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사십 년 늦은 표행

22

끌린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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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끝 빈집에서 잤다. 주인이 없는 집이고 문이 열려 있었다. 마루에 먼지가 얇았다. 여기서 자도 되느냐고 묻지 않았다. 물으면 누군가 소리를 내야 한다. --- 아침에 서진하가 궤짝을 졌다. "한 소저." "네." "골에 한 번 더 가겠습니다." --- 한지운이 보퉁이를 멨다. "무엇을 보러 가십니까." "어제 못 본 데가 있습니다." "…….." "어디요." "밑입니다." --- 골은 아침에 더 어두웠다. 양쪽 바위가 해를 막는다. 해가 골 위로 올라와야 안이 밝아지는데 그게 아홉 시가 넘어서다. 돌은 어제 자리에 있었다. 그릇도 있었다. 물이 어제보다 조금 줄어 있었다. --- 서진하가 궤짝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여기는 마루도 마당도 없어서 어제는 못 놓았다. 오늘은 자리를 골랐다. 바위 밑 평평한 데였다. --- 돌 앞에 앉았다. 어제는 반쯤 굽혔고 오늘은 앉았다. 앉아서 밑동을 봤다. --- 땅에 묻힌 데가 한 뼘쯤이다. 그 둘레의 흙이 주변과 달랐다. 골 바닥은 자갈이 섞여 있는데 돌 둘레는 고운 흙이다. 파서 넣고 덮은 흙이다. --- 서진하는 손끝으로 그 경계를 따라갔다. 둥글게 한 바퀴였다. 경계가 뚜렷했다. 오래된 것이면 뚜렷하지 않다. 비가 여러 번 오면 흙이 섞인다. 여기는 안 섞였다. --- 골 바닥을 봤다. 자갈이 물 자국을 따라 놓여 있다. 비가 오면 물이 한쪽으로 흐르는데, 돌은 그 길에서 비켜 있었다. 비켜 세웠다는 뜻이다. --- 세운 사람이 하루 와서 세운 것은 아니다. 돌을 세우려면 구덩이를 파고 돌을 넣고 흙을 채워 다진다. 다지지 않으면 한 해 안에 기운다. 이 돌은 안 기울었다. --- 혼자 했는지 둘이 했는지는 모른다. 허리 높이 돌이면 혼자 들 수 없다. 끌어 오는 것은 혼자도 되지만 세우는 것은 안 된다. 적어도 둘이다. --- 서진하는 옆면으로 손을 옮겼다. 어제 오른쪽이 더 매끄럽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한 방향으로 오니까 그런 줄 알았다. 오늘은 밑에서부터 올라갔다. --- 아래쪽 한 뼘 높이에서 손이 걸렸다. 가로로 난 자국이었다. 깊지 않고 넓다. 손가락 두 마디 폭이고, 돌을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거기도 있었다. 같은 높이다. --- 손톱으로 긁어 봤다. 돌가루가 안 묻어났다. 최근에 생긴 자국이면 묻어난다. 자국 안쪽에 이끼가 들어 있었다. 옆면 다른 데보다 얇지만 있었다. 이끼가 앉을 만큼은 지났다. --- 서진하는 그 자국에 손바닥을 댔다. 밧줄이다. 굵은 밧줄을 돌에 두 번 감고 끌면 그 자리가 닳는다. 한 번으로는 이렇게 안 된다. 여러 번 당기고 놓고 다시 당겨야 넓어진다. 끌려온 돌이다. --- 어디서 끌려왔는지는 자국이 안 알려 준다. 방향도 안 알려 준다. 알려 주는 것은 이 돌이 원래 여기 있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 한지운이 옆에 와서 앉았다. 앉아서 그 자국을 봤다. 손은 안 댔다. "서 표사." "네." "어제 저분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 "기억합니다." "여기서는 소리를 내도 된다, 마을이 아니니까." "…….." "그리고 이 돌 앞에서 이름을 부르지 말라, 돌이 마을 것이니까." --- 서진하는 손을 안 뗐다. 밧줄 자국에 손바닥을 댄 채로 있었다. 어제 그 두 마디를 들었을 때 그는 둘이 부딪힌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맞으면 하나가 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손바닥 아래에 있는 것이 그 사이다. --- "한 소저." "네." "두 말이 다 맞습니다." --- 한지운이 그다음을 안 물었다. 서진하도 안 말했다. 둘 다 그 자국을 보고 있었다. --- 한참 있다가 한지운이 보퉁이를 열었다. 새 책을 꺼내 무릎에 놓고 적었다. --- `돌 밑동 둘레의 흙이 골 바닥과 다름. 파서 세운 것.` `옆면 아래 한 뼘 높이에 가로 자국. 양쪽 다 같은 높이. 밧줄로 보임.` `이 돌은 여기서 난 것이 아니다.` --- 적고 나서 붓을 뗐다. "어디서 왔는지는 안 적겠습니다." "…….." "모르니까요." --- 서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가십니까." "갑니다." 한지운이 붓을 닦았다. "그런데 짐작은 근거가 있어야 짐작입니다." --- "근거가 있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어제 저분 말씀이 근거 아닙니까." --- 한지운이 잠깐 있었다. "그건 저분 말씀이고, 저분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는 저분만 압니다." "…….." "그러면 못 적습니까." "적을 수 있습니다." 한지운이 다시 붓을 들었다. --- `저 골 사람이 «돌이 마을 것»이라고 말함. 뜻은 묻지 않음.` 한 줄을 더 적었다. 그게 다였다. --- 그릇의 물이 줄어 있었다. 어제 여자가 가득 부었는데 오늘은 가장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아래다. 밤새 마른 것이다. 골은 바람이 세니까 그렇게 된다. 사흘에 한 번 오면 셋째 날에는 거의 비어 있을 것이다. --- 서진하는 그 그릇을 안 건드렸다. 건드리면 그 사람이 올 때 알아본다.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로 날을 세는 사람일 수도 있다. --- 사십 년이면 사흘이 몇 번인지 그는 세어 보려다 그만뒀다. 세면 숫자가 나오고, 숫자가 나오면 그것을 적고 싶어진다. 적을 것은 그 사람 것이다. --- 일어섰다. 일어서서 궤짝을 지려다가 한 번 멈췄다. 돌 앞에 서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이름을 안 불렀다. --- 부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부를 이름을 그는 모른다. 석 자나 넉 자가 들어갈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는 쪼아 낸 자국만 남았다. 오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새긴 사람이 자기 손으로 지웠으니, 지운 쪽이 그 사람 뜻이다. 그 뜻을 모르는 채로 부르면 부르는 쪽 편한 대로 부르는 것이 된다. --- 골을 나왔다. 나오면서 발소리가 앞뒤로 울렸다. 어제 들은 소리다. 이월 스무이틀에 여기서 난 소리도 그렇게 울렸을 것이다. --- 마을을 지나갔다. 장은 어제 파했고 길이 비어 있었다. 우물가에 아무도 없었다. 필담한 집 앞을 지날 때 마당을 봤다. 평상이 비어 있었다. --- 마을 입구에서 아이 하나가 우물에 있었다. 어제 물어봤던 그 아이였다. 물통을 들고 있었다. 이쪽을 봤다. 서진하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안 했다. --- 마을을 벗어나서 한지운이 말했다. "서 표사." "네." "다섯째 자리는 이걸로 끝입니까." --- "끝입니다." "…….." "소리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못 알았습니다." "못 알았습니다." --- 서진하가 걸으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오 표두는 여섯째에서는 소리를 내라고 했습니다." 한지운이 반 걸음 뒤에서 걸었다. "다섯째 다음이 여섯째입니다." "…….." "여섯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반권에 없습니다. 반권은 다섯째에서 실이 끊겼습니다." --- 서진하는 그 말을 들었다. 행장이 다섯째에서 끊겼다. 여섯째 구간은 나머지 반권에 있다. 나머지 반권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실이 끊긴 자리를 그는 봤다. 첫날 한지운의 집에서 봤고, 그 뒤로 여러 번 봤다. 실이 삭아서 끊어진 것이 아니라 잘린 자국이었다. 자른 사람이 있다. --- 자른 사람은 여섯째 구간을 가져갔다. 가져갈 때 다섯째까지는 두고 갔다. 두고 간 쪽에 «함표하지 말 것»이 네 번 적혀 있다. 두 가지가 같은 사람 손에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른다. --- "한 소저." "네." "여섯째까지 며칠입니까." "엿새입니다." 한지운이 보퉁이 끈을 고쳐 멨다. "그 뒤가 회읍입니다." --- 길이 남쪽으로 났다. 해가 등 뒤에 있었다. 아침에 골에서 해를 못 봤는데 마을을 벗어나니 있었다.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갔다. 서진하는 궤짝 끈을 고쳐 쥐고 걸었다. 스물여섯 근 반이고, 마지막으로 잰 것이 열흘 전이다. 그 사이에 늘었는지 줄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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