한참 조용했다.
나는 그동안 이면지를 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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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 열네 장을 도로 넣었다.
봉투 하나에 한 장씩이다. 순서를 모르니 순서대로 안 넣었다.
넣다가 다섯 번째 것에서 멈췄다.
빈 줄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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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 따로 뺐다.
빼서 카운터에 놓았다.
놓고 십 분쯤 있다가 도로 넣었다.
넣으면서 봉투를 뒤집어 봤다. 뒷면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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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봉투에 열네 개를 다 담았다.
서랍 위 칸에 넣었다. 도장 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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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를 접었다.
접어서 어디에 넣을지 정하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었다.
서랍 아래 칸에는 안 넣었다. 거기는 편지가 든 데다.
위 칸에도 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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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앞치마는 못에 걸려 있다. 여기 넣으면 내일 아침에 앞치마를 맬 때 손에 걸린다.
그건 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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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마저 내렸다.
내리고 열쇠를 못에 걸었다.
걸고 나서 그 못을 한 번 봤다.
서랍은 안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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