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저울 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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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무경은 품속 종이를 도로 접었다.
접힌 자리가 손끝에 익었다. 삼 년을 지녀 온 종이였다. 마지막 획이 꺾여 올라가던 수결. 필집의 손버릇이 거기 남아 있었다.
방덕수의 저울추 만지던 손이 멎었던 순간을 되짚었다. 짧았다. 그러나 값을 매기는 자의 손은 함부로 멎지 않는다. 저울대만 이십오 년을 쥔 손이었다. 그 손이 멎었다는 것은, 아직 값을 매기지 못한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궤를 열어 보지 않았다. 그게 순서라고 했다. 그러나 거간은 순서보다 값을 먼저 본다. 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지 못한 것이었다.
*
밤이 깊었다. 단이가 잠든 것을 보고, 조무경은 술 한 병을 들고 옆 주막으로 갔다.
오씨는 봉놋방 등잔 밑에서 외상 기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대기가 촘촘했다.
"아이고, 이 밤에 무슨 술이오, 노야."
"한 잔 하시오."
조무경이 술을 따랐다. 오씨가 잔을 받으며 그의 손을 힐끗 보았다. 늘 그러듯 그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조무경이 먼저 말했다.
"방덕수. 그자 손을 봤소."
"거간이야 손이 험할 리 없지."
"저울대 자국이 깊소. 그런데 궤를 안 열었소. 삼 년을 쥐고도."
오씨가 술을 넘겼다. 잔을 내려놓는 손이 조금 늦었다.
"그자가 옛날에…처자식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빚에 몰려서. 그 뒤로 남의 빚만 사 모았지. 나도 오 년 전에 이 주막을 넘길 뻔했고."
조무경은 잔을 채웠다.
"빚에 처자식을 잃은 자가, 남의 궤를 왜 안 열겠소."
"글쎄……"
"열면, 사람이 보이오. 문서 뒤에 숨은 사람이. 그자는 그게 무서운 거요."
오씨가 조무경을 오래 보았다.
"노야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시오."
조무경은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펴지는 않았다. 등잔 곁에서 모서리만 짚어 보였다. 마지막 수결의 획이 종이 끝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삼 년 전에 죽은 사람 손이오. 누명을 쓰고 죽었소. 이 전당표를 쓴 손이기도 하고."
오씨가 숨을 골랐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아는 얼굴이었으나, 묻지 않았다.
"노야가…그 사람하고 무슨."
"묻지 마시오, 오씨. 아직은."
오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모른 척해 온 것을, 이제 아는 척하는 끄덕임이었다.
"단이 그 애는 아오?"
"모르오. 알면 안 되오."
"그럼 나도 모르는 걸로 하지요."
오씨가 술병을 도로 조무경 쪽으로 밀었다.
"근데 노야. 그자, 눈치가 빨라요. 장시 거간들 다 그자 손에 있으니까. 누가 자기 뒷조사를 하는지, 사흘이면 냄새 맡을 거요."
조무경은 종이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사흘이면 되오. 난 닷새가 있소."
*
돌아오니 부뚜막에 불이 살아 있었다.
단이가 국솥 앞에 앉아 있었다.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낮에 조무경이 장에서 가져온 국수집 셈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변에 변이 붙는 셈. 조무경이 종이 귀퉁이에 적어 둔 숫자들이었다.
"…어르신 셈, 제가 다시 맞춰 봤어요. 여기 이자 붙는 게, 그게…하루에 이만큼씩."
아이의 검지가 숫자 위를 짚고 있었다. 필묵을 물려받은 손이었다.
조무경은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아이를 보았다. 외상을 미안해하던 손이 아니었다. 이자를 세는 손이었다. 되찾겠다고 다짐한 손이었다.
아이가 그의 눈을 느끼고 올려다보았다. 조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셈판을 가져가지도, 덮지도 않았다.
"세 번 부었소?"
"…예. 국물 데워 놨어요. 어르신 오면 드시라고."
"먹읍시다."
두 사람은 한밤에 국밥을 나눠 먹었다. 아이는 크게 떴다. 조무경은 솥 위로 뜬 것을 걷어 냈다.
*
같은 밤, 곡물전 뒤편 천막.
방덕수는 등잔을 켜 두고 장부를 넘겼다. 낮에 국수 좌판에 앉아 국물 한 젓가락만 뜨고 간 노야를 떠올렸다. 값을 매기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오늘, 곡물전 거간 하나가 은근히 물어 왔다. 국밥집 노야가 삼 년 묵은 문서 하나를 캐고 다닌다고.
방덕수는 장부를 덮었다. 저울추를 손에 쥐었다가 도로 놓았다. 궤가 보관된 창고 쪽으로 눈이 갔다.
열어 본 적 없는 궤였다. 열지 않는 것이 그의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처음으로 그 궤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창고 문의 자물쇠를 확인했다. 두 번 당겨 보았다. 잠겨 있었다. 그런데도 손이 자물쇠에서 쉬 떨어지지 않았다.
닷새. 노야는 닷새라 했다. 방덕수는 등잔 심지를 낮췄다.
닷새를 기다릴 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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