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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5

빈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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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아홉 시 반에 왔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렀다. 들어와서 앞치마를 매고, 진열대의 편지지를 앞뒤로 뒤집었다. 어제 자기가 잘못 올려둔 봉투 상자를 내려서 원래 칸에 넣었다. 그 일에 삼 분쯤 걸렸다. "나 어제 좀 이상했지." "응." "응." 세림은 그러고 나서 계산기를 켰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덟 해를 같이 일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는 것을 몇 개 만들어 두었다. 세림의 부모 이야기, 내가 시나리오를 그만둔 해, 세림이 우리 집에서 살던 두 해. 목록에 하나가 늘었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점심 뭐 먹을 거야." "몰라." "국수?" "응." 건너편 국숫집은 열두 시가 넘으면 자리가 없다. 우리는 열한 시 사십 분에 갔다. 세림은 늘 고춧가루를 두 번 넣는다. 그날은 한 번 넣고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들어서 한 번 더 넣었다. "뜨겁다." "응." "너 옛날에 이거 못 먹었잖아. 뜨거운 거." "지금도 못 먹어." "근데 왜 먹어." "식으면 불어." 세림이 웃었다. 웃고 나서 국물을 한 숟갈 떴는데 입에 넣지는 않았다. 우리는 나오면서 계산을 서로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전에 정해진 순서가 있어서다. 홀수 날은 세림이 낸다. 그날은 짝수였다.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세림이 반 걸음 뒤에서 걸었다. 평소에는 옆에서 걷는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한 시에 온 손님은 사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들어와서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앉으시라고 했더니 앉았고, 앉고 나서 코트를 벗지 않았다. "편지 한 통 쓰려고요. 아버지한테요." "네." "이십 년 됐어요. 연락 끊긴 지." 나는 견본지를 꺼냈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십니까." "그게……." 남자는 손바닥을 무릎에 두 번 문질렀다. "아버지가 지금 요양병원에 계세요. 작년에 쓰러지셨고, 사람은 알아보는데 글은 못 읽으세요." "못 읽으시면요." "간병인이 읽어준대요." 나는 펜을 놓았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이 편지는 누구 목소리로 갑니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쓰고, 간병인이 읽습니다. 손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남자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제가 읽어드리면 되는데요." "그럼 편지가 왜 필요하십니까." "가서 그 말을 못 하니까요." 나는 견본지를 앞으로 밀었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이 일을 대신 말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못 하는 사람 대신 종이가 말한다. 종이는 떨지 않고, 중간에 끊기지 않고, 상대가 문을 닫아도 남는다. 이 손님은 종이도 남이 읽는다. 쓰는 사람도 남이고 읽는 사람도 남이었다. 가운데 두 사람만 없었다. "짧게 쓰겠습니다." "짧아도 돼요?" "간병인이 읽습니다. 긴 편지는 읽는 사람이 힘듭니다." 남자가 웃었다. 웃는 건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항목을 받았다. 세 개였다. 자전거, 국민학교 앞 문방구, 아버지가 한 번 울었던 날. 세 번째 항목에서 손이 멈췄다. "이건 언제 일입니까." "제가 열둘이요." "아버님이 그때 우신 걸 아십니까." "봤어요." "보신 걸 아버님이 아십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항목을 편지에 넣지 않았다. 대신 앞의 두 개로 다섯 줄을 썼다. 자전거 안장 높이를 세 번 고쳐준 이야기와, 문방구 앞에서 십오 분을 기다린 이야기였다. 남자는 그것을 읽고 접었다. "세 번째 건요." "안 넣었습니다." "왜요." "그건 손님이 직접 말씀하실 자리 같아서요." 남자는 편지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나갔다. 나갈 때도 코트는 벗지 않은 채였다. --- 저녁에 이재의 종이를 폈다. 우체국 앞, 화요일. 반송. 첫 줄은 쓸 수 있었다. 시청 옆 우체국은 지금도 있다. 계단이 다섯 칸이고 자동문이 무거워서 어깨로 밀어야 열린다. 화요일이면 오전에 사람이 적다. 수진 씨에게. 화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우체국 자동문이 무거워서 나는 어깨로 밀었습니다. 안에 사람이 셋 있었고 창구는 두 개가 열려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썼다. 그다음 줄에 반송을 넣어야 했다. 반송은 사실이다. 사실인데 나는 그 사실의 앞뒤를 모른다. 누가 무엇을 어디로 보냈고 왜 돌아왔는지 하나도 모른다. 첫 번째 규칙이 있다. 의뢰인의 사실을 지어내지 않는다. 여덟 해 동안 이 규칙 때문에 손님과 다툰 적이 세 번 있다. 세 번 다 손님이 원하는 문장이 사실보다 예뻤다. 나는 세 번 다 안 썼다.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 안 쓴다. 항목이 두 개인데 한 개만 쓰면 손님이 돈을 덜 낸다. 그건 내가 손해 보는 일이지 손님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둘, 흐리게 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다, 정도로. 여덟 해 동안 제일 많이 쓴 방법이고 제일 나쁜 방법이다. 흐린 문장은 읽는 사람이 알아서 채운다. 채운 걸 나중에 내가 쓴 줄 안다. 셋, 자리를 남긴다. 나는 그 줄을 비웠다. 문장을 쓰다 만 게 아니라, 한 줄을 통째로 띄우고 그다음 문장을 이었다. 편지 가운데 흰 줄이 하나 생겼다. 팔십 그램은 얇아서 뒷장이 비친다. 빈 줄 자리에는 비칠 것도 없었다. 우리 가게 이름이 여백이다. 간판을 달 때는 그냥 글자가 예뻐서 골랐다. 봉투에 넣고 덮었다. 풀칠은 안 했다. --- 이재는 여덟 시에 왔다. 스위치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날은 내가 형광등 두 개를 다 켜 두었는데도 그냥 지나쳤다. "한 통입니다." 봉투를 올렸다. 그가 손을 뻗었다. "이재 씨." "네." "두 번째 항목은 못 썼습니다." 그는 봉투를 집어 든 채로 서 있었다. "반송이 무슨 뜻입니까." 문이 닫혀 있어서 밖의 소리가 안 들어왔다. 가게 안에서 소리가 나는 건 냉장고뿐이었다. 냉장고가 한 번 돌고 멈췄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손님이 말을 못 하면 기다리면 된다. 여덟 해 동안 그렇게 했다. 그날도 그렇게 했는데, 그날은 기다리는 쪽이 더 오래 서 있었다. 이재가 봉투를 열었다. 풀칠을 안 해둔 게 그날 처음으로 걸렸다. 그는 편지를 꺼내 폈다. 읽지 않겠다던 사람이었다. 편지를 든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글자를 따라간 게 아니었다. 빈 줄에서 멈췄다. 거기서 오래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종이를 봤다. 종이가 조금 흔들렸다. 손이 떨린 게 아니라 숨 때문이었다. 그가 편지를 다시 접었다. 접은 자리를 손톱으로 누르지 않았다. "수진 씨." "네." "이 줄은 비워두세요." "다음 통에도요." "네." 그는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지퍼는 이번에 한 번에 올라갔다. 카운터에 새 항목 종이를 놓지 않았다. "다음은 사흘 뒤입니까." 그는 문 앞에서 멈췄다. 등이 보였다. "연락드릴게요." 문이 닫혔다. 사흘이라는 말은 그가 정한 것이었다. 사흘은 짧지도 길지도 않아서 좋았다. 사흘이면 나는 항목을 두 번 읽고 한 번 자고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연락드릴게요, 는 날짜가 없는 말이다. 나는 카운터를 닦고 형광등 두 개를 다 껐다. 끄고 나서 하나를 다시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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