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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 한 그릇의 값

3

외상장부

장이 서지 않는 날의 국밥집은 조용했다. 남설은 사흘째 문을 밀고 들어왔다. 첫날은 빈 그릇을 들고, 이튿날은 그릇 없이, 사흘째 되는 아침엔 아예 소매를 걷고 들어섰다. "값을 다음에 치르라 하셨지요." 남설이 말했다. "그 다음이 언젭니까." "됐다." "됐다는 값이 어딨습니까." 남설은 부뚜막 곁에 섰다. "먹은 만큼 일로 치르겠습니다. 파도 썰고 불도 살피지요. 봇짐 따라 열여섯 해, 남의 부뚜막 곁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정만호는 그 손을 보았다. 트고 갈라진 손. 그러나 뼈마디가 굵고 손놀림에 군더더기가 없을 손이었다. 그는 도마를 밀어 주었다. "파는 어슷하게. 굵으면 국물에서 겉돈다." 남설은 칼을 잡았다. 파를 눕히고 비스듬히 썰었다. 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서툴러서가 아니라 힘이 들쭉날쭉해서였다. 정만호는 곁눈으로 그 손을 보다가, 제 오른손을 무심코 오므렸다. 엄지 아래 두덩의 굳은살이 손바닥 안으로 접혔다. 복단이 부뚜막 앞에 쭈그려 앉아 장부를 폈다. 손때 묻은 낡은 책이었다. 이름과 금액이 세로로 빼곡했다. "어르신, 이번 장에 받을 것 좀 추려 놨거든요." 복단이 손가락으로 짚었다. "박 좌판이 여덟 돈, 옹기전 늙은이가 닷 돈에 쌀 두 되로 갈음하기로 했고. 아 글쎄, 짚신 삼는 노파는 또 미뤄 달라거든요. 이번 장만, 이번 장만 하면서 세 장째라." "둬라." 정만호가 국솥을 저었다. "노파는 다음 장에 받아라." "세 장이나 밀렸는데 또 두라고요?" 복단이 입을 삐죽였다. "어르신 이러시니까 차 주인이 외상장부를 빚이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받을 걸 안 받으면 그게 인심이 아니라 밑지는 장사거든요." 남설의 칼이 멎었다. 그 말이 귀에 걸린 듯했다. "세 장을 밀린 노파는," 남설이 물었다. "왜 밀립니까." 복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들이 지난가을 부역 나갔다가 못 돌아왔거든요. 노파 혼자 짚신을 삼는데, 겨울엔 그것도 안 팔리고." 남설은 다시 파를 썰었다. 이번엔 조금 느리게, 소리가 고르게 났다. 정만호는 장부를 끌어당겼다. 붓을 들지 않고, 손끝으로 짚신 노파의 이름 위를 한 번 훑었다. 지우지 않았다. 다만 그 옆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다음 장에 받을 것이라 적지도, 탕감이라 긋지도 않았다. 비워 두는 것도 셈이었다. "어르신." 남설이 도마를 밀어 놓으며 말했다. "장부에 이름을 적는다는 건, 그 사람 사정을 적는 것이더군요." 정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뚝배기에 밥을 담고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냈다. 한 번, 두 번. 김이 올라 서리 낀 문살에 닿았다. "먹어라. 오늘 일값이다." 남설은 앉지 않았다. 대신 국자를 들었다. "제가 하지요." 남설이 말했다. "토렴은 봐 두었으니 말입니다." 정만호는 국자를 넘겼다. 남설의 손이 국물을 뜨고 부었다. 한 번은 넘치고, 한 번은 모자랐다. 밥알에 온기가 고르게 배지 않았다. 정만호는 그 손목을 보았다. 손을 뻗어 잡으려다, 멈췄다. 남설의 손목 안쪽에도 트고 갈라진 자국이 있었다. 그 위에 제 손의 굳은살을 얹고 싶지 않았다. "급하다." 정만호가 말했다. "국물은 붓는 게 아니라 밥을 데우는 거다. 서두르면 겉만 뜨겁고 속이 차다." 남설은 다시 부었다. 이번엔 천천히. 밥알 사이로 국물이 스몄다. 문이 열렸다. 찬 기운이 발목을 감았다. 여각 심부름꾼이었다. 낯선 젊은이가 문지방에서 고개만 들이밀었다. "남 낭자를 여기서 보았다기에." 심부름꾼이 말했다. "차 주인께서 전하라 하셨소. 삼 년 전 약값에 이자가 붙어, 이번 장까지 셈을 안 하면 장부째 관에 넘기겠다고." 남설의 손에서 국자가 뚝배기 전에 부딪쳤다. 국물이 튀었다. "얼맙니까." 남설이 물었다. "두 냥 닷 돈." 심부름꾼이 말했다. "빌린 건 한 냥이었으나, 삼 년이니." 남설의 얼굴이 굳었다. 두 냥 닷 돈. 국밥 한 그릇이 두 푼이었다. 트고 갈라진 손이 국자를 쥔 채 하얘졌다. 정만호는 심부름꾼을 보았다. 그러곤 부뚜막 아래에서 장부를 다시 끌어당겼다. 이번엔 붓을 들었다. 먹을 찍었다. 남설의 이름을 적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제 이름 옆, 빈 줄에 무언가를 적었다. "가서 전해라." 정만호가 말했다. "그 셈, 내가 받아 두겠다고." 심부름꾼이 눈을 껌뻑였다. "어르신께서요?" "됐다. 그리 전해라." 문이 닫혔다. 남설이 정만호를 보았다. 끝이 날카로운 눈이었다. "어르신." 남설이 물었다. "왜 남의 빚을 받아 두겠다 하십니까. 이걸로 저를 여기 묶으시려는 겁니까." 정만호는 붓을 놓았다. 먹이 마르기 전이었다. "묶는 게 아니다." 그가 장부를 덮었다. "빚은 값을 치를 사람이 정하는 거다. 나는 자리만 옮겨 둔 것이다. 차 주인에게서 나에게로." "어르신에게 진 빚은 어찌 갚습니까." 정만호는 국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궂은 날도 아닌데 오른 어깨가 결렸다. 그는 왼손을 들었다가, 어깨에 닿기 전에 내렸다. "천천히 갚아라." 그가 말했다. "국밥집 빚은 이자가 안 붙는다." 남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국자를 다시 들어 토렴을 마쳤다. 이번엔 손이 고르게 움직였다. 밥알에 온기가 속까지 배어들었다. 복단이 장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정만호가 적은 글씨를 보았다. 무어라 물으려다, 말끝을 삼켰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제 소매를 만졌다. 그 소매 안에는 차경의 여각에 진 쌀 외상이 있었다. 복단은 부뚜막의 불씨를 괜히 한 번 더 뒤적였다. 바깥 어딘가, 아직 서지 않은 장 자리에 눈이 그쳤다. 닷새 뒤면 어귀가 사람으로 찰 것이었다. 그 장에서, 두 냥 닷 돈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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