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십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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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 남자 생각이 아침까지 남았다.
봉투를 받아서 안주머니에 넣고 한 번 눌렀다. 그러고 고맙습니다, 했다. 뭐가 고마웠는지는 모르겠다. 파혼 통지를 받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여덟 해 동안 나는 그 질문을 열 번쯤 받았고 열 번 다 대답을 안 했다. 손님 편지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문장은 손님을 지키는 문장이다. 대필인 걸 알면 받는 사람은 편지를 두 번 읽는다. 한 번은 내용으로 읽고 한 번은 누가 썼나로 읽는다. 두 번째 읽기는 대개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러니까 안 말하는 게 맞다.
그런데 어제는 그 남자가 그 봉투를 십 년쯤 갖고 다닐 것 같았다.
십 년 뒤에 그가 그걸 다시 꺼내서 읽고, 그 여자 글씨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그 여자가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게 싫었다.
싫다는 건 이유가 아니다. 규칙을 어긴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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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은 아홉 시 반에 왔다.
"나 다음 주 수요일에 어머니 뵈러 갈 거야."
"먼저 전화해."
"했어."
"뭐래."
"오라고 하셨어."
세림이 앞치마를 맸다.
"그날 너는 오지 마."
"왜."
"네가 있으면 어머니가 나한테 대답 안 하실 거야."
맞는 말이었다. 엄마는 사람이 둘일 때 덜 말한다.
"편지는 어떡할 거야."
"그거 됐어."
"됐다니."
"직접 물어보기로 했으니까 편지는 필요 없잖아."
세림은 진열대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항목 값은 낼게."
"항목만 받고 안 썼는데 무슨 돈이야."
"그럼 커피 사."
세림은 그렇게 말하고 은행 봉투를 챙겨 나갔다. 나가면서 문을 반쯤 닫았다가 다시 열고 닫았다.
세림은 십 년을 미뤘고 어제 물었고 다음 주 수요일에 간다.
날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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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을 열두 시에 닫고 나왔다.
'점심시간'이라고 쓴 아크릴 판을 유리문에 걸었다. 그 판은 여덟 해 동안 세 번 썼다.
주소는 걸어서 십오 분이었다.
큰길을 따라 가다가 초등학교 담을 끼고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골목이었다. 나는 그 길을 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편지지 도매를 받은 적이 있다. 이 년쯤 전이다.
이 년 전에도 나는 이 골목을 지나다녔다.
건물은 사 층짜리 붉은 벽돌이었다. 오래됐지만 관리는 되어 있었다. 일 층에 세탁소가 있고 그 옆에 계단 입구가 있었다.
우편함은 계단 입구 벽에 붙어 있었다. 여덟 칸이었다.
삼 층 왼쪽 칸에 이름표가 없었다. 이름표를 넣는 투명 창은 있는데 안이 비어 있었다. 다른 칸에는 다 있었다.
빈 칸 안에 광고 전단이 두 장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오 분쯤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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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주인은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예순쯤 된 여자였다.
"뭐 찾아요?"
"삼 층에 사람 사나요."
"거기 비었어요. 오래됐어."
"얼마나요."
"글쎄, 한 삼 년?"
나는 우편함 쪽을 봤다.
"그 전에는요."
"아저씨 혼자 살았지. 나이 많은."
"학생은 없었나요."
여자가 담배를 껐다.
"학생?"
"십 년쯤 전에요."
"아아, 그 집 애기 있었어. 대학생. 조용했어."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이름 기억나세요?"
"이름은 몰라. 근데 그 집 편지 많이 왔어."
"편지요?"
"우편함이 작잖아. 넘쳐서 여기 맡기고 그랬어. 나중에는 돌아오는 것도 많고."
"돌아오는 거요."
"반송이라고 도장 찍혀서 오는 거. 그거 몇 달을 그랬어."
여자는 세탁소 안으로 들어가려다 돌아봤다.
"근데 애기가 안 찾아가더라고. 쌓여만 있고."
"그거 지금 있나요."
"버렸지. 십 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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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데도 십오 분이 걸렸다.
가게 문을 열고 아크릴 판을 뗐다. 손님은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서 서랍을 열었다.
십 년 전 편지가 봉투째 들어 있었다. 어제 뒤집어 보고 다시 넣어둔 자리 그대로였다.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세 번 접힌 자국이 깊었다.
폈다.
여덟 줄이었다. 나는 이 여덟 줄을 열여덟 살 때부터 알았고, 스물둘에 받았고, 그 뒤로 세 번 읽었다.
세 번밖에 안 읽은 이유가 있다. 네 번째부터는 글자를 안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는 문장은 눈이 미끄러진다.
나는 그것을 카운터에 펴 놓았다.
그리고 형광등 아래로 당기지 않았다.
여덟 해 동안 나는 남의 필적을 봤다. 획의 두께를 재고, 흘림 방향을 보고, 받침 처리를 확인하고, 필압을 손끝으로 짚는다. 삼 분이면 된다. 삼 분이면 이 여덟 줄이 누구 손에서 나왔는지 나는 알 수 있다.
알면 되돌릴 수 없다.
어제 나는 그 남자에게 먼저 말했다. 그가 십 년 동안 모르고 사는 게 싫어서였다.
오늘 나는 나한테 말하지 않기로 했다.
편지를 접었다. 세 번 접힌 자국을 그대로 따라 접었다. 봉투에 넣고 서랍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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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에 도서관 편지를 다시 꺼냈다.
풀칠 안 한 봉투 안에 세 번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도서관 삼 층과 십일월과 대출 카드 윗줄이 든 편지였다. 가운데 한 줄이 비어 있고, 그 아래에 한 문장이 있었다.
그 책은 반납일보다 늦게 돌아갔습니다.
늦게 돌아간 것이 책만은 아니었다.
봉투 겉면에 나는 아무것도 안 적었다. 받는 사람도 안 적고 발신인도 안 적었다. 그가 준 봉투에는 발신인이 없었고 내가 만든 봉투에는 받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세 번째 봉투는 양쪽이 다 비어 있었다.
세 개를 서랍 위에 나란히 놓았다.
세림은 다음 주 수요일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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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는 여덟 시에 왔다.
종소리가 났을 때 나는 봉투 세 개를 치우던 중이었다. 두 개는 서랍에 넣었고 하나는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문 안쪽에 서서 스위치 쪽을 보지 않았다. 열흘 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네."
그는 카운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걸음이 느려서가 아니라 중간에 한 번 멈췄기 때문이었다. 멈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편지 됐습니까."
나는 봉투를 올렸다.
그가 손을 뻗었고, 이번에는 내가 손을 떼지 않았다. 봉투 위에 손이 둘 있었다.
"이재 씨."
"네."
"빈 줄 그대로 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봉투를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았다. 손을 얹은 채로 있었다.
"수진 씨."
"네."
"항목 두 개 중에 하나만 쓰셨습니까."
"둘 다 썼습니다."
"그럼 빈 줄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다 멈췄다.
지난번 빈 줄은 반송 자리였다. 이번 편지에는 반송 항목이 없었다. 항목은 도서관과 책 두 개였고 나는 둘 다 썼다. 그런데도 나는 가운데 한 줄을 비웠다.
비우라고 해서 비운 것이 아니었다. 비울 자리가 있어서 비웠다.
"대출 카드 윗줄 자리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봉투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제가 그 줄을 못 씁니다." 내가 말했다. "거기 뭐가 적혀 있었는지 제가 모르니까요."
"…….."
"이재 씨는 아십니까."
그는 손을 뗐다. 봉투는 카운터에 남았다.
"다음 항목 드리겠습니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접힌 자국이 여러 번이었다. 오래 갖고 다닌 종이였다.
나는 그것을 받지 않고 봉투를 밀어 주었다.
그가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올리는데 중간에서 한 번 걸렸다. 그는 억지로 밀지 않고 조금 되돌렸다가 다시 올렸다. 예전에 하던 그대로였다.
문 쪽으로 두 걸음 갔을 때 내가 말했다.
"이재 씨."
그가 섰다.
"오늘 낮에 거기 갔습니다."
등이 보였다. 어깨가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삼 층은 비어 있더군요."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종이 두 번 울렸다.
카운터에는 그가 놓고 간 종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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