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사십 년 늦은 표행

28

받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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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한참 그러고 있었다. 지팡이 위에서 손이 안 움직였다. 물통에 물이 두 번 더 떨어졌다. 한지운이 붓을 품에 넣었다. --- "내려갑시다."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 내려가는 데 반 식경이 걸렸다. 내려갈 때는 노인이 뒤에 섰다. 지팡이를 뒤에 놓고 몸을 앞에 옮긴다. 올라올 때와 반대다. --- 서진하가 앞에 갔다. 앞에 가면서 걸음을 세 번 늦췄다. 늦출 때마다 뒤에서 지팡이 소리가 한 박 빨라졌다. 네 번째부터는 안 늦췄다. --- 한지운이 가운데에서 왔다. 서진하가 궤짝을 졌다. 어제 움막 안에 들여놓았던 것을 나오면서 도로 졌다. 내리막에서는 짐이 앞으로 쏠린다. 끈을 한 뼘 줄여 맸다. --- 팻말 앞에서 섰다. `此地` 나무가 세로로 갈라져 있고 갈라진 금이 지 자 아래를 지나간다. --- 서진하가 팻말 앞에 앉았다. 궤짝은 진 채로 앉았다. 무릎을 꿇지 않고 쭈그려 앉았다. 무릎을 꿇으면 절이 된다. 앉아서 두 자를 봤다. 한참 봤다. --- 어제는 위에서 봤고 그제는 서서 봤다. 앉아서 보니 글자가 눈높이보다 조금 위에 있다. 새긴 사람이 앉아서 새겼으면 이 높이다. 노인의 키로 앉으면 그쯤이다. --- 손을 들었다. 들어서 첫 자의 첫 획에 손가락을 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갔다. 끝에서 손가락이 나무 밖으로 나갔다. --- 획이 나무 끝까지 안 가 있다. 중간에서 멈춘다. 손가락은 계속 갔는데 파인 자리가 먼저 끝났다. --- 두 번째 획도 그랬다. 세 번째도 그랬다. --- 지 자로 갔다. 지 자는 획이 여섯이다. 여섯 중 넷이 중간에서 끝났고 둘은 끝까지 갔다. 끝까지 간 둘은 아래 가로획이다. --- 서진하가 그 둘을 두 번 따라갔다. 두 번째에 손가락이 나무의 갈라진 금에 걸렸다. 금이 지 자 아래를 지나간다. 금은 나중에 생긴 것이다. 파인 자리를 지나가면서 깊이가 달라진다. --- 서진하가 손을 뗐다. 떼고 나서 손가락 끝을 봤다. 나무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털지 않았다. --- "어르신." "말하시오." --- "이걸 새기시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 "사흘이오." --- "…….." "정이 없어서 돌로 했소." --- "돌로 나무를 팝니까." "파이오." --- 노인이 오른손을 폈다. 엄지 밑동에 굳은살이 있다. 손날의 것과 다른 자리다. 이쪽은 더 두껍고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사흘에 두 자요. 첫날은 한 자도 못 했소." --- "…….." "글자를 잊을까 봐 급했소." --- 한지운이 붓을 꺼냈다. 꺼내서 무릎에 종이를 폈다. 오늘 처음이다. --- "어르신." 한지운이 말했다.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 노인이 한지운을 봤다. --- "치요." --- "…….." "치 자를 어떻게 씁니까." --- 노인이 대답을 안 했다. --- 한지운이 기다렸다. 붓을 종이 위에 대지 않고 들고 있었다. 먹이 붓끝에서 마르고 있었다. --- "모르오." ---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 "배운 글자는 두 자뿐이오." "…….." "내 것은 안 배웠소." --- 서진하가 노인을 봤다. --- "여쭤보시지 그러셨습니까." "안 물었소." --- "…….." "세 번 다 말입니까." "세 번 다요." --- 노인이 지팡이를 고쳐 짚었다. "두 자를 외우는 데 세 번이 갔소." "…….." "한 자를 더 하면 네 번째가 있어야 하오." --- "네 번째에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 "안 하셨소." --- 노인이 팻말 쪽을 봤다. "세 번째에 세우라고만 하고 갔소. 그러면 끝난 거요." --- 한지운이 붓을 내렸다. 내려서 벼루 옆에 놓았다. 종이는 편 채로 뒀다. --- "적겠습니다." --- "적으시오." --- 한지운이 붓을 다시 들었다. 한 줄을 적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 `여섯째 자리에 팻말이 있다. 두 자가 새겨져 있고 세운 사람이 있다.` `세운 사람의 이름은 확인 못 함.` --- 서진하가 그 두 줄을 봤다. --- "한 소저." "예." --- "아래 줄을 지우면 어떻게 됩니까." --- "팻말만 남습니다." 한지운이 붓을 놓았다. "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 서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팻말에서 바위까지 걸었다. 마흔 걸음이다. 스물째 걸음에서 섰다. --- 여기가 가운데다. 끈이 떨어져 있던 데가 뒤에 있고 궤를 내려놓았던 자리가 앞에 있다. 둘 중 어디가 그 사람이 말한 데인지 모른다. 노인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 서진하가 어깨끈을 풀었다. 궤짝을 내렸다. 내리면서 한쪽이 먼저 닿지 않게 두 손으로 받쳤다. 땅에 닿는 소리가 안 났다. --- 노인이 그것을 봤다. --- 서진하가 궤짝 앞에 섰다. 절은 하지 않았다. 첫째 자리에서도 넷째 자리에서도 안 했다. 여기서도 안 했다. --- 한 식경쯤 서 있었다. 해가 나무 사이로 옮겨 갔다. 바람이 골 쪽에서 위로 올라왔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 --- 앞의 다섯 자리에서는 설 데가 있었다. 봉분이 있거나, 팻말이 있거나, 물 아래라도 어디쯤인지는 알았다. 거기 서면 그 앞이었다. 여기는 스무 걸음씩 양쪽이다. --- 한지운이 뒤에서 기다렸다. 종이를 걷지 않고 무릎에 편 채로 들고 있었다. 바람에 한 번 들렸다가 손으로 눌렀다. 노인은 팻말 쪽에 있었다. --- 서진하가 발끝으로 땅을 한 번 눌렀다. 낙엽 아래가 무르다. 여기는 바위 아래가 아니라 비가 들이치는 자리다. 사십 년이면 다 쓸려 나갔을 것이다. --- 서진하가 궤짝을 다시 졌다. 한 손으로 끈을 잡아 올리지 않았다. 양쪽 끈을 두 손으로 같이 잡고 어깨에 얹었다. 무릎으로 일어섰다. --- 셋째 자리 산에서는 한 손으로 했다. 경사가 급해서 한 손은 바위를 짚었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경사가 없다. --- 노인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매듭 때처럼 무어라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었다가 한 번 고쳐 짚었다. --- "어르신." "말하시오." --- "저희는 회읍으로 갑니다." --- "가시오." --- "…….." "어르신은요." --- "올라가오." --- 노인이 산 쪽을 봤다. 한 마장이다. 올라가면 반 식경이고 내려오면 반의반이다. "소금이 두 번 남았소." --- 서진하가 그 말을 셈해 봤다. 일 년에 두 번이니 두 번이면 한 해다. 한 해 치가 남았다는 말인지 두 번 더 받으면 끝이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묻지 않았다. --- 서진하가 두 걸음 갔다가 섰다. 섰다가 돌아섰다. --- "어르신." "…….." "어제 제가 국호를 불렀습니다." --- "불렀소." --- "어르신께서 받으셨습니다." "받았소." --- "…….." "저는 받는 말을 모릅니다." --- 노인이 서진하를 봤다. 한참 봤다. --- "들으시오." --- "예." --- "길을 아는 사람이 있소." ---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 "그게 받는 말입니까." "그것이오." --- "무슨 뜻입니까." --- "부르는 쪽은 길을 잃은 쪽이오." 노인이 지팡이를 한 번 짚었다. "받는 쪽은 여기 아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 주는 거요. 그뿐이오." --- "…….." "도와준다는 말은 아닙니까." "아니오." --- "있다는 말뿐입니까." "있다는 말뿐이오." --- 서진하가 그 말을 두 번 들었다. 두 번째는 속으로 들었다. --- 한지운이 종이를 들었다. "적어도 되겠습니까." --- "그건 표국 것이오." --- 한지운이 종이를 걷었다. --- 서진하가 그 다섯 자를 속으로 한 번 외웠다. 사 년 동안 오단의 뒤에서 궤짝을 졌다. 오단은 이 말을 한 번도 안 했다. 궤짝을 지는 법은 가르쳤고 매듭 매는 법도 가르쳤다. --- 부르는 쪽은 길을 잃은 쪽이다. 사 년 동안 서진하가 길을 잃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단이 앞에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한테는 부를 일이 없다. --- "어르신." "말하시오." --- "그건 누가 가르쳤습니까." --- "그 사람이오." --- "…….." "누가 부르거든 그렇게 답하라고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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