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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늦은 표행

6

길값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 사람이 있었다. 길이 산허리를 감고 도는 자리였다. 왼쪽이 비탈이고 오른쪽이 바위인데, 그 사이가 수레 한 대 지날 만큼이다. 가운데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짚신을 고치고 있었다. 예순쯤 되어 보였고 옷이 낡았으나 깨끗했다. 옆에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지팡이는 아니었다. 손잡이 쪽이 굵고 아래가 가늘었다. --- 서진하는 열 걸음 앞에서 멈췄다. 한지운이 반 걸음 뒤에 섰다. 남자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짐이 무겁구먼." "…….." "내려놓고 쉬었다 가." --- 서진하는 궤짝을 내려놓지 않았다. "길을 비켜 주십시오." "비켜 줄 수는 있는데." 남자가 짚신 끈을 당겨 묶었다. "비켜 주는 값이 있어." --- 서진하는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아니다. 오단이 가르쳤다. 길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은 관이 아니라 사람일 때가 있다. 값을 부르면 값을 치른다. 안 치르면 못 지난다. 치르는 방법이 셋이라고 했다. 은자, 물건, 그리고 이름. 이름으로 치른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오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 년 동안 그는 물음에 대답을 안 한 적이 세 번 있고 그중 하나가 그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진하가 낼 수 있는 것은 셋 중에 아무것도 없었다. 은자는 짚신 값밖에 없다. 물건은 궤짝뿐이다. 이름은 세울 국이 없다. "얼맙니까." "짐이 뭔데." --- "표물입니다."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늙지 않았다. 얼굴은 예순인데 눈은 셈이 빠른 사람의 눈이었다. "표물이면 깃발이 있어야지." "없습니다." "…….." "그럼 표물이 아니고." ---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서니 키가 서진하보다 컸다. 굽은 것처럼 앉아 있었는데 서니 굽지 않았다. "깃발 없는 짐은 값을 못 매겨." "…….." "값을 못 매기면 통째로 가져가는 수밖에 없어. 그게 규칙이야." --- 서진하는 궤짝 끈을 고쳐 쥐었다. 쥐면서 오른손이 허리로 갔다. 갈 데가 없는 손이었다. 칼을 찬 적이 없으니까. "모칠이라고 하네." 남자가 말했다. "이 길은 내가 열두 해 봤어. 자네보다 오래." --- 한지운이 앞으로 나왔다. 서진하가 팔로 막으려 했는데 이미 지나가 있었다. "어르신." "…….." "값을 매기실 수 있습니다." 모칠이 한지운을 봤다. --- "매길 수 있다니." "깃발이 없다고 값이 없는 게 아닙니다." 한지운이 보퉁이를 풀었다. 벼루와 붓과 새 책을 꺼냈다. 바닥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책을 왼팔에 올렸다. "국이 없으면 셈을 국에 못 답니다. 사람에게 답니다." --- "사람한테 달면 사람이 도망가." "도망 안 갑니다." "…….." "어떻게 아나." 한지운이 책을 폈다. 앞장이 아니라 뒷장이었다. --- `표기 하나. 미회수.` 여섯 자가 적혀 있었다. 모칠이 그것을 봤다. "이게 뭔가." "연수표국 미결입니다." "…….." "사십 년 됐습니다." --- 모칠이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사십 년을 안 갚았다는 소리를 지금 나한테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 "그럼 더 못 믿지." 한지운이 붓을 벼루에 댔다. --- "사십 년을 안 갚았는데 아직 적혀 있습니다." "…….." "지운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칠이 지팡이를 집었다. 집었는데 짚지 않고 손에 들고만 있었다. --- "적으면 갚는 건가." "적으면 안 없어집니다." 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갚는 건 사람이 하고 안 없어지는 건 종이가 합니다. 둘은 다른 일입니다." "…….." "저는 종이 쪽을 합니다." --- 모칠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짧았다. "자네 표국 사람이구먼." "장궤였습니다." "국이 없다며." "없습니다." 한지운이 붓끝을 종이에 대고 기다렸다. "성함을 여쭙겠습니다." --- 모칠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하는 그 침묵을 셌다. 하나, 둘, 셋. 여섯에서 모칠이 말했다. "모칠." "한 자 더 있습니까." "없어." --- 한지운이 적었다. `牟七 길값 미결.` 적고 나서 날짜를 안 적었다. 모칠이 목을 빼고 봤다. "날짜는." "안 적습니다." "…….." "미결에는 날짜가 없습니다. 끝나지 않은 것은 언제 시작됐는지보다 아직 안 끝났다는 게 먼저입니다." --- 모칠이 지팡이 끝으로 땅을 한 번 찍었다. 찍은 자리에 자국이 남았다. 끝이 쇠였다. 서진하는 그것을 봤고, 본 것을 얼굴에 안 냈다. 지팡이가 지팡이가 아니라는 걸 아까부터 알고 있었으니 새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얼마로 적었나." "안 적었습니다." "…….." "어르신이 부르십시오." --- 모칠이 서진하를 봤다. 궤짝을 봤다가 서진하 얼굴을 봤다가 다시 궤짝을 봤다. "저 궤 안에 뭐가 들었나." "모릅니다." "모른다고." "…….." "봉인이 있습니다." "봉인은 뜯으면 그만이고." "뜯으면 값이 없어집니다." 모칠이 눈을 좁혔다. "값이 왜 없어져." "봉인째 나르는 것이 값입니다. 안에 든 것이 값이 아니라요." "…….." "열면 표물이 아니게 됩니다." --- 모칠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게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들은 적 있는 말을 다시 들은 사람의 끄덕임이었다. "은자 두 냥." "많습니다." 한지운이 말했다. "많지." "…….." "많이 부른 거야. 깎아." --- "한 냥." "한 냥 반." "한 냥 반." 한지운이 적었다. `銀 一兩 半.` 적고 붓을 닦았다. --- "언제 갚나." "회읍에 닿으면 갚습니다." "안 닿으면." 한지운이 붓을 내려놓았다. "안 닿으면 그 줄이 남습니다." "…….." "남은 줄은 다음 사람이 봅니다." --- 모칠이 길에서 비켜섰다. 바위 쪽으로 두 걸음 물러서서 지팡이를 세웠다. 서진하가 지나가려는데 모칠이 말했다. "젊은이." "네." "저 위에 첫째 자리 가는 거지." --- 서진하는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 길로 가는 사람은 그것밖에 없어." 모칠이 산 위쪽을 봤다. "거기 부러진 게 하나 서 있어." --- "표기대 말입니까." "뭔지는 몰라. 나무 막대가 반쯤 부러진 채로 박혀 있어." "…….." "열두 해 동안 그대로야. 아무도 안 뽑았어." --- 서진하는 그것을 물으려다 말았다. 물어도 이 사람이 아는 것은 열두 해까지다. 그 앞은 모른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모칠이 짚신을 내려다봤다. "한 냥 반 받을 건데." --- 그들은 그 자리를 지났다. 지나면서 서진하는 모칠의 발밑을 봤다. 짚신이 새것이었다. 방금 고쳐 신은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 삼은 것이었다. 열두 해 이 길을 봤다는 사람의 짚신이 새것인 이유를 그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스무 걸음쯤 갔을 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이보게." 한지운이 돌아봤다. 서진하는 안 돌아봤다. "그 책 말이야." "…….." "내 이름 적힌 데." --- "네." "다른 이름도 적혀 있나." 한지운이 대답했다. "어르신이 둘째입니다." 모칠이 다시 앉는 소리가 났다. "둘째면 늦은 것도 아니고 빠른 것도 아니네." --- 산길이 좁아졌다. 한 시진쯤 아무도 말을 안 했다. 오르막이라 숨이 찼고, 숨이 차면 말이 줄어든다. 그런데 오르막이 끝나고 평평해진 뒤에도 둘 다 말을 안 했다. 서진하는 한 냥 반을 생각했다. 지금 그의 전대에 든 것이 스무 푼이 안 된다. 한 냥이 백 푼이니 한 냥 반이면 백오십 푼이다. 짧은 표행 하나를 받아도 그만큼은 안 된다. 갚을 수 없는 것을 적어 두고 지나온 것이다. 오단이 사십 년 동안 한 일이 그것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그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밀어낸 이유는 스스로도 몰랐다. 해가 능선에 걸릴 무렵에 나무가 끊기고 자갈밭이 나왔다. 한지운이 걸음을 늦췄다. 서진하는 그가 보는 쪽을 봤다. 자갈밭 가운데에 나무 막대가 하나 박혀 있었다. 사람 키만 한 것이 허리쯤에서 꺾여 있었다. 위쪽 반은 없었다. 서진하는 궤짝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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