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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8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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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류함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 열 시에 다시 열어서 세림의 종이를 꺼냈다. 뒤집힌 채였다. 뒤집어서 보려다가 손님이 들어와서 도로 넣었다. 손님은 봉투 두 장을 사서 나갔다. 삼십 초도 안 걸렸다. 열한 시에 또 꺼냈다. 이번에는 카운터에 올려놓고 커피를 탔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종이는 뒤집힌 채로 있었다. 컵을 씻고 돌아와서 나는 그것을 다시 서류함에 넣었다. 궁금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여덟 해 동안 나는 궁금한 걸 미루는 연습을 했다. 손님이 항목을 주면 그 자리에서 읽지 않는다. 손님이 나가고 나서 읽는다. 손님 앞에서 읽으면 얼굴이 움직이고, 얼굴이 움직이면 손님이 그다음 말을 고른다. 고른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건 손님한테 쓰는 방법이었다. 세림은 손님이 아니다. 열두 시 십 분에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 세 줄이었다. `열일곱 겨울, 현관 비밀번호` `졸업식 날 아침` `이천십육년 이월, 어머니가 준 봉투` 첫 줄은 안다. 세림이 우리 집에 들어온 날 엄마가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세림은 그걸 그 자리에서 외우지 않고 손등에 적었다. 엄마가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두 번째 줄도 안다. 졸업식 날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을 끓였고, 세림 몫이 따로 있었다. 세 번째 줄은 모른다. 이천십육년 이월이면 십 년 전이다. 그해 이월에 나는 스물둘이었고, 그 겨울에 편지를 한 통 받았고, 세림은 그때 이미 우리 집에서 나가 있었다. 엄마가 세림에게 봉투를 줬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세림의 글씨는 획이 곧고 끝이 짧다. 급하게 쓰면 받침이 흐려지는데 이 세 줄은 흐려진 데가 없었다. 세 번 이상 고쳐 쓴 글씨였다. --- 세림은 두 시에 왔다. 들어와서 내 얼굴을 봤다. 나는 종이를 카운터에 올려둔 채였다. "봤네." "응." "어때." "세 번째는 뭐야." 세림이 앞치마를 매다 말고 손을 내렸다. "그거 꼭 물어봐야 돼?" "항목이니까." "항목이면 안 물어도 되는 거 아니야? 너 항목만 받는다며." "항목이 뭔지는 알아야 써." 세림은 카운터 앞에 섰다. 앉지는 않았다. "봉투 하나 받았어. 어머니한테." "뭐가 들었는데." "돈." "얼마." "안 세어봤어." "그럼 어떻게 알아, 돈인지." "두께로 알아." 세림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웃지 않았다. 세림이 웃지 않는 얼굴은 잘 안 나온다. "왜 줬대." "안 물어봤어." "세림아." "나 그때 방 구하고 있었거든. 그 얘기 어머니한테 한 적 없어. 너한테만 했어." 나는 볼펜을 놓았다. "근데 어떻게 아셨을까." "…….." "수진아, 나 그거 물어보려고 십 년 걸렸어." 세림은 앞치마를 마저 맸다. 매고 나서 진열대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편지에 그거 쓸 거야?" "쓰라면 써." "쓰면 어머니가 대답할까." "모르겠어." "안 하실 거야." 세림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조금 더 서 있었다. 나갈 자리도 있었고 일할 자리도 있었는데 둘 다 안 갔다. "근데 안 하셔도 물어보긴 할 거야." --- 세 시에 온 손님은 삼십 대 여자였다. "파혼했다고 알리는 편지요. 그쪽 부모님께." "본인 부모님이 아니고요." "제 쪽은 알아요." 여자는 항목을 세 개 적어 왔다. 미리 적어 온 손님은 드물다. 날짜 하나, 예식장 취소 여부, 예단 반환 방식.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짧게 쓰겠습니다." "짧게요." 여자는 십오 분 만에 나갔다.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 그쪽에서 받으러 올 거예요." "여기로요?" "만나기 싫어서요." 편지는 여덟 줄이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 넣었다. 항목에는 없었지만 파혼 통지에는 관례적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다섯 시 반에 왔다. 삼십 대 중반이었고 정장 차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가게를 둘러봤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모르고 온 얼굴이었다. "봉투 맡겨져 있다고 해서요." 나는 봉투를 카운터에 올렸다. 남자는 받아서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를 손에 들고 무게를 재듯 잠깐 있었다. "여기 뭐 하는 데예요." "편지 써 드리는 곳입니다." "써 준다고요." "네." 남자가 봉투를 봤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 "이거 그 사람이 쓴 거예요?" 받는 사람에게 대필이라는 걸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게 두 번째 규칙이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이 질문을 열 번쯤 받았고, 열 번 다 같은 대답을 했다. 손님 편지라서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썼습니다." 그는 봉투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넣고 나서 한 번 눌렀다. "고맙습니다." 문이 닫혔다. 나는 카운터를 닦았다. 닦을 게 없는데 닦았다. --- 여섯 시에 엄마한테 전화했다. 두 번 만에 받았다. "수진아." "엄마, 물어볼 게 있어요." "밥은." "먹었어요. 엄마, 십 년 전에 세림이한테 뭐 주셨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뭘." "봉투요." "…….." "세림이가 방 구하는 거 엄마한테 말 안 했대요. 나한테만 했고요." 텔레비전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엄마가 끈 것이다. "수진아." "네." "장롱 상자 가져가라니까." "엄마." "이번 주에 와." 전화가 끊겼다. 나는 끊긴 화면을 한참 봤다. 엄마는 여덟 해 동안 내 질문을 피해 왔고, 피하는 방법은 늘 같았다. 다른 이야기를 얹는 것이다. 콜레스테롤, 재활용 요일, 아래층 사람. 오늘은 얹지 않았다. 얹을 게 없을 때 사람은 끊는다. --- 카운터에는 봉투가 두 개 남아 있었다. 받는 사람이 없는 것과 발신인이 없는 것. 세림의 종이는 이제 서류함이 아니라 카운터 위에 있었다.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오늘 아침까지 셋 다 안 열려 있었고, 지금은 하나가 열려 있다. 나는 이재의 봉투를 다시 들었다. 소인은 시청 앞 우체국 것이었다. 그 우체국은 두 번째 항목에 나온 곳이다. 그는 우체국 앞에서 무언가가 반송됐다고 적었고, 그저께 같은 우체국에서 이걸 부쳤다. 부칠 곳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제 쓴 세 번째 편지를 꺼냈다. 도서관 삼 층과 십일월과 빌려간 책이 든 봉투였다. 풀칠은 안 되어 있었다. 이걸 보내려면 주소가 있어야 한다. 발신인 칸을 다시 봤다. 인쇄된 칸 안이 하얬다. 나는 그 봉투를 내려놓고 서랍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십 년 전에 받은 편지였다. 서랍 제일 안쪽에 있었고, 봉투째 넣어둔 것이라 꺼낼 때 먼지가 묻어 나왔다. 봉투를 뒤집었다. 발신인 칸에 이름이 있었다. 강이재. 세 글자였다. 그 아래 주소가 있었다. 나는 그 주소를 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편지만 세 번 읽고 접어서 넣었다. 주소는 이 동네였다. 가게에서 걸어서 십오 분쯤 되는 곳이었다. 십 년 전에 그는 유학을 간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고, 그다음에 편지를 받았고, 편지에 적힌 주소를 보지 않았다. 봉투를 든 채로 나는 오늘 하루의 순서를 되짚었다. 세림의 종이를 열두 시 십 분에 열었다. 엄마에게 여섯 시에 전화했다. 이 봉투는 십 년 만에 뒤집었다. 먼저 열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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