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사십 년 늦은 표행

20

함표

이 회차는 이전 비평을 반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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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걸었다.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길이 다시 좁아진다. 산이 낮고 골이 얕다. 다섯째 자리는 그 골 끝에 있다고 반권에 적혀 있었다. --- 가는 동안 한지운이 다섯째 구간을 읽었다. 아홉 줄이다. 여섯 구간 중에 제일 길다. "서 표사." "네." "넷째는 넉 줄인데 다섯째는 아홉 줄입니다." --- "길어서 이상합니까." "짧아서 이상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요." 한지운이 책을 무릎에 놓았다. "적을 것이 많았거나, 적어야 할 일이 있었거나." ---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날짜가 있고 날씨가 있습니다." 한지운이 손끝으로 짚었다. "오구. 골 끝. 이월 스무이틀. 흐림." "…….." "나머지 다섯 줄은요." "규칙입니다." --- 서진하는 걸음을 늦췄다. "규칙이요." "이 구간에서는 함표하지 말 것." 한지운이 읽었다. "그 아래에 네 줄이 더 있는데 다 같은 말입니다. 하지 말 것, 소리 내지 말 것, 이름 대지 말 것, 부르지 말 것." --- 같은 말을 네 번 적은 사람이 있다. 한 번 적어서 안 될 것 같았다는 뜻이다. "누가 적었습니까." "할아버지 글씨입니다." --- "다섯 줄이 다 같은 말이면." 서진하가 말했다. "넉 줄은 빼도 되는 것 아닙니까." "뺄 수 있습니다." 한지운이 책을 덮지 않았다. "그런데 안 뺐습니다." "…….." "행장은 종이가 아깝습니다. 한 장에 한 구간을 넣어야 하니 줄을 아낍니다." "…….." "넉 줄을 아까운 자리에 넣었습니다." --- 마을은 사흘째 낮에 나왔다. 집이 서른 채쯤 되고 길이 하나다. 길 가운데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나무가 있었다. 장날이었다. --- 좌판이 열댓 개 놓여 있었다.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조용했다. --- 서진하는 길 입구에서 섰다. 장터는 원래 시끄럽다. 나흘 전 마을에서는 이백 걸음 밖까지 소리가 왔다. 여기는 발소리가 들렸다. --- 사람들이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값을 흥정하고 있었고 물건을 내밀고 있었다. 다만 소리가 낮았다. 옆에 서야 들리는 크기다. --- 값을 부르는 소리가 없었다. 장에서는 값을 부른다. 이거 얼마요, 하고 물으면 저쪽에서 얼마요, 하고 외친다. 그래야 지나가는 사람이 듣는다. 여기서는 손가락으로 했다. 파는 사람이 손가락 셋을 펴면 사는 사람이 둘을 편다. 그러고 하나가 더 펴지거나 안 펴진다. 그게 다였다. --- 한지운이 옆으로 왔다. 말하지 않고 서진하를 봤다. 서진하도 말하지 않았다. --- 둘은 그대로 길을 따라 들어갔다. 지나가면서 몇이 이쪽을 봤다. 보고 눈을 돌렸다. 등에 진 궤짝을 보고 눈이 한 번 더 머문 사람이 둘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 걸었다. --- 우물 옆에서 서진하가 물었다. "어르신." 나무 아래 앉아 있던 노인에게였다. "골 끝이 어느 쪽입니까." ---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들고 서진하를 봤다. 손을 들어 길 끝을 가리켰다. 그러고 손을 내렸다. --- "고맙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은 안 했다. --- 두 번째 사람에게도 물었다. 좌판에서 무를 파는 여자였다. "이 마을에 오래 사신 분이 계십니까." 여자가 무 하나를 들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턱으로 길 끝을 가리켰다. --- 같은 쪽이었다. --- 서진하는 두 번을 묻고 나서 걸음을 늦췄다. 묻는 쪽이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된다. 이 마을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우리 둘뿐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 --- 세 번째로는 아이에게 물었다. 여남은 살쯤 된 아이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얘야." 아이가 돌아봤다. "여기는 왜 다들 작게 말하니." ---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열었다가 다물었다. 물통을 들고 그냥 갔다. --- 길 끝에 집이 하나 있었다. 담이 낮고 마당이 좁았다. 마당에 평상이 있고 그 위에 종이와 벼루가 놓여 있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예순쯤 된 남자였다. --- 서진하가 문 앞에 섰다. "어르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들고 손을 저었다. --- 말하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 남자가 붓을 들었다.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서 들어 보였다. `무슨 일이오` --- 서진하는 잠깐 있었다. "연수표국 표사입니다." 남자가 붓을 놓고 손바닥을 들었다. 멈추라는 손짓이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이름은 적으시오` --- 서진하가 평상으로 갔다. 궤짝을 지고 앉을 수가 없어서 선 채로 손을 뻗었다. 남자가 붓을 내밀었고 서진하가 받았다. 받으면서 손이 한 번 어긋났다. 붓을 남한테서 받아 본 적이 없다. `서진하. 연수표국. 다섯째 자리를 보러 왔습니다.` --- 남자가 그것을 읽었다. 읽고 한참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적었다. `그 국 이름은 여기서 소리로 안 냅니다` --- 서진하가 다음 줄에 적었다. `왜입니까` 남자가 답을 안 적었다. 대신 종이를 한 장 넘겼다. --- `사십 년 됐소` `그 뒤로 이 골에서는 이름을 안 부르오` `장날에도 안 부르오` --- 서진하는 그 세 줄을 봤다. 한지운이 옆에서 보퉁이를 열지 않았다. 적을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서진하가 적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남자가 붓을 놓았다. 놓고 마당을 봤다. 마당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있다가 다시 들었다. --- `나는 그때 열아홉이었소` `골 끝에서 소리가 났소` `사람 소리였소` --- 거기서 멈췄다. 서진하가 기다렸다. 남자가 붓을 벼루에 댔다가 뗐다. 먹이 묻었다가 마르기 시작했다. --- `그다음은 안 적겠소` --- 서진하가 적었다.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적으신 것만 보겠습니다` 남자가 그것을 읽고 고개를 저었다. --- `적는 것도 소리요` --- 서진하는 그 넉 자를 오래 봤다. 적는 것도 소리다. 그러면 이 사람이 방금 적어 준 것들도 소리였다는 뜻이 된다. 그는 소리를 내면서 소리를 안 내고 있었다. 넉 줄을 아까운 자리에 네 번 적은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 한지운이 그제야 보퉁이를 열었다. 새 책을 꺼내 무릎에 놓고 붓을 들었다. 들고 안 적었다. --- 남자가 그것을 봤다. 보고 손을 내밀었다. 한지운이 붓을 건넸다. --- 남자가 한지운의 새 책에 적었다. 남의 책에 적는 것이니 한지운이 말릴 만한데 안 말렸다. `소리를 낸 사람이 있었소` --- 한 줄이었다. 남자가 붓을 돌려줬다. 한지운이 그 줄 아래에 적었다. `누구입니까` ---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으면서 한 번 더 저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작았다. 그리고 종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벼루를 닫고 붓을 씻으려고 물그릇을 당겼다. 끝났다는 뜻이었다. --- 서진하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마당을 나오는데 남자가 평상에서 손을 들었다. --- 돌아보니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거기 한 줄이 있었다. `골 끝까지 가면 돌이 있소` --- 서진하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종이를 내렸다. 내리고 그것을 접지 않고 평상에 뒤집어 놓았다. 글자가 안 보이게 놓는 것이다. --- 해가 기울고 있었다. 골 끝까지는 반각이라고 했다. 길이 좁아지다가 끝난다. 서진하가 궤짝 끈을 고쳐 쥐었다. --- "서 표사." "네." "아까 그 줄 말입니다." 한지운이 새 책을 폈다. `소리를 낸 사람이 있었소` --- "이건 제가 안 물어서 나온 겁니다." 한지운이 말했다. "제가 붓을 들고 안 적고 있으니까 저분이 가져가서 적었습니다." "…….." "그게 뭐가 다릅니까." --- "저는 여태 물어서 받았습니다." 한지운이 책을 덮었다. "오늘은 안 물었는데 왔습니다." --- 서진하는 길 끝을 봤다. 골이 좁아지는 데가 보였다. 그 너머는 아직 안 보인다. --- 마을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장이 아직 서 있는데도 그랬다. 해가 넘어가면 장이 파하고 사람들이 흩어질 것이다. 흩어지면 더 조용해진다. 조용한 데서 사십 년을 산 사람들이 저 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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