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사십 년 늦은 표행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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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끝까지는 반각이었다. 길이 좁아지다가 사람 하나 폭이 되고, 그다음에 없어진다. 없어지는 데가 골 끝이다. 양쪽으로 바위가 서 있고 그 사이가 스무 걸음쯤이었다. --- 돌은 왼쪽에 있었다. 허리 높이다. 위가 평평하고 아래가 땅에 묻혀 있다. 누가 옮겨다 세운 것이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돌은 이렇게 안 선다. --- 서진하가 가까이 갔다. 궤짝을 진 채로 무릎을 굽히고 앞면을 봤다. 글자가 있었다. --- 아니었다. 글자가 **있던** 자리였다. --- 앞면 가운데가 움푹했다. 세로로 길고 폭이 손바닥만 하다. 그 안이 거칠다. 정으로 쪼아 낸 자국이 촘촘하게 남아 있었다. 쪼은 자국이 세로로 났다. --- 서진하는 손끝을 댔다. 바깥쪽 면은 매끄럽다. 사십 년 비바람을 맞으면 그렇게 된다. 움푹한 안쪽은 덜 매끄러웠다. 바깥보다 나중에 생겼다는 뜻이다. --- 얼마나 나중인지는 손이 모른다. 한 해 뒤일 수도 있고 스무 해 뒤일 수도 있다. 돌이 닳는 속도는 자리에 따라 다르고, 여기는 바람이 한 방향으로만 온다. 한 방향으로 오는 바람은 한쪽만 닳게 한다. 서진하는 오른쪽 면과 왼쪽 면을 번갈아 만져 봤다. 오른쪽이 더 매끄러웠다. --- "한 소저." "네." "여기 글자가 있었습니다." 한지운이 옆으로 왔다. 허리를 굽혀 그 자리를 봤다. --- "몇 자쯤 됩니까." "모르겠습니다." 서진하가 폭을 손으로 재 봤다. "석 자나 넉 자 들어갈 자리입니다." "…….." "이름이면 석 자입니다." --- 한지운이 아무것도 안 적었다. 보퉁이를 열지도 않았다. 서진하가 그것을 봤다. --- "안 적으십니까." "적을 것이 없습니다." 한지운이 돌에서 눈을 안 뗐다. "글자가 있었다는 건 적을 수 있습니다. 무슨 글자였는지는 못 적습니다." "…….." "있었다는 것만 적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다음에 이걸 읽는 사람이 무슨 글자였는지를 물을 겁니다." 한지운이 그제야 서진하를 봤다. "물을 자리를 만들어 놓고 답을 안 적는 건 안 하려고 합니다." --- 바람이 골을 지나갔다. 양쪽 바위 사이라 바람이 한 방향으로만 온다. 들어와서 나가는 데가 하나뿐이다. 바람 소리가 길게 났다. --- 이월 스무이틀에 여기서 사람 소리가 났다고 했다. 이런 데서는 소리가 안 흩어진다. 바위가 받아서 되돌려 준다. 마을까지 왔을 것이다. --- 돌 앞에 그릇이 있었다. 사기그릇이고 안에 물이 있었다. 물이 맑고 가장자리에 먼지가 안 앉았다. 그릇 밑동이 땅에 눌린 자국이 깊었다. 한 번 놓고 만 자리가 아니다. 오늘 놓은 것이다. --- 서진하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골 안쪽을 봤다. 바위 그늘에 사람이 있었다. --- 예순쯤 된 여자였다. 앉아서 무언가를 다듬고 있었다. 나물 같은 것이었다. 이쪽을 안 봤다. --- 서진하가 갔다.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어르신." 여자가 손을 안 멈췄다. --- "이 돌에 무엇이 적혀 있었습니까." 여자가 나물 하나를 무릎 옆에 놓았다. 그리고 다음 것을 집었다. --- 대답이 없었다. 서진하는 기다렸다. 열을 셀 만큼 기다리고 나서 한 번 더 물었다. --- "누가 쪼아 냈습니까." 여자가 이번에도 안 답했다. 손이 계속 움직였다. 나물 다듬는 손은 눈을 안 보고도 한다. --- 서진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제 마을에서 세 번 물었고 세 번 다 손짓으로 받았다. 네 번째는 붓이었고, 붓으로 물은 것에도 마지막은 안 나왔다. 나온 것은 한지운이 안 물었을 때였다. --- 서진하가 물러섰다. 물러서서 돌 쪽으로 갔다. 돌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궤짝을 지고 있으니 완전히 안 앉히고 반쯤 굽힌 자세였다. 그러고 아무 말도 안 했다. --- 한지운도 안 말했다. 보퉁이를 내려놓고 그 옆에 섰다. 붓을 안 꺼냈다. 바람이 두 번 더 지나갔다. --- 얼마나 있었는지 서진하는 안 셌다. 세면 기다리는 것이 되고, 기다리는 것은 재촉이다. 여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돌 앞에 앉아 있으면 무릎이 아프다. 궤짝을 진 채라 더 그랬다. 아픈 것은 그냥 뒀다. --- 여자가 나물을 다 다듬었다. 바구니에 담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 "그거 물 갈러 왔소." 서진하가 돌아봤다. 여자가 그릇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사흘에 한 번 가오." --- 소리가 났다. 이 골에 들어와서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제 마을에서도 못 들었다. 서진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 "여기서는 내도 되오." 여자가 말했다. "마을이 아니니까." --- 여자가 돌 쪽으로 걸어왔다. 와서 그릇을 들었다. 물을 골 밖으로 버리고 허리춤의 병에서 새 물을 부었다. 붓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 그릇을 놓고 나서 여자가 돌을 봤다. 움푹한 자리를 봤다. "우리 아버지가 새겼소." --- 서진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한지운이 보퉁이 끈에 손을 안 댔다. ---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쪼아 냈소." 여자가 말했다. "삼 년 있다가." --- "…….." "왜 쪼아 내셨습니까." 여자가 서진하를 처음으로 봤다. 보고 한참 있었다. --- "그건 안 말하오."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물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나도 모르오." --- 서진하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고마울 게 뭐 있소." 여자가 바구니를 들었다. "나는 물만 가오." --- 여자가 골 밖으로 걸어갔다. 열 걸음쯤 가다가 섰다. 돌아서서 말했다. --- "그 돌 앞에서 이름 부르지 마시오." "…….." "마을 밖인데도요?" "돌이 마을 거요." --- 서진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이 마을 것이면 이 골도 마을 것이다. 마을 밖이라 소리를 내도 된다고 한 사람이 방금 그렇게 말했다. 두 말이 부딪히는데 여자는 둘 다 했다. --- 여자가 갔다. 발소리가 좁은 데를 지나가는 동안 들렸고 그다음에 안 들렸다. --- 한지운이 그제야 보퉁이를 열었다. 새 책을 꺼내 무릎에 놓고 적었다. --- `골 끝. 돌 하나. 글자가 쪼아 내진 자리 있음. 석 자나 넉 자 들어갈 폭.` `새긴 사람과 쪼아 낸 사람이 같음. 삼 년 뒤.` `그 딸이 사흘에 한 번 물을 간다.` --- 적고 나서 붓을 뗐다. "서 표사." "네." "아까 두 번 물으셨습니다." "물었습니다." --- "두 번 다 안 나왔습니다." 한지운이 붓을 닦았다. "물러서서 앉으시니까 나왔습니다." --- 서진하는 돌을 보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 "제가 물으면 손짓이 오고, 한 소저가 안 물으면 글이 왔습니다." --- "저는 그때 붓을 들고 있었습니다." 한지운이 말했다. "들고 안 적고 있었습니다." "…….." "그게 물은 겁니까 안 물은 겁니까." --- 서진하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지운도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어제 마을에서도 오늘 골에서도, 말이 나온 자리는 이쪽이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그건 저쪽이 인심을 쓴 것이 아니다. 이쪽이 물으면 저쪽은 답을 골라야 한다. 고르는 동안 안 할 말이 같이 떠오르고, 안 할 말이 떠오르면 입이 닫힌다. 안 물으면 고를 것이 없다. --- 그래도 그는 두 번 물었다. 물어서 안 나올 것을 알면서 물었는지, 아니면 여태 하던 대로 했는지는 자기도 모르겠다. --- 해가 골 위로 넘어갔다. 양쪽 바위 때문에 여기는 해가 일찍 진다. 마을은 아직 밝을 것이다. 돌 앞의 그릇에 물이 차 있었다. --- 서진하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돌에 손을 한 번 댔다. 움푹한 자리가 아니라 옆면이었다. 옆면은 매끄러웠다. --- 궤짝은 하루 종일 등에 있었다. 오늘은 내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돌 앞은 굽히기만 했고 골에는 마루도 마당도 없다. --- 골을 나오는 동안 둘 다 말을 안 했다. 좁은 데를 지날 때 발소리가 앞뒤로 울렸다. 울리는 것을 듣고 나서 서진하는 걸음을 늦췄다. 여기서는 발소리도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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