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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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열한 시에 손님이 왔다.
마흔쯤 된 여자였고 들어와서 봉투를 안 봤다. 바로 카운터로 왔다.
"편지 하나 부탁드릴게요."
"앉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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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손님 의자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에 놓고 두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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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만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항목이요?"
"하고 싶은 말을 낱개로요. 문장이 아니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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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작년 여름에 병원에 같이 가 줬어요."
"…….."
"두 번째는요."
"제 결혼식에 안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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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오래 걸렸다.
여자가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올해 제 생일에 문자가 왔어요."
"…….."
"뭐라고요."
"'생일 축하해'요. 다섯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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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개를 적었다.
`작년 여름 병원` `결혼식에 안 옴` `생일 문자 다섯 글자`
적고 나서 여자를 봤다.
"어느 게 제일 말하기 쉽습니까."
"세 번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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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세 번째부터 쓰겠습니다."
나는 새 종이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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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줄이 안 나왔다.
여덟 해 동안 첫 줄이 안 나온 적이 없다. 항목이 셋이면 셋 중 하나를 골라 앞에 놓고 그다음은 손이 한다.
손이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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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이 종이에 닿아 있었다.
닿아 있으면 잉크가 번진다. 오래 대고 있으면 점이 하나 생긴다.
점이 생겼다.
나는 그 점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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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기다리는 동안 나는 대개 손을 쉬지 않는다. 쓰는 중이라는 게 보이면 사람이 안 불안하다.
오늘은 손이 멈춰 있었고 여자가 그것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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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한 번 봤다.
`생일 축하해`
이 다섯 글자로 시작하려면 앞에 뭘 놓아야 하는지 나는 안다. 오늘 받았다고 쓰거나, 오래 못 봤다고 쓰거나, 다섯 글자였다고 쓰면 된다.
셋 다 쓸 수 있다.
셋 중에 어느 것도 내가 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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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여자가 불렀다.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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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새 면에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 번째부터 써 보려고 했다. 결혼식에 안 왔다는 것.
`제 결혼식에`
거기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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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누구인지 나는 안다. 이 여자다.
그런데 이 문장을 쓰는 사람은 나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번도 그 생각을 안 했다. 손님이 «제»라고 하면 나는 «제»라고 적었고, 적으면 그 «제»는 손님의 것이 됐다.
오늘은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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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놓았다.
"손님."
"네."
"오늘은 못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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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나를 봤다.
"왜요."
"…….."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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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더 말씀드려야 돼요?"
"아닙니다."
"…….."
"항목이 부족해요?"
"셋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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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가방끈에서 손을 뗐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나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손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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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가방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저 이런 데 처음 와요."
"…….."
"오는 데 두 달 걸렸어요."
나는 그 말을 들었다.
"…….."
"제가 오늘 못 쓰는 겁니다. 다른 데서는 됩니다."
"다른 데가 어딘데요."
"…….."
"이 동네에는 없습니다."
여자가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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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그러면 선생님이에요?"
"그렇습니다."
"…….."
"아프세요?"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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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 두 장을 그 앞에 놓았다.
하나는 항목 셋을 적은 것이고 하나는 반 줄만 쓴 것이다.
"이건 가져가십시오."
"이걸요?"
"손님이 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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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것을 집었다.
집어서 접었다.
"돈은요."
"안 받습니다."
"…….."
"쓰다 만 것도 값이 있지 않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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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잠깐 서 있었다.
"선생님."
"네."
"저 사실 뭐라고 쓸지 정하고 왔어요."
나는 그 말을 들었다.
"…….."
"근데 정하고 오면 안 되는 거였죠."
"그건 아닙니다."
"…….."
"정하고 오시는 분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
"네."
"다음 주에 다시 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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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질문을 받았다.
"…….."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게 문 닫는다는 뜻이에요?"
"그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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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와 볼게요."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 골목 쪽으로 발소리가 났다. 오른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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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진열대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앞치마 끈에 손을 얹은 채로 서 있었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카운터를 정리했다.
정리할 게 없어서 펜을 통에 넣고 종이를 한쪽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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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아."
"응."
세림이 왔다.
"저 손님 그냥 갔어?"
"응."
"…….."
"값 안 받았어?"
"안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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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더 안 물었다.
물으려다 안 물은 게 아니라 물을 게 없어서 안 물은 얼굴이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다가 진열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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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다가 한 번 섰다.
"수진아."
"응."
"어제 그 사람이 뭐라고 했다고 했지."
"…….."
"많았대."
"응."
세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나는 대답을 안 했다.
세림도 답을 기다리지 않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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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손님이 둘 더 왔다.
하나는 봉투를 샀고 하나는 겉봉 이름 두 장을 맡겼다. 이름 두 장은 십 분에 썼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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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봉은 써진다.
이름은 손님 것이고 나는 옮기기만 한다. 옮기는 것과 만드는 것이 다르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여덟 해 동안 그 둘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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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에 서랍 아래 칸을 열었다.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봉투를 다 꺼내서 카운터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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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였다.
세어 본 적이 없다. 여덟 해 동안 하나씩 늘 때마다 한 개 늘었다고만 알았고, 다 꺼내서 한 번에 센 적은 없다.
한 줄로 놓으니 카운터 반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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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씩 만졌다.
두께가 다 다르다. 한 장짜리가 여섯이고 두 장짜리가 넷이고 세 장이 둘이다.
제일 두꺼운 것은 사 년 전 것이다. 그 손님은 열두 줄을 부탁했고 열두 줄은 한 장에 안 들어간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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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면에 이름이 있는 것이 일곱이었다.
없는 것이 다섯이다.
이름이 있는 것은 받는 사람을 정하고 가신 분들이고, 없는 것은 안 정하고 가신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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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름 있는 일곱을 왼쪽에 놓았다.
없는 다섯을 오른쪽에 놓았다.
놓고 나서 오른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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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 것이 거기 있다.
어머니 것도 거기 있다.
어머니 것은 겉면에 `오세림` 세 자가 있으니 왼쪽이어야 하는데, 그건 어머니가 세림에게 보낸 것이고 세림이 여기 둔 것이라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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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가운데에 놓았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자리다.
놓고 나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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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다섯, 하나.
합이 열셋이 됐다.
열두 개인데 열셋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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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세었다.
왼쪽 일곱, 오른쪽 넷, 가운데 하나.
열둘이 맞았다. 아까 오른쪽을 다섯으로 셌는데 그중 하나가 가운데로 갔다.
옮겨 놓고 옮긴 것을 안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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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진열대에서 소리를 내어 셌다.
흰 큰 것 스물넷. 흰 작은 것 스물아홉.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카운터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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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무더기가 있었다.
가운데 것은 한 개다.
한 개짜리 무더기를 무더기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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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면지에 선을 하나 그었다.
오늘은 카운터에 무더기를 셋 만들었다.
둘 다 내가 했고, 둘 다 아무도 안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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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운데 것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옮기고 나서 다시 가운데로 가져왔다.
두 번 그렇게 하고 가운데에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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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문을 닫았다.
열두 개를 상자에 도로 담았다. 담을 때 순서를 안 지켰다. 어차피 상자에 들어가면 다 섞인다.
뚜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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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넣기 전에 상자를 한 번 들어 봤다.
가벼웠다.
여덟 해 치가 이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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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고 서랍을 닫았다.
닫고 카운터 밑을 봤다.
열쇠가 못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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