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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늦은 표행

19

넷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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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더 걸었다. 들이 끝나고 낮은 산이 다시 나왔다. 길이 오른쪽으로 크게 돌았다. 엿새째 아침에 한지운이 반권을 폈다. --- 넷째 구간은 넉 줄이다. 셋째가 여섯 줄이고 다섯째가 아홉 줄인데 넷째만 넉 줄이다. `四. 하검. 물가.` `바람.` `짐 이상 없음.` `이월 열아흐레.` --- "이게 답니까." "이게 다입니다." 한지운이 그 장을 손바닥으로 폈다. "사람이 죽었는데 넉 줄입니다." --- "죽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 "그렇습니다." 한지운이 그 줄들을 다시 봤다. "다른 구간에는 있습니까." "첫째에 있습니다. 둘째에도 있고요." "…….." "넷째에는 없습니다." --- `물가`라는 두 자가 지명인지 아닌지 그들은 몰랐다. 지명이면 어딘가 있을 것이고, 지명이 아니면 그냥 물가다. 이 근방에 물가는 많다. --- 그날 낮에 만난 사람에게 물었다. 밭에서 나오는 노인이었다. "이 근처에 물가라는 데가 있습니까." "물가?" "지명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데는 모르오." --- 두 번째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물가요? 그냥 물 있는 데 말이오?" "지명일 수도 있습니다." "들어 본 적 없소." --- 세 번째 사람은 주막 주인이었다. 주막에서 국수를 먹으면서 물었다. 주인이 국자를 든 채로 생각했다. "물가라." "…….." "모르겠소. 우리 아버지한테는 있었나." --- 국수를 먹는 동안 주인이 한 번 더 왔다. "물가라는 게 무슨 물가요. 강가요, 못가요." "모릅니다." "…….." "글자만 있습니다." 주인이 행주로 상을 닦았다. "글자만 있으면 못 찾소." --- 주막을 나와서 한지운이 말했다. "서 표사." "네." "사십 년이면 이름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압니다." "…….." "그런데 세 사람이 다 모르는 건 좀 다릅니다." --- 오후에 길에서 사람 둘을 만났다. 짐을 지고 있었다. 앞선 사람은 쉰쯤이고 뒤에 젊은 사람이 하나 붙어 있었다. 지게에 가마니가 둘씩 얹혀 있었다. 서로 비켜 가면서 앞사람이 서진하의 등을 봤다. --- "그거 무겁소?" "무겁습니다." "몇 근이오." "스물여섯 근 반입니다." 앞사람이 걸음을 늦췄다. "근수를 아네." --- "어디까지 가시오." "회읍 갑니다." "회읍." 앞사람이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멀지." "멉니다." --- 젊은 쪽이 뒤에서 물었다. "그거 뭐 들었어요?" "모릅니다." 젊은 쪽이 앞사람을 봤다. 앞사람은 안 봤다. "모르는데 지고 가요?" "그렇습니다." --- "그럼 왜 지고 가요." 서진하가 걸음을 멈췄다. 앞사람도 멈췄다. 지게를 세우고 작대기로 받쳤다. --- "어르신은 왜 지십니까." 서진하가 물었다. 앞사람이 어깨를 한 번 올렸다. "삯 받으니까." "…….." "저도 그렇습니다." --- "삯 받으시오?" "받았습니다." "언제." "사십 년 전에요." --- 앞사람이 웃었다. 웃고 나서 안 웃었다. "그거 오래됐네." "오래됐습니다." --- 젊은 쪽이 뭘 더 물으려는 것을 앞사람이 손짓으로 막았다. "가자." 두 사람이 지나갔다. 지나가고 나서 한지운이 옆에 왔다. --- "서 표사." "네." "삯을 받은 건 국입니다." "압니다." "…….." "국은 사십 년 전에 없어졌습니다." 서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저녁 무렵에 물이 나왔다. 산자락 사이에 넓게 고여 있었다. 가장자리에 갈대가 서 있고 물빛이 흐렸다. 저수지였다. --- 둑이 왼쪽에 있었다. 흙을 쌓고 돌을 박은 것이고 위로 길이 나 있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걸을 만한 폭이다. 둑 위에서 물을 봤다. 건너편까지 오백 걸음쯤 되어 보였다. --- 둑 아래 오두막에 사람이 있었다. 일흔쯤 된 노인이 문 앞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르신." "…….." "이 물이 언제 생겼습니까." --- 노인이 손을 안 멈췄다. "내가 스물아홉에 쌓았소." "올해 연세가." "일흔이오." --- 서진하는 셈을 했다. 한지운이 먼저 말했다. "사십일 년 전입니다." --- 서진하는 그 숫자를 두 번 들었다. 사십일 년 전에 둑을 쌓기 시작했다. 사십 년 전 이월에 여섯이 죽었다. 한 해 차이다. 그 한 해 동안 이 자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둑은 절반쯤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 노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셈이 빠르구먼." "둑 쌓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두 해 걸렸소." "…….." "그러면 물이 찬 게." "삼십구 년 됐지." --- 서진하는 물을 봤다. 사십 년 전 이월에 여섯이 죽었다. 그때 둑은 쌓는 중이었고 물은 아직 없었다. 물이 찬 것은 그 뒤다. --- "어르신." "말하시오." "이 아래에 마을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노인이 그물을 무릎에 놓았다. "열댓 채 있었소. 다 옮겼고." --- "이름이 뭐였습니까." 노인이 잠깐 있었다. "물가라고 했소." --- 한지운이 보퉁이 끈을 잡았다. 잡고 안 풀었다. 서진하는 물에서 눈을 안 뗐다. --- "물가라고요." "물 옆에 있어서 물가요." 노인이 손으로 저수지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쯤이오." --- 가리킨 데는 물이었다. 가장자리에서 이백 걸음쯤이고 갈대가 안 서는 깊이다. 바람이 불면 그 자리가 다른 데보다 늦게 잔잔해진다. 서진하는 그것을 한참 봤다. --- "어르신." "…….." "사십 년 전 이월에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 들으셨습니까." 노인이 그물을 도로 들었다. "그때 나는 둑에 있었소." "…….." "소리는 들으셨습니까." "이월에는 바람이 세서 아무것도 안 들리오." "…….." "마을 일은 마을이 알지." --- "그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흩어졌소." 노인이 그물코를 하나 꿰었다. "둑 막을 때 값 받고 다들 나갔소.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오." --- 한지운이 그제야 보퉁이를 열었다. 반권을 꺼내 넷째 구간을 폈다. 넉 줄을 다시 읽었다. "서 표사." "네." "`물가`가 지명이면 이 줄은 장소를 적은 겁니다." "…….." "지명이 아니면요." "물 옆이라고 적은 겁니다." 한지운이 그 두 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이제는 둘 다 맞습니다." --- 서진하는 둑 위에 섰다. 물이 저녁 빛을 받아 한 번 번쩍했다. 넷째 구간에 남은 것은 넉 줄이다. 하검, 물가, 바람, 짐 이상 없음, 이월 열아흐레. 그중에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람뿐이다. --- 바람이 불었다. 물 위를 지나서 둑 쪽으로 왔다. 갈대가 한쪽으로 누웠다가 일어났다. 서진하는 궤짝 끈을 고쳐 쥐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 한지운이 옆에 와서 섰다. "적을까요." "적으십시오." 한지운이 새 책을 폈다. --- `넷째 자리. 마을 이름 물가. 사십일 년 전 둑을 쌓았고 삼십구 년 전 물이 참.` `마을은 물 아래. 사람들은 흩어짐. 행방 모름.` `오늘 확인한 것은 바람뿐.` --- 한지운이 붓을 닦았다. 닦고 나서 한 줄을 더 적었다. `파는 것은 안 된다.` --- 서진하가 그 줄을 봤다. "한 소저." "네." "그건 왜 적으십니까." --- "셋째 자리에서 변가가 한 말이 있습니다." 한지운이 책을 덮었다. "어느 쪽이든 파면 이름을 하나 지워야 한다고요." "…….." "여기는 팔 수도 없습니다." --- 해가 넘어갔다. 둑 위가 어두워지고 물이 검어졌다. 노인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한마디 했다. "밤에 둑에 서 있지 마시오." "왜입니까." "바람이 세오." --- 서진하는 둑에서 내려왔다. 내려와서 궤짝을 두 손으로 놓았다. 놓을 자리가 흙이라 소리가 안 났다. --- 한지운이 오두막 처마 밑에 자리를 폈다. "오늘 여기서 잡니까." "자야겠습니다." "…….." "내일은요." "다섯째 자리로 갑니다." --- 서진하는 궤짝 옆에 앉았다. 물 쪽에서 바람이 계속 왔다. 노인 말이 맞았다. 넷째 자리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절도 못 하고 팻말도 못 세우고 풀도 못 걷었다. 걷을 풀이 물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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