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봉인이 둘
나흘째 되는 날 저녁에 비가 왔다.
서진하는 길가 주막에 들었다. 방을 얻을 돈은 없어서 봉놋방 구석을 얻었다. 짐꾼 넷과 소금 장수 하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가 궤짝을 지고 들어서자 다섯 사람이 동시에 그것을 봤다.
궤짝을 벽에 붙였다.
붙이고 나서 도로 떼어 방 가운데 가까이 놓았다. 왜 그렇게 했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오단이 사 년 동안 벽에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은 적이 없어서 이유를 모르는 채로 따라 했다.
“무겁겠소.”
소금 장수가 말했다.
“무겁습니다.”
“뭐요.”
서진하는 대답하기 전에 잠깐 셌다.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세 가지가 떠올랐고 세 가지 다 틀린 것 같았다.
“짐입니다.”
소금 장수가 웃었다.
“짐인 건 나도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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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다들 잠들고 나서 그는 궤짝 앞에 앉았다.
등잔을 가까이 옮겼다.
뚜껑과 몸통이 만나는 자리에 종이가 발려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띠였고, 세월에 누레져서 가장자리가 부스러졌다. 그 위에 인장이 하나 찍혀 있다.
글자가 넉 자였다.
連水鏢局.
연수표국. 오단이 마지막으로 말한 이름이고, 관에서 온 서리가 들어 본 적 없다고 한 이름이다.
서진하는 그 넉 자를 오래 봤다.
찍힌 지 사십 년이 넘었을 인주가 아직 붉었다. 색이 빠지긴 했으나 검게 죽지는 않았다. 좋은 인주를 썼다는 뜻이다. 표국이 망하기 전에는 그런 것에 돈을 쓸 만한 데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등잔을 들고 궤짝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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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이음새에 하나가 더 있었다.
서진하는 등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낮췄다.
앞쪽 것과 달랐다. 종이가 아니었다. 밀랍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덩이가 이음새 위에 눌려 붙어 있고, 그 위에 무언가가 찍혀 있었다.
글자가 아니었다.
그림이었다. 반쯤 뭉개져서 다 보이지 않았는데, 남은 부분이 둥글고 안쪽에 선이 몇 개 그어져 있었다. 바퀴 같기도 하고 매듭 같기도 했다.
그는 손끝으로 밀랍을 스쳤다.
단단했다. 그런데 앞쪽 종이처럼 부스러지지 않았다. 눌러 봐도 가루가 나지 않고 손톱 자국이 남았다.
서진하는 앞으로 돌아가 종이 봉인을 다시 봤다. 손을 대지 않고 등잔만 가까이 댔다.
종이 가장자리가 들떠 있었다. 풀이 삭아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자리가 손가락 마디만큼 되었다. 그 틈으로 등잔 빛이 들어가 안쪽 나뭇결까지 보였다.
밀랍 쪽은 들뜬 데가 없었다.
종이는 사십 년이었다.
밀랍은 사십 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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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셈을 셌다.
하나. 표물에는 봉인이 하나다. 의뢰인이 봉하고 표국이 확인한다. 오단이 그렇게 가르쳤다. 확인만 하고 다시 봉하지 않는다.
둘. 그런데 여기 둘이 있다.
셋. 하나는 표국의 것이다. 남은 하나는 표국의 것이 아니다.
넷.
넷에서 또 막혔다.
넷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저 밀랍을 누가 언제 왜 붙였는지 알아야 했고, 그것을 알 만한 사람은 나흘 전에 죽었다.
서진하는 등잔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오단의 아침을 생각했다.
오단은 매일 아침 궤짝을 들었다. 지는 것이 아니라 한 뼘쯤 들었다가 놓았다. 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서진하는 그것이 노인의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아직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그는 지금 그 생각을 도로 거뒀다.
몸을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거나 든다. 오단은 궤짝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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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그는 궤짝을 한 뼘 들었다가 놓았다.
무거웠다. 어제와 같은 무게였다. 어제와 같은지 아닌지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팔이 이 무게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오단은 알았을 것이다.
사십 년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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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을 나서는데 짐꾼 하나가 따라 나왔다.
늙은 사람이었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그쪽 팔이 짧아 보였다. 짐을 오래 진 몸이었다.
“젊은이.”
서진하는 걸음을 멈췄다.
“깃발이 없구먼.”
“…….”
“짐을 그렇게 지고 다니면서 깃발이 없어.”
“없습니다.”
노인은 궤짝을 봤다. 봉인 쪽이 아니라 모서리의 쇠를 봤다.
“그거 표궤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깃발이 없다.”
“표국이 없습니다.”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진하는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 기다렸다.
“젊은이.”
“네.”
“길에서 깃발 없는 짐이 뭔지 아나.”
“모릅니다.”
“주인 없는 짐이야.”
노인이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굽어 있었다.
“이 아래 사흘 길까지는 사람이 많아서 아무도 손 안 댄다. 그 위로 올라가면 사람이 적어지고, 사람이 적어지면 깃발을 본다.”
“…….”
“깃발이 있으면 누구 짐인지 알고, 알면 셈이 선다. 값을 치를 데가 있으니까. 깃발이 없으면 셈이 안 서.”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가져가지.”
노인은 그 말을 하고 서진하를 봤다. 겁을 주려는 얼굴이 아니었다. 값을 알려 주는 얼굴이었다.
“깃발을 만들게.”
“없는 국의 깃발을 세워도 됩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노인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내렸다.
“다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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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날 오전 내내 그 말을 생각하며 걸었다.
표국의 이름은 담보다. 이름을 걸었으면 물건을 못 지켰을 때 물어내야 하고, 연수표국은 물어낼 것이 없어서 문을 닫았다.
깃발을 만들려면 천이 한 자쯤 들고 먹이 조금 든다. 값은 그것뿐이다.
서진하는 걷다가 두 번 그 값을 셈해 봤다. 두 번 다 셈이 끝까지 갔고, 두 번 다 마지막에 손을 놓았다.
그는 깃발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정오 무렵에 갈림길이 나왔다. 북으로 곧게 가는 길과 서북으로 비스듬히 빠지는 길이었다.
그는 서북으로 갔다.
회읍은 북로 끝이라고 했지만, 그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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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오단이 마지막으로 말한 이름이고,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다.
서진하는 사흘 동안 지나는 마을마다 물었다. 연수표국을 아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몰랐다. 표국 장궤였던 한씨를 아느냐고 물어도 몰랐다.
나흘째에 방향을 바꿨다.
“이 근방에 셈 잘 보는 한씨 집이 있습니까.”
그 물음에는 답이 왔다.
“한 노인 말인가.”
떡을 팔던 여자가 말했다.
“죽었지, 그건.”
“…….”
“한 삼 년 됐나. 아니 사 년인가.”
서진하는 궤짝 끈을 고쳐 쥐었다.
“…….”
“집은 남았습니까.”
“남았지. 손녀가 산다.”
여자가 서쪽 언덕을 가리켰다.
“저 위에 기와 얹은 집 보이나. 저 집이야.”
“고맙습니다.”
“근데 젊은이.”
서진하는 돌아봤다.
“그 집 문 안 열어 줘.”
“…….”
“일 년에 서너 번은 누가 찾아오는데 다 그냥 가더구먼.”
여자가 떡을 뒤집었다.
“무슨 장부를 내놓으라고들 한다던데, 뭔 장부인지는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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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은 낮았으나 길이 좁았다.
궤짝을 지고 오르니 발이 자꾸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서진하는 두 번 멈춰 끈을 고쳐 맸고, 두 번째로 멈췄을 때 아래를 내려다봤다. 떡 파는 자리가 손톱만 하게 보였다.
기와집은 크지 않았다. 담이 낮고 마당이 좁았다. 다만 지붕만은 성했다. 사람이 살면서 손을 대고 있는 집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궤짝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문 앞에 서서 그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정하려고 했다. 오단의 제자라고 하면 오단을 알아야 한다. 표물을 지고 왔다고 하면 표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장부를 달라고 하면 문이 안 열린다고 했다.
셋 다 아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연수표국 오단이 죽었습니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서진하는 기다렸다. 마당의 흙이 마른 것이 보였다. 오늘 물을 뿌린 자리가 아니었다.
“팔월 열이렛날 밤에 죽었습니다.”
여전히 조용했다.
그는 세 번째 말을 준비하지 않고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준비한 것이 둘뿐이었고 둘 다 썼다.
돌아서려는데 안쪽에서 마루가 한 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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