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사십 년 늦은 표행

7

첫째 자리

표기대는 물푸레였다. 서진하는 앉아서 부러진 단면을 봤다. 나뭇결이 세로로 찢겨 있었다. 톱으로 자른 것도 아니고 도끼로 친 것도 아니었다. 옆에서 힘이 걸려서 꺾인 자국이다. 단면이 검었다. 사십 년 비를 맞으면 그렇게 된다. --- 땅에 박힌 쪽은 세 뼘쯤 남아 있었다. 흔들어 봤다. 안 움직였다. 자갈밭이라 흙이 얕은데도 박힌 것이 단단했다. 누가 박은 게 아니라 세월이 조여 놓은 것 같았다. "뽑아 볼까요." 한지운이 대답하지 않았다. --- 대신 그가 다가와 표기대 위에 손을 얹었다. 부러진 단면 위였다. 손바닥을 올려놓고 그대로 있었다. 서진하는 손을 뗐다. 한지운은 한참 뒤에 손을 내렸다. 손바닥에 검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것을 옷에 닦지 않고 손가락으로 비벼서 떨어뜨렸다. --- "천이 없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없습니다." "위쪽 반도 없고요." "…….." "부러진 쪽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지운은 자갈밭을 봤다. --- 둘은 그 자리를 걸어 다녔다. 자갈이 발밑에서 소리를 냈다. 서진하가 왼쪽을 보고 한지운이 오른쪽을 봤다. 걸음을 좁게 떼면서 발끝으로 돌을 밀어 보는 식이었다. 자갈밭이 넓지 않았다. 스무 걸음에 열다섯 걸음쯤이고 가장자리가 풀이다. 돌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조각도 천 조각도 없었다. 사십 년이면 천은 삭아 없어진다. 나무는 남는다. 그런데 나무도 없었다. 서진하는 표기대 있는 자리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부러진 단면이 위로 향해 있다. 꺾여서 위쪽이 떨어졌다면 떨어진 것은 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 사십 년 동안 굴러갔대도 자갈밭을 벗어나긴 어렵다. 없다는 것은 누가 가져갔다는 뜻이다. --- 자갈밭 끝에서 서진하가 멈췄다. 돌무더기가 있었다. 사람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고 길이가 한 발쯤 됐다. "무덤입니까." 한지운이 와서 봤다. "짧습니다." --- 사람을 묻으면 길이가 더 길다. 한지운이 돌 하나를 들어 옮겼다. 그 아래 흙이 검었다. 두 개를 더 옮기니 흙 색이 위와 달랐다. 파낸 자리를 도로 덮은 흙이었다. "뭘 묻었을까요." "모릅니다." 한지운이 돌을 도로 올렸다. 옮긴 순서 그대로 세 개를 올렸다. --- 해가 넘어갔다. 자갈밭에서는 잘 수 없었다. 바닥이 돌이고 바람이 그대로 온다. 내려가는 길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산비탈 중턱에 집이 한 채 있었다. --- 문을 두드리니 사내가 나왔다. 마흔쯤이었고 손이 컸다. 문을 반만 열고 이쪽을 봤다. "길 잃었소?" "아닙니다." "…….." "위에 자갈밭에 다녀왔습니다." 사내의 손이 문틀을 짚었다. --- "뭐 하러." "사람이 죽은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들어오슈." --- 방이 하나였다. 아궁이에 불이 있었고 벽에 농기구가 걸려 있었다. 사내는 물을 떠 왔다. "구평이오." "서진하입니다." "한지운입니다." 구평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궤짝에 눈이 갔다가 돌아왔다. --- 구평은 앉으라는 말을 안 했고, 둘도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구평이 먼저 앉으니 그제야 앉았다. "위에 뭐 찾으러 왔소." "천 조각입니다." "…….." "깃발이었던 것입니다." 구평이 물그릇을 내려놓았다. "없소." "…….." "내가 스물다섯에 이 집에 왔는데 그때도 없었소." --- "막대는 있었습니까." "있었지." "부러진 채로요." "부러진 채로." 구평이 아궁이 쪽을 봤다. "열댓 명은 왔다 갔을 거요. 다 그거 물어봤소." --- 서진하는 그 숫자를 들었다. 한지운은 사 년 동안 열한 명이 행장을 달라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 열한 명과 이 열댓 명이 같은 사람들인지 다른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같다면 한 무리가 두 군데를 도는 것이고, 다르다면 이 일을 찾는 사람이 스물이 넘는다는 뜻이다. "열댓 명이요." "내가 여기 온 뒤로만." "…….." "그 앞은 모르지." --- 한지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제각각이오." 구평이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 "관에서 나온 사람도 있었고, 늙은이도 있었고, 젊은 사람도 있었소. 다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한테 같은 걸 물었소." "…….." "천이 어디 갔느냐고." ---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없다고 했지." "…….." "없는 걸 없다고 하는데 아무도 안 믿더군." 구평이 물을 마셨다. "두 번은 집을 뒤졌소. 뒤지라고 했지. 뒤져서 나오면 가져가라고." --- 한지운이 보퉁이를 풀었다. 새 책을 꺼내 무릎에 올렸다. 구평이 그것을 봤다. "뭐요." "적겠습니다." "뭘." "어르신이 지금 하신 말씀을요." --- 구평이 웃지 않았다. "적어서 뭐 하게." "없다는 것도 기록입니다." 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열댓 명이 와서 물었고 열댓 번 없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디에도 안 적혀 있으면 열여섯 번째가 또 옵니다." --- 구평이 오래 있었다. 그동안 아궁이에서 나무가 한 번 튀었다. 불티가 방바닥까지 왔고 구평이 손바닥으로 눌러 껐다. "이름은 안 적어 주면 좋겠소." "안 적겠습니다." "…….." "내 이름 적히면 사람이 더 와." 한지운이 붓을 종이에 댔다. --- `첫째 자리. 표기 없음. 산 아래 거주자 확인. 이십 년 전에도 없었음.` `돌무더기 하나. 사람 것 아님. 파지 않음.` --- 적고 나서 뒷장으로 넘겼다. `표기 하나. 미회수.` 그 여섯 자 옆에 아무것도 안 적었다. 서진하가 그것을 봤다. "안 지우십니까." "못 지웁니다." --- "확인했는데요." "없다는 걸 확인한 겁니다." 한지운이 책을 덮었다. "미결은 물건이 돌아오거나, 없어진 자리가 확인되거나, 둘 중 하나여야 지워집니다. 오늘 확인한 건 여기 없다는 것뿐입니다." "…….." "어디서 없어졌는지는 모릅니다." --- 구평이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댁들은 뭐요." "표국 사람입니다." 한지운이 말했다. "어느 표국." "연수표국입니다." 구평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사십 년 전에 문을 닫았습니다." --- 구평이 아궁이에 나무를 하나 넣었다. "그럼 왜 아직 다니슈." 한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하도 대답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크게 붙었다가 잦아들었다. --- 저녁으로 감자를 삶아 먹었다. 구평은 소금만 내놓았고 셋이 말없이 먹었다. 서진하는 두 개를 먹고 하나를 남겼다. 남긴 것을 한지운이 반으로 갈라 반쪽을 먹었다. 그날 밤 셋은 그 방에서 잤다. 서진하는 문 쪽에 누웠다. 궤짝을 벽에 안 붙이고 방 가운데에 두었다. 구평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거기 두면 걸리는데." "압니다." "…….." "그래도 거기 둡니까." "둡니다." --- 새벽에 서진하가 깼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서 깬 게 아니었다. 방 안이 밝았다. 아궁이 불이 꺼졌어야 할 시각인데 밝았고, 밝으면 누가 불을 다시 넣은 것이다. 서진하는 몸을 돌리지 않고 눈만 떴다. 짐을 오래 진 사람은 자면서도 어깨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안다. 그는 문 쪽으로 누워 있었고 아궁이는 등 뒤였다. 돌아눕지 않고 벽을 봤다. 벽에 그림자가 있었다. 앉은 사람의 그림자였다. 등이 둥글고 팔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서진하는 아주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어깨는 안 움직였다. 구평이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불을 보고 있었고,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 나무 조각이었다. 한 뼘쯤 되는 것이고 한쪽 끝이 찢겨 있었다. 톱자국도 도끼 자국도 아니고 옆에서 힘이 걸려 꺾인 자국이었다. 불빛에 나뭇결이 보였다. 세로로 곧고 마디가 없었다. 물푸레였다. --- 서진하는 고개를 도로 돌렸다. 눈을 감았다. 감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구평이 그것을 아궁이에 넣지 않았다. 한참 들고 있다가 품에 도로 넣었다. 불이 사그라졌다. 아침까지 서진하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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