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울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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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째 아침, 눈이 다시 왔다.
장은 서지 않는 날이었다. 오일장이 파한 뒤라 저잣거리는 좌판을 걷었고, 붙박이로 문을 여는 건 국밥집뿐이었다. 부뚜막에 불이 들었다. 국솥은 밤새 끓어 뽀얗지 않고 맑았다. 정만호가 낸 장국이었다. 간은 집간장으로 잡았다.
복단이 아침 일찍 뚝배기를 이고 왔다. 다리를 절었으나 얼굴이 붉었다.
"어르신." 복단이 뚝배기를 내려놓으며 말끝을 늘였다. "여각 마당에 사람이 셌거든요. 차 주인이 오늘 장부를 폈어요. 아 글쎄, 옛 장부가 아니라 새 장부더라고요. 표지가 허옇게 비었어요."
정만호는 국자를 젓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받아 적힌 게 있더냐."
"그게요." 복단이 목소리를 낮췄다. "값을 지운답디다. 이자 붙인 걸 도로 한 냥으로 돌린다고요. 짚신 노파 것도, 아낙들 것도요. 그런데—" 복단이 남설 쪽을 흘끗 보았다. "받는 자리마다 제 손으로 셈을 세더래요. 심부름꾼을 안 시키고요."
남설은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냈다. 한 번. 두 번. 손이 멎지 않았다.
"제 손으로 셈을 세는 건," 남설이 뚝배기를 상에 놓았다. 끝이 날카로웠으나 낮았다. "값을 도로 매기는 겁니다. 남의 사정을 저울에 얹던 손이요."
정만호가 국솥에서 몸을 돌렸다. 어깨가 결렸다. 그는 누르지 않았다.
낮이 기울어 차경이 왔다. 이번에도 옆구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손에 작은 것이 하나 들려 있었다. 접힌 종이 한 장. 차경이 그것을 부뚜막 옆에 내려놓았다.
"정 어른." 차경이 고개를 숙였다. "국 한 그릇 팔겠소. 값은 두 돈이지요."
남설이 국자를 잡은 채 그 종이를 보았다. 펴지 않았다.
"펴 보시구려." 차경이 자리에 앉았다. 무릎이 뻣뻣했다. "남 낭자가 여각에 적은 그 이름, 값이 비어 있어 사갈 수도 팔 수도 없더이다. 이십 년을 셈으로 살았는데, 셈이 안 되는 이름은 처음이라. 나흘을 그 앞에 앉아 있었소."
남설이 종이를 폈다. 어미의 획이 아니었다. 차경의 글씨였다. 제 이름 아래, 저잣거리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짚신 노파. 좌판 아낙 셋. 복단. 그 옆의 값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붉은 줄이 그어진 자리였다.
"지웠소." 차경이 국물을 떴다. "사들인 값을 도로 물려 놓았단 말이올시다. 이제 그 이름들은 어느 임자에게도 안 얹히오. 따져 보면, 손해지. 그런데—" 그가 수저를 멈췄다. "그 손해를 셈하려니, 저울이 안 움직입디다. 값을 매길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부뚜막이 조용했다. 국물만 끓었다.
"차 주인." 남설이 종이를 다시 접었다. 앞치마 안에 넣지 않고, 부뚜막 위에 그대로 두었다. "이건 값을 치른 게 아닙니다. 값을 놓으신 거지요. 저울을요."
차경이 남설을 보았다. 오래. 그러곤 엽전 두 돈을 상에 놓았다. 국밥 한 그릇 값이었다. 딱 그만큼.
"차 주인 이름 옆자리는," 남설이 국자를 다시 잡았다. "오늘도 비워 둡니다. 값은 아직요. 다만—"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냈다. "오늘은 지우신 이름만큼, 그 자리가 가벼워졌겠습니다."
차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국을 다 떠먹고, 수저를 뚝배기 안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러곤 일어섰다. 문간에서 부뚜막의 김을 한 번 보았다. 접힌 종이는 부뚜막 위에 남겨 둔 채였다. 옆구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눈이 처마에서 물이 되어 떨어졌다.
정만호가 그 종이를 집었다. 오래 궂은 날 어깨를 쑤셔 온 손이, 붉은 줄 그어진 이름들 위에서 멎었다. 그는 그것을 제 장부 쪽으로 옮겨 놓지 않았다. 부뚜막 불빛 아래 펴 둔 채로 두었다.
"저 종자가," 정만호가 낮게 말했다. "값을 치를 줄은 몰라도, 놓을 줄은 아는 놈이 됐구나."
"어르신이 십오 년 걸린 걸," 남설이 국자를 저었다. "차 주인은 나흘 만에 했습니다."
"놓는 건 나흘이면 돼." 정만호가 국솥으로 몸을 돌렸다. 낮은 무게중심이 발밑에 배어 있었다. "지고 사는 게 십오 년이지."
남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뚝배기를 하나 더 꺼냈다. 국물을 부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밥알 속까지 온기가 배도록.
바깥, 장은 서지 않았고, 국은 종일 끓었다. 부뚜막 위의 접힌 종이가, 김에 눅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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