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두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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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을 걸었다.
여섯째 자리까지 엿새라고 했으니 절반이다.
길이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졌다. 이쯤부터는 회읍 쪽으로 가는 사람이 섞인다. 짐을 진 사람도 있고 안 진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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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저녁에 주막에 들었다.
방이 둘뿐인 작은 데였다. 마루가 좁고 부엌이 밖에 있었다.
마루 끝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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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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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걸음을 멈췄다.
배중은 일어서지 않았다. 마루에 앉은 채로 두 손을 무릎에 모았다.
"오래됐습니다."
"오래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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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쯤 기다렸습니다."
배중이 말했다.
"이 길로 오실 줄은 알았는데 언제 오실지는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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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궤짝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마루 위에 놓고 끈을 옆에 두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소 종이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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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수는 안 적혀 있었을 텐데요."
"근수는 없었습니다."
배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다른 줄이 있었습니다. 마유 외상 대신 냈다는 줄요."
"…….."
"그건 제가 안 뺐습니다."
"압니다. 그건 표사께서 두라고 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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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마루에 보퉁이를 놓았다.
배중이 목례를 했다.
"한 장궤."
"이번에는 이름을 밝히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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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이 잠깐 있었다.
"오늘은 다른 걸 갖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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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것이고 봉투에 안 들어 있었다. 열한 화 전에도 그랬다.
마루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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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겠습니까."
서진하가 그것을 봤다.
집지는 않았다.
"이게 뭡니까."
"먼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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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폈다.
종이가 오래됐다. 가장자리가 노랗고 접힌 자리가 갈라져 있다. 이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졌다.
글씨는 세로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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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이었다.
날짜가 있고 그 아래에 짐이 여럿 적혀 있다. 한 줄에 하나씩이다.
`이월 십육일`
`소금 스무 섬 — 창기표국`
`베 열두 필 — 상인 박가`
`궤 하나 — 연수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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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네 번째 줄에서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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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궤 하나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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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줄을 봤다.
앞의 세 줄에는 다 이름이 있다. 소금은 창기표국이고 베는 박가고 궤는 연수표국이다.
마지막 줄만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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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이 무슨 뜻입니까."
배중이 대답을 안 했다.
서진하가 고개를 들었다.
배중은 마루 아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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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다시 종이로 갔다.
`없음`이라고 적은 사람은 빈칸을 두지 않았다. 빈칸으로 두면 나중에 누가 채울 수 있다.
두 자를 적어서 채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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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그 자리를 만져 봤다.
종이가 눌려 있었다. 다른 줄보다 깊다.
눌러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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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으로 넘겨서 봤다.
그 자리만 도드라져 있었다. 붓을 눌러 쓰면 종이 뒤가 그렇게 된다.
앞의 세 줄은 뒷면에서 안 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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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람이 같은 붓으로 적었는데 마지막 줄만 힘이 달랐다.
힘이 달라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유는 종이가 안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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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이는 어디 것입니까."
"나루 기록입니다."
배중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십 년 전에는 검소가 없었고 나루에서 적었습니다. 배 싣기 전에 적어서 한 부는 나루가 갖고 한 부는 관에 냅니다."
"…….."
"관에 낸 건 없어졌습니까."
"그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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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이 종이를 가리켰다.
"관에 낸 것에는 마지막 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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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한지운이 보퉁이 끈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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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것입니까."
"같은 날 같은 배입니다."
"…….."
"두 부가 왜 다릅니까."
배중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그건 제가 이십이 년 동안 묻고 다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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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종이를 마루에 놓았다.
놓고 손을 뗐다.
"배 어르신."
"말씀하십시오."
"어르신이 찾는 것이 이 마지막 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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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이 처음으로 서진하를 똑바로 봤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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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표국 궤가 아니었습니다."
배중이 말했다.
"제가 처음에 그걸 찾다가 그쪽으로 갔습니다. 같은 날 같은 배에 궤가 둘이었으니까요."
"…….."
"그래서 제 궤를 보러 오신 겁니까."
"봤습니다."
배중이 말했다.
"열한 달 전에 봤습니다. 표사께서 지고 계신 것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건 그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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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말을 받았다.
열한 달 전이면 이재가 아니라 오단이 지고 있을 때다. 오단이 죽은 것이 사 년 전이니 그것도 아니다.
열한 달 전에 이 궤를 지고 있던 사람은 자기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디선가 자기를 봤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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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열라고 하셨습니까."
배중이 대답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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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개가 한 번 짖었다.
주막 주인이 부엌에서 뭐라고 했고 개가 그쳤다.
이 마을에서는 개가 짖는다. 나흘 전 마을에서는 안 그랬다.
배중이 무릎에 손을 다시 놓았다.
"그건 오늘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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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그제야 책을 꺼냈다.
꺼내서 무릎에 놓고 배중을 봤다.
"적어도 되겠습니까."
"적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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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 기록 사본. 이월 십육일. 짐 넷.`
`소금 — 창기표국. 베 — 상인 박가. 궤 — 연수표국. 궤 — 없음.`
`관에 낸 부본에는 마지막 줄이 없다고 함. 확인 못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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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붓을 뗐다.
"배 어르신."
"네."
"이 사본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나루 쪽에서 났습니다."
"…….."
"누구한테요."
배중이 웃지 않았다.
"그건 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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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그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음.`
적고 나서 붓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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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셋이 먹었다.
주막 주인이 국을 내왔고 셋 다 조용히 먹었다. 배중은 말이 긴 사람인데 밥상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먹고 나서 배중이 값을 냈다. 서진하가 말리려는데 먼저 냈다.
"이건 제 몫입니다."
"…….."
"기다린 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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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방이 하나뿐이라 배중이 마루에서 잤다.
서진하는 방에 궤짝을 두고 그 옆에 누웠다. 문을 안 잠갔다. 잠그면 이쪽이 무엇을 지키는지가 드러난다.
새벽에 한 번 깼다.
마루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두 번 하고 그쳤다.
늙은 사람이 새벽에 하는 기침이다. 참다가 하는 소리라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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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배중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마루 끝에 앉아 신을 신고 있었다.
"표사."
"네."
"여섯째까지 사흘 남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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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보실지는 저도 모릅니다."
배중이 신끈을 묶었다.
"다만 하나는 압니다."
"…….."
"여섯째 자리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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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말을 들었다.
반권에는 여섯째 구간이 없다. 실이 잘린 데서 끊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름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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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디서 아셨습니까."
"목록에서요."
배중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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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어제 그 종이를 떠올렸다.
짐 넷 중에 셋에는 이름이 있고 하나에는 없었다.
배중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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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를 같이 놓고 보십시오."
배중이 그렇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면 제 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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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이 갔다.
주막 마당을 나가 북쪽으로 갔다. 회읍은 남쪽이다.
이십이 년 동안 그가 어느 쪽으로 다녔는지는 모른다.
서진하는 그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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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옆에 왔다.
"서 표사."
"네."
"저분이 어제 종이를 두고 가셨습니다."
마루에 종이가 있었다.
접어서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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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것을 집지 않았다.
한참 보다가 집었다.
집어서 품에 넣었다.
넣으면서 한지운을 봤다. 한지운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받은 것을 적을지 말지는 오늘 안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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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섰다.
남쪽으로 갔다. 배중은 북쪽으로 갔고 우리는 반대쪽이다.
사흘이면 여섯째 자리다.
서진하는 걸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짐 넷 중에 셋에 이름이 있고 하나에 없다는 것과, 여섯째 자리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나란히 놓아 봤다.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로 보인다. 보이는 것과 맞는 것은 다르다.
나란히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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