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장이 서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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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섰다.
눈은 그쳤으나 하늘은 여전히 낮았다. 어귀에 좌판이 하나둘 펴지고, 등짐장수들이 짐을 부렸다. 국솥에서 김이 올랐다. 정만호는 여느 날처럼 아궁이를 지폈다. 오른 어깨가 결렸다. 그는 걸음을 미리 아껴 두려는 사람처럼 왼손으로 국자를 옮겨 쥐었다.
복단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다리를 절며, 눈을 털며.
"어르신." 복단의 말끝이 늘어지지 않았다. 그것부터가 여느 날과 달랐다. "여각 처마 밑에 사람이 늘었거든요. 차 주인이 오늘 옛 장부를 상 위에 펴 놓았다고… 아 글쎄, 장 서는 날 장부를 왜 꺼내겠어요."
정만호는 국자를 놓지 않았다. 국물을 저었다. 한 번, 두 번.
"복단이." 그가 낮게 말했다. "쌀 외상, 여각에 얼마 남았느냐."
복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지난겨울 진 빚이었다. 소문을 물어다 준 값으로 셈이 미뤄져 온 빚이기도 했다. 복단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접었다. 석 냥.
"오늘 안으로 내 장부에 옮겨 적으마." 정만호가 붓을 들었다. "임자를 바꿔 둔다. 차 주인이 널 저울에 못 얹게."
복단의 눈이 붉어졌다. 그는 말끝을 늘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묘한 균열 하나가, 국물 온기에 조용히 녹았다.
남설이 뚝배기 두 개를 상에 놓았다. 하나를 복단 앞으로, 하나를 정만호 앞으로. 토렴한 밥알에 온기가 속까지 배어 있었다. 서두르지 않은 손이었다.
"복단 아저씨." 남설이 물었다. "여각 마당에 사람이 얼마나 섭니까."
"많어. 장날이라." 복단이 국물을 삼켰다. "허나 남 낭자, 사람이 많다고 다 낭자 편은 아니거든요. 차 주인한테 외상 진 사람이 반이야. 그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적으면…"
"그래서 갑니다." 남설의 끝이 날카로웠다. "빈 여각에서 적으면 어르신처럼 비워 두는 셈이 되지요. 사람이 봐야, 적힌 이름이 값을 합니다."
복단은 정만호를 보았다. 정만호는 국솥만 저었다.
남설이 앞치마를 풀었다. 품속의 접힌 종이를 만졌다. 어미의 삐뚤한 획이 든 자리였다. 그러곤 문간에 걸린 노파의 짚신을 한참 보았다. 억센 겨울 짚. 갈라진 손이 삼은 것. 임자가 둘이라 사갈 값이 없는 빚.
"저 짚신은," 남설이 말했다. "노파가 갚았고, 어르신이 지켜 준 겁니다. 헌데 어미 빚은 아직 임자가 없습니다. 벤 사람만 적히고, 붙인 사람은 이름이 없으니까요."
정만호가 국자를 놓았다. 식은 뚝배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밥알 속까지 온기가 배도록. 그 뚝배기를 남설 앞에 놓았다.
"먹고 가라." 그가 말했다. "빈속에 적은 이름은 떨린다."
남설은 뚝배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국물을 오래 삼켰다. 데지 않을 만큼, 그러나 속까지 뜨거운 온기였다.
"어르신은." 남설이 술을 놓았다. "뒤에 서 계십시오. 적는 건 제가 합니다."
정만호는 오른 어깨를 눌렀다. 스스로. 그러곤 처음으로, 벽에 세워 둔 지게작대기를 짚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낮은 무게중심이 걸음에 배어 나왔다. 십오 년을 국솥 곁에 묻어 두었던 보법이, 눈 위로 한 발 나섰다.
"앞장은 네가 서라." 그가 말했다. "나는 값이 매겨질 때 곁에 있으마."
복단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문을 열어 주었다.
바깥 어귀에 장꾼들이 오갔다. 여각 처마 밑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안쪽 상 위에, 두꺼운 옛 장부 한 권이 펼쳐진 채였다. 마지막 장은 비어 있었다.
정만호가 국솥의 불을 줄였다. 종일 끓일 국이었다. 돌아와서도 토렴할 국이었다.
두 사람은 눈 위로 걸었다. 앞과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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