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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12

사 초의 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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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혀가 입천장에서 떨어지는 감각도, 마지막 음절 뒤에 숨을 들이마시는 습관도 나와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안이 내 앞에 섰다. 손을 뻗지 않은 채 눈동자와 입술의 움직임부터 확인했다. “윤 원장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들립니다.” 내가 대답했다. 사 초 뒤 내 입이 다시 움직였다. “들립니다.” 두 번째 대답에는 뜻이 없었다. 음성과 호흡과 입술의 모양만 남은 복사였다. 태주가 손전등을 바닥으로 내렸다. 빈 의자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그의 빛을 따라 길어졌다가 사라졌다. 손전등을 끄자 그림자는 다시 나타났다. “조명이 두 개입니다.” 그는 천장을 비췄다. 육안으로는 하나처럼 보이던 등이 서로 다른 간격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먼저 켜진 빛이 빈 의자의 그림자를 만들고, 사 초 뒤 벽 안쪽의 빛이 사람 모양을 덧씌웠다. 눈에는 두 장면이 겹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는 살아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은 내 몸에서 반복되는 두 번째 움직임이었다. “초자연 현상은 아닙니다.” 지안이 말했다. “그쪽이 더 낫군요.” 태주가 대답했다. “증거로 남길 수 있으니까.” 그는 두 조명의 점멸을 각각 촬영했다. 지안은 휴대용 모니터의 시간을 맞췄다. 첫 번째 빛, 그림자, 내 입술의 움직임 사이에는 모두 정확히 사 초가 있었다. 유리벽 안쪽 화면이 바뀌었다. `REMOTE REPLAY 13` `BUFFER 04.0 SEC` 그 아래에 열두 개의 이름이 나타났다. 박준호, 민도윤, 민소정. 창고와 병원에서 본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이어졌다. 회색 정장 남자만 이름 대신 `귀환체`라고 적혀 있었다. 각 이름 옆에는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모두 그들이 기억을 잃은 시각이었다. “빈칸을 저장한 겁니다.” 내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한 말이었다. 사 초가 지나기 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화면이 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깜빡였다. 지안이 이름 하나를 눌렀다. 민도윤의 기록이 열렸다. `행동 명령 전 기억 4.0초 제거` `구제 반응 조각 07 삽입` “기억을 지운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지안이 말했다. “명령이 들어갈 자리를 만든 겁니다.” 도윤이 회색 정장 남자와 접촉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 것도, 소정이 창고로 끌려간 경위를 잃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세림바이오는 사람의 기억에서 사 초씩 비워 냈다. 그 빈칸에 내 손의 움직임과 맥의 반응을 잘라 넣었다. 그들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선택을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화면 오른쪽에 저장 용량이 표시되었다. 열한 명의 빈칸을 합쳐도 일 분이 되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통째로 복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러나 사람을 해치는 데에는 한 번의 망설임이면 충분했다. 태주가 기록 장치를 찾기 위해 유리벽 옆의 덮개를 열었다. 안에는 전선 대신 투명한 섬유 다발이 지나가고 있었다. 섬유 끝은 열세 번째 선반과 의자, 복도 천장으로 갈라졌다. “주 전원을 끊으면 됩니까?” “이전에도 전원을 내려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 끊어야 합니까?” “재생할 기준을 없애야 합니다.” 내가 말하자 화면에 새로운 파일이 열렸다. `REFERENCE: YHJ-SNOWVALLEY` 눈 덮인 설곡이 다시 나타났다. 쓰러진 첫 번째 사람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이 확대되었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한쪽에서 숫자가 올라갔다. 일 초. 이 초. 삼 초. 사 초. 그 뒤에야 과거의 내가 손을 놓았다. 살릴 수 없는 사람의 맥이었다. 나는 죽음을 확인하고 다음 사람에게 갔다. 눈밭에는 아직 숨이 붙은 사람이 열한 명 있었다. 화면 속 기록은 그 사 초를 반복했다. `구제 판정창 4.0초` `판정 종료 후 다음 대상 전환` 나는 오래전 눈밭의 냄새를 기억했다. 피가 얼기 시작할 때 나는 쇠 냄새가 아니라 젖은 천 냄새. 첫 사람의 손목에서 손가락을 떼던 순간, 등 뒤에서 들리던 얕은 숨. 그때 나는 한 사람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열한 명에게 간 것이었다. 세림바이오는 그 차이를 기록하지 못했다. 손을 놓았다는 동작과 사 초라는 시간만 가져갔다. 왜 놓았는지는 잘라 냈다. “그래서 사 초였군요.” 지안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입이 먼저 벌어지려 했다.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 속 과거의 내가 손을 놓은 지 사 초가 지나고 있었다. “놓지 마십시오.” 두 번째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천장의 목소리와 내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모두 살릴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 지안의 손목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왼손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왼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두 개의 맥을 만들어 교란한 방법을 이미 장치가 배운 뒤였다. 지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누구를 살리려는 겁니까?” 그 질문은 기록에 없었다. 내 두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화면이 답을 찾는 동안 사 초의 빈칸이 생겼다. “밖의 열두 명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의료진이 보고 있습니다.” “저 신호가 다시 들어가면—” “의료진이 보고 있습니다.” 지안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여기 있는 환자는 누구입니까?” 나는 의자를 보았다. 빈 의자에는 환자가 없었다. 유리벽에도 없었다. 태주는 섬유 다발 앞에 서 있었고, 지안은 내 앞에 있었다. 내 몸이 다시 그의 손목을 향해 움직였다. 그제야 답을 알았다. “접니다.” 화면이 멈췄다. `ROLE CONFLICT` 열세 번째는 의선의 구제 반응을 재생하도록 만들어졌다. 내 몸이 치료하는 쪽에 있을 때만 다음 동작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환자가 되는 기억은 그 안에 없었다. 나는 무림에서 삼십 년 동안 다른 사람의 맥을 짚었다. 현대에 돌아온 뒤에도 같았다. 다치고 쓰러져도 먼저 손을 내민 쪽은 늘 나였다.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긴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사하지 못했다. “서 선생님.” “네.” “저를 환자로 보십시오.” 지안이 처음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이번 접촉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맥을 느끼려 하지 않았다. 손목이 꺾이지 않도록 받치고, 내 몸을 의자 반대쪽 벽에 기대게 했다. 내 가슴에 붙은 모니터를 확인한 뒤 호흡을 세었다. “윤해진 환자분, 지금부터 제 지시를 따르십시오.” 그의 호칭이 바뀌었다. 원장님이 아니라 환자분이었다. “눈을 감지 마십시오. 숨을 억지로 바꾸지 마십시오. 손은 제가 잡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 초 뒤 내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화면 속 설곡의 내가 첫 번째 손목을 놓았다. 그다음 장면이 이어져야 했지만, 화면은 살아 있는 열한 명에게 넘어가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기 때문이다. `REFERENCE LOST` 천장의 두 조명이 동시에 꺼졌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내 입술을 움직이던 힘도 풀렸다. 지안은 곧바로 손을 놓지 않았다. 맥박과 동공을 다시 확인하고, 내가 스스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본 뒤에야 천천히 손을 뗐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윤해진입니다.” “직업은요?”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은 꺼져 있었고 의자는 비어 있었다. 밖에서는 열두 명의 환자를 여러 의료진이 지키고 있었다. 누구도 나 혼자 살려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환자입니다.”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가 섬유 다발에서 작은 저장 장치를 떼어 냈다. 손바닥만 한 투명판 안에 미세한 선들이 겹쳐 있었다. 그는 전원을 분리하지 않고 그대로 증거 봉투에 넣었다. “이 안에 열세 번째가 있습니까?” “전부는 아닙니다.” 나는 꺼진 화면을 보았다. “사람 한 명이 아니라, 제 선택에서 이유를 뺀 기록입니다. 손을 놓지 않는 의사, 질문하지 않는 의사, 살리라는 명령만 따르는 의사.” “그게 사람 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의사처럼 움직이는 살인자가 됩니다.” 태주는 대답 대신 저장 장치의 봉투를 두 겹으로 감쌌다. 열세 번째 선반 아래에서 프린터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 종이에는 글씨가 아니라 손의 궤적이 인쇄되어 있었다. 내 필체를 만든 획들이었다. 문자 획은 내가 진료 기록을 쓰던 손에서 가져왔다. 숫자는 다른 기록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화면 구석에 출처가 표시되어 있었다. `문자 기준: 윤해진 진료차트` `숫자 기준: 보호자 동의서` 보호자 동의서 아래에는 외삼촌의 서명이 있었다. 숫자 3의 가운데 획이 두 번 끊겨 있었다. 내 글씨를 흉내 낸 쪽지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었다. 내 손의 문자와 외삼촌의 숫자를 이어 붙인 합성 필체였다. 태주가 종이를 촬영했다. “외삼촌이 이 장치를 만든 겁니까?” “확인된 것은 서류를 썼다는 사실뿐입니다.” “여기까지 와서도 구분하시는군요.” “구분하지 않으면 저들과 같아집니다.” 그때 지안의 모니터에 외부 신호가 돌아왔다. 차폐가 풀린 것이 아니었다. 건물 안쪽에서 별도의 유선 회선이 켜졌다. 구급차의 의료진이 보낸 문자였다. `열두 명 모두 의식 회복. 기억 혼선 있음. 생명징후 안정.` 그 아래에 도윤이 한 말을 받아 적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사 초가 없어졌어요.`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기억에서 비워 낸 사 초가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빈칸에 들어 있던 내 움직임이 빠져나간 것이었다. 도윤과 소정과 다른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하지 않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태주가 출입구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올라가서 환자들부터 확인하시죠.” 나는 벽에서 몸을 떼려 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지안이 팔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는 먼저 잡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네.” 내가 대답하자 그가 팔을 받쳤다. 우리는 열세 번째 선반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층 표시에는 다시 `B3 기록 보관실`이 떠 있었다. 더 이상 맥박의 지연을 주소로 삼지 않았다. 계단을 한 층 올랐을 때 아래에서 프린터 소리가 났다. 태주가 멈췄다. “또 종이가 나온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 초를 세었다. 아무 목소리도 따라오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내려가 확인했을 때 열세 번째 선반에는 마지막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REMOTE REPLAY 13 종료`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학습 모델 전송 완료` 전송된 목적지는 비어 있었다. 태주가 무전기를 켰다. 이번에는 잡음 사이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 형사님, 검은 승합차가 움직입니다.” “위치 말해.” “청우한의원이 아니라 반대 방향입니다. 도심 쪽으로 갑니다.” 태주가 나를 보았다. 열세 번째는 이곳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 내가 환자가 되는 동안, 내 선택을 흉내 낸 기록은 다른 몸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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