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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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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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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앞치마를 매다가 손에 걸렸다. 주머니에 접어 넣은 이면지다. 어제 넣고 잊었다. 꺼내서 카운터에 폈다. --- 스물여섯 개가 두 줄로 적혀 있었다. 밑에 내가 그은 선이 있고 선 위가 열아홉, 아래가 일곱이다. 위는 만질 수 있는 것이고 아래는 시간이거나 숫자다. --- 나는 그 선을 봤다. 어제 그 선을 언제 그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스물여섯 개를 다 적고 나서 그었을 텐데, 긋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없다. 손이 그었다. --- 위쪽부터 다시 봤다. `우산` 우산은 만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우산은 십 년 전 것이고 지금 없다. 세림 것이었고 세림도 지금은 안 갖고 있다.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 `반송` 반송은 도장이다. 종이에 찍혀 있고 손톱으로 긁으면 잉크가 안 묻어난다. 이재가 그것을 엄지로 세 번 문질렀다. 그러면 만질 수 있는 쪽이다. 그런데 반송은 도장이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 `빈 줄` 이건 어느 쪽인가. 종이는 만져진다. 빈 줄은 종이의 한 부분이니 만져진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빈 줄에서 만져지는 것은 종이지 빈 줄이 아니다. --- 나는 선 위에서 세 개를 지웠다. 지우고 아래로 옮기려다 손을 멈췄다. 아래도 아니다. --- 세 번째 칸을 만들면 된다. 만들면 되는데 뭐라고 이름을 붙일지 모르겠다. 이름이 없으면 칸이 아니고,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내가 붙인 것이 된다. 손님한테는 이럴 때 묻는다. 이건 보신 겁니까 들으신 겁니까. 그러면 손님이 고르고 나는 고른 대로 적는다. 여기서는 고를 사람이 나뿐이다. --- `사흘` 이건 아래에 적었다. 시간이니까. 그런데 사흘은 이월 십육일과 십구일 사이다. 그 사흘은 노트에서 네 장이 뜯긴 자리이고, 뜯긴 자국은 손끝에 걸린다. 톱니가 고르지 않았다. ---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뒤집으면 백지다. 어제도 뒤집어서 아무것도 안 적었다. 오늘도 안 적었다. --- 다시 뒤집어서 선을 봤다. 이 선을 그은 사람이 나다. 어제는 스물여섯 개를 적은 것까지가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누는 것은 세는 것 다음에 오는 일이라 안 셌다. 세는 것과 나누는 것은 다른 일이다. --- 세림이 열 시에 왔다. 앞치마를 매면서 카운터를 봤다. "뭐야 그거." "어제 적은 거." "…….." "뭘 적었는데." --- 나는 종이를 밀지 않았다. "편지에 나온 것들." "몇 개야." "스물여섯." 세림이 그 말만 듣고 더 안 물었다. --- 세림이 진열대로 갔다. 가서 파란 줄부터 셌다. 소리를 내어 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선 위의 열아홉을 다시 세었다. 열아홉이 맞았다. --- 세림은 세면서 나누지 않는다. 흰 큰 것 스물넷, 흰 작은 것 스물아홉. 칸이 정해져 있으니 나눌 일이 없다. 칸을 만든 사람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 두 시에 이재가 왔다. 토요일과 같은 시각이다. 이번에는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세림이 진열대에서 돌아섰다가 안쪽으로 갔다. 창고 문을 반쯤 열어 두고 들어갔다. --- 이재가 손님 의자에 앉았다. 토요일에는 안 앉았다. "읽으셨습니까." "읽었습니다." --- "열네 통 다요." "다요." "…….." "어제요?" "어제 일요일에요." ---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 "왜요." "토요일에 안 여신다고 하셨으니까요." --- 나는 카운터의 종이를 봤다. "이재 씨." "네." "열네 통에 나온 것들을 적어 봤습니다." "…….." "몇 개입니까." "스물여섯입니다." --- 이재가 종이를 안 봤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중에 제가 드린 게 몇 개입니까." --- 나는 그 질문을 받았다. 세어 본 적이 없다. 어제 스물여섯 개를 적으면서 어느 게 그의 것이고 어느 게 내 것인지 나누지 않았다. 나는 다른 걸 나눴다. "안 세어 봤습니다." "…….." "세어 보시면 적을 겁니다." --- 가게가 조용했다. 안쪽에서 상자 옮기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아까부터 계속 난다. "이재 씨." "네." "왜 오셨습니까." --- "오늘 말입니까." "작년 겨울에요." 내가 말했다. "돌아오신 지 넉 달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여기 오셨습니다." --- 이재가 무릎에 손을 놓았다. "제가 지워졌는지 보려고 왔습니다." --- 나는 그 말을 들었다. "…….." "어디서요." "수진 씨 쪽에서요." --- "그걸 어떻게 봅니까." "물어보면 됩니다."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물어보면 수진 씨가 대답을 하시고, 대답은 물어본 사람 쪽으로 옵니다." --- "…….." "그래서요." "편지를 부탁드렸습니다." 이재가 손을 무릎에서 뗐다. "항목만 드리면 나머지는 수진 씨가 쓰십니다. 쓰신 것에는 제가 안 드린 게 들어갑니다." --- "그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 나는 카운터를 짚고 있었다. "열네 통에 그게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 "많았습니까." "많았습니다." --- 이재가 처음으로 종이를 봤다. 카운터에 펴진 이면지다. 글자가 그쪽에서 거꾸로 보였을 것이다. "수진 씨." "네." "제가 열네 번 다 읽고 한 번도 아니라고 안 했습니다." --- "압니다." "왜 안 했는지 여쭤보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안 했다. --- 이재가 먼저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그 문장이 없어집니다." "…….." "없어지면 그 자리에 뭐가 옵니까." "아무것도 안 옵니다." --- 나는 그 대답을 받았다. "틀린 게 남는 게 낫습니까." "저한테는요."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수진 씨한테는 아닐 겁니다." --- "이재 씨." "네." "틀렸다고는 안 하셨습니다." 이재가 잠깐 있었다. "안 했습니다." "…….." "그럼 뭡니까." "제가 기억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 "어느 쪽이 맞습니까." "모릅니다." 이재가 말했다. "제 것도 십 년 됐습니다." --- 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배달 오토바이는 이 골목에서 속도를 못 낸다.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가 끊겼다. 나는 그 소리가 다 지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 "이재 씨." "네." "저는 그동안 이재 씨한테 편지를 쓴 게 아니었습니다." --- 이재가 나를 봤다. "…….." "누구한테 쓰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쓰는 동안에는 이재 씨한테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재가 일어서지 않았다. 앉은 채로 카운터 위를 봤다. 이번에는 종이가 아니라 그 옆의 빈 자리를 봤다. "수진 씨." "네." "열다섯 번째는 안 부탁드립니다." --- "압니다." "…….." "압니다, 라고 하시네요." "네." --- 이재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님들은 대개 안 밀어 넣는다. "수진 씨." "네." "극장이 다음 주에 엽니다." --- "다음 달이라고 하셨습니다." "당겨졌습니다." 이재가 문 쪽으로 갔다. "오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세림이 창고에서 나왔다.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나왔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 이면지가 그대로 펴져 있었다. 스물여섯 개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위에서 세 개가 지워져 있고, 지운 것을 아래로 안 옮겼다. 나는 그 세 개를 다시 위에 적지 않았다. --- 세림이 옆에 왔다. "수진아." "응." "저 사람 뭐래." --- "자기가 지워졌는지 보러 왔대." 세림이 카운터에 손을 올렸다. "봤대?" "봤대." "…….." "뭐라고 했는데." --- "많았대." 세림이 그 말을 두 번 듣지 않았다. 한 번 듣고 진열대로 갔다. --- 나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카운터에 편 채로 두고 오후 손님을 받았다. 손님이 봉투를 고르는 동안 그 종이가 카운터 한쪽에 있었고, 나는 그걸 치우지 않았다. 손님이 그것을 한 번 봤다. 보고 아무것도 안 물었다. 물었으면 뭐라고 답했을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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