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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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앞치마를 매다가 손에 걸렸다.
주머니에 접어 넣은 이면지다. 어제 넣고 잊었다.
꺼내서 카운터에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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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개가 두 줄로 적혀 있었다.
밑에 내가 그은 선이 있고 선 위가 열아홉, 아래가 일곱이다.
위는 만질 수 있는 것이고 아래는 시간이거나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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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선을 봤다.
어제 그 선을 언제 그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스물여섯 개를 다 적고 나서 그었을 텐데, 긋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없다.
손이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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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다시 봤다.
`우산`
우산은 만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우산은 십 년 전 것이고 지금 없다. 세림 것이었고 세림도 지금은 안 갖고 있다.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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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
반송은 도장이다. 종이에 찍혀 있고 손톱으로 긁으면 잉크가 안 묻어난다. 이재가 그것을 엄지로 세 번 문질렀다.
그러면 만질 수 있는 쪽이다.
그런데 반송은 도장이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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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줄`
이건 어느 쪽인가.
종이는 만져진다. 빈 줄은 종이의 한 부분이니 만져진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빈 줄에서 만져지는 것은 종이지 빈 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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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 위에서 세 개를 지웠다.
지우고 아래로 옮기려다 손을 멈췄다.
아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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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칸을 만들면 된다.
만들면 되는데 뭐라고 이름을 붙일지 모르겠다. 이름이 없으면 칸이 아니고,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내가 붙인 것이 된다.
손님한테는 이럴 때 묻는다. 이건 보신 겁니까 들으신 겁니까. 그러면 손님이 고르고 나는 고른 대로 적는다.
여기서는 고를 사람이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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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이건 아래에 적었다. 시간이니까.
그런데 사흘은 이월 십육일과 십구일 사이다. 그 사흘은 노트에서 네 장이 뜯긴 자리이고, 뜯긴 자국은 손끝에 걸린다.
톱니가 고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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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뒤집으면 백지다. 어제도 뒤집어서 아무것도 안 적었다.
오늘도 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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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뒤집어서 선을 봤다.
이 선을 그은 사람이 나다.
어제는 스물여섯 개를 적은 것까지가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누는 것은 세는 것 다음에 오는 일이라 안 셌다.
세는 것과 나누는 것은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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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열 시에 왔다.
앞치마를 매면서 카운터를 봤다.
"뭐야 그거."
"어제 적은 거."
"…….."
"뭘 적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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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밀지 않았다.
"편지에 나온 것들."
"몇 개야."
"스물여섯."
세림이 그 말만 듣고 더 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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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진열대로 갔다.
가서 파란 줄부터 셌다. 소리를 내어 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선 위의 열아홉을 다시 세었다.
열아홉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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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세면서 나누지 않는다.
흰 큰 것 스물넷, 흰 작은 것 스물아홉. 칸이 정해져 있으니 나눌 일이 없다.
칸을 만든 사람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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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에 이재가 왔다.
토요일과 같은 시각이다. 이번에는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세림이 진열대에서 돌아섰다가 안쪽으로 갔다. 창고 문을 반쯤 열어 두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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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손님 의자에 앉았다.
토요일에는 안 앉았다.
"읽으셨습니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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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통 다요."
"다요."
"…….."
"어제요?"
"어제 일요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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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
"왜요."
"토요일에 안 여신다고 하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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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운터의 종이를 봤다.
"이재 씨."
"네."
"열네 통에 나온 것들을 적어 봤습니다."
"…….."
"몇 개입니까."
"스물여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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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종이를 안 봤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중에 제가 드린 게 몇 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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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질문을 받았다.
세어 본 적이 없다. 어제 스물여섯 개를 적으면서 어느 게 그의 것이고 어느 게 내 것인지 나누지 않았다. 나는 다른 걸 나눴다.
"안 세어 봤습니다."
"…….."
"세어 보시면 적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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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가 조용했다.
안쪽에서 상자 옮기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아까부터 계속 난다.
"이재 씨."
"네."
"왜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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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입니까."
"작년 겨울에요."
내가 말했다.
"돌아오신 지 넉 달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여기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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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무릎에 손을 놓았다.
"제가 지워졌는지 보려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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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들었다.
"…….."
"어디서요."
"수진 씨 쪽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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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봅니까."
"물어보면 됩니다."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물어보면 수진 씨가 대답을 하시고, 대답은 물어본 사람 쪽으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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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요."
"편지를 부탁드렸습니다."
이재가 손을 무릎에서 뗐다.
"항목만 드리면 나머지는 수진 씨가 쓰십니다. 쓰신 것에는 제가 안 드린 게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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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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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운터를 짚고 있었다.
"열네 통에 그게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
"많았습니까."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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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처음으로 종이를 봤다.
카운터에 펴진 이면지다. 글자가 그쪽에서 거꾸로 보였을 것이다.
"수진 씨."
"네."
"제가 열네 번 다 읽고 한 번도 아니라고 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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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왜 안 했는지 여쭤보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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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먼저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그 문장이 없어집니다."
"…….."
"없어지면 그 자리에 뭐가 옵니까."
"아무것도 안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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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대답을 받았다.
"틀린 게 남는 게 낫습니까."
"저한테는요."
이재가 그렇게 말했다.
"수진 씨한테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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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씨."
"네."
"틀렸다고는 안 하셨습니다."
이재가 잠깐 있었다.
"안 했습니다."
"…….."
"그럼 뭡니까."
"제가 기억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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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맞습니까."
"모릅니다."
이재가 말했다.
"제 것도 십 년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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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배달 오토바이는 이 골목에서 속도를 못 낸다.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가 끊겼다.
나는 그 소리가 다 지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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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씨."
"네."
"저는 그동안 이재 씨한테 편지를 쓴 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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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나를 봤다.
"…….."
"누구한테 쓰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쓰는 동안에는 이재 씨한테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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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일어서지 않았다.
앉은 채로 카운터 위를 봤다. 이번에는 종이가 아니라 그 옆의 빈 자리를 봤다.
"수진 씨."
"네."
"열다섯 번째는 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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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
"압니다, 라고 하시네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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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님들은 대개 안 밀어 넣는다.
"수진 씨."
"네."
"극장이 다음 주에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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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이라고 하셨습니다."
"당겨졌습니다."
이재가 문 쪽으로 갔다.
"오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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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세림이 창고에서 나왔다.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나왔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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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가 그대로 펴져 있었다.
스물여섯 개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위에서 세 개가 지워져 있고, 지운 것을 아래로 안 옮겼다.
나는 그 세 개를 다시 위에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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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옆에 왔다.
"수진아."
"응."
"저 사람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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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지워졌는지 보러 왔대."
세림이 카운터에 손을 올렸다.
"봤대?"
"봤대."
"…….."
"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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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대."
세림이 그 말을 두 번 듣지 않았다.
한 번 듣고 진열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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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카운터에 편 채로 두고 오후 손님을 받았다.
손님이 봉투를 고르는 동안 그 종이가 카운터 한쪽에 있었고, 나는 그걸 치우지 않았다.
손님이 그것을 한 번 봤다. 보고 아무것도 안 물었다.
물었으면 뭐라고 답했을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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