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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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실은 조사실보다 작았다.
책상 하나와 의자 셋. 창이 하나 있었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검사는 사십 대 중반이었고 서류를 세 뭉치 쌓아 놓고 있었다.
"윤해진 선생님."
"네."
"오늘은 조서를 새로 쓰는 게 아니라 기존 진술을 정리하는 자리입니다."
"알겠습니다."
그가 첫 번째 뭉치를 열었다.
"팔월 십일일 진술에서, 응급실 남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했습니다."
"그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모니터에 안 잡히는 떨림이요."
검사가 펜을 놓았다.
"그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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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지금 선생님을 몰아붙이려는 게 아닙니다."
"압니다."
"저쪽 변호인이 이 대목만 붙잡고 늘어집니다. 손끝으로 뭘 느꼈다는 진술은 증거로 못 쓴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검사가 나를 봤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
"제가 손끝으로 뭘 느꼈다는 건 저만 압니다. 저만 아는 건 증거가 아닙니다."
"그럼 진술을 정정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방금 동의한다고 하셨습니다."
"증거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 안 합니다."
검사가 서류에 뭔가를 적었다.
"그 둘을 구분하시는군요."
"구분해야 합니다."
"법정에서는 안 나눕니다."
"그럼 증거에서 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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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펜을 놓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 진술 중에 맥으로 읽었다는 부분은 증거 목록에서 빼십시오."
"선생님 진술은 검찰 측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빼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황이 약해집니다."
"약해지는 만큼만 쓰십시오."
검사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화면 로그가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간호사 셋이 있고, 도윤 씨 차트에 뜬 오더가 있고, 규칙세트 배포 기록이 있습니다. 그건 다 저 말고 다른 데서 나온 것들입니다."
"…….."
"제 손끝은 그중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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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뭉치를 그가 열었다.
내 진료기록부 사본이었다.
"이건 어제 임의제출로 받았습니다."
하성규 씨 칸이 위에 있었다.
`맥 고름. 결체 없음. 이상 소견 없음.`
`환자 진술: 자신의 맥이 자신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함. 다섯 달 지속.`
"이거 선생님이 쓰신 겁니다."
"썼습니다."
"윗줄은 선생님이 확인한 것이고 아랫줄은 그 사람이 말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저희는 윗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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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듣고 창 쪽을 봤다. 블라인드 틈으로 주차장이 조금 보였다.
"어디에 쓰십니까."
"하성규 씨 신분 판단에요."
"…….."
"몸에 아무것도 없고, 조종 흔적이 없고, 본인이 패치를 붙였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입니다."
"다섯 달 지났으니까 없는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요."
"아는 것과 쓸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검사가 서류를 정리했다.
"선생님이 아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만 아는 건 증거가 아니라고요. 지금은 반대로 갑니다. 종이에 적힌 건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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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네."
"제 기록을 쓰시려면 두 줄을 같이 쓰십시오."
"아랫줄은 진술입니다."
"제 진료기록부에 있는 진술입니다. 제가 받아 적었습니다."
"그건 전문(傳聞)입니다."
"윗줄도 제가 손으로 짚어서 쓴 겁니다."
검사가 나를 봤다.
"윗줄은 의학적 소견이고 아랫줄은 남의 말입니다."
"같은 종이에 있습니다."
"종이가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적고 싶었다.
"그럼 제 기록은 증거가 아니라 재료군요."
"…….."
"쓸 데를 정하고 필요한 줄만 잘라 쓰는 거요."
검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증거가 그렇게 쓰입니다, 선생님."
"검사님."
"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적을 겁니다."
"무엇을요."
"그 사람 맥이요. 오시는 날마다요."
검사가 서류 뭉치에서 손을 뗐다.
"소견이 계속 없으면 계속 없다고 적으실 텐데요."
"적습니다."
"그게 쌓이면 그쪽에 유리해집니까, 저희한테 유리해집니까."
"모르겠습니다."
"…….."
"다섯 달 동안 아무것도 없다가 갑자기 뭐가 있으면 그건 뭔가 있는 겁니다. 끝까지 없으면 없는 거고요. 어느 쪽이든 한 번 짚고 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검사가 처음으로 잠깐 웃었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선생님, 재판은 그때까지 안 기다립니다."
"압니다."
"그럼 왜 하십니까."
"재판 끝나고도 그 사람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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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 하성규가 앉아 있었다.
오늘 같이 불린 모양이었다. 검은 점퍼에 모자를 들고 있었고, 벽에 붙은 의자 세 개 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았다.
"먼저 들어가셨습니까."
"아침에요." 그가 말했다.
"…….."
"신분이 바뀔 수도 있답니다."
"들었습니다."
"원장님 기록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무릎에 손을 올려놓았다.
"제가 쓴 게 맞습니다."
"압니다."
"고쳐 달라고 하시면 못 고칩니다."
"안 하겠습니다."
그가 모자를 무릎 위에서 한 번 돌렸다.
"고치면 원장님 종이가 다 못 쓰게 되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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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복도 끝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누가 지나갔고 다시 조용해졌다.
"하성규 씨."
"네."
"어제 검사님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붙였다고 했습니다."
"조종당하셨다고는요."
"안 했습니다."
"…….."
"그 말 하면 편해집니다. 아는데 안 했습니다."
나는 그를 봤다.
"왜요."
"원장님."
"네."
"저를 열두 번째라고 하지 마십시오."
"…….."
"그러면 제가 붙인 열한 명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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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뭘요."
"붙이던 걸요."
그가 모자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열한 명 다 기억합니다."
"…….."
"박준호 씨는 창고 문 앞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고개를 들었고요."
"…….."
"뭐라고 물었는데 제가 대답을 안 했습니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도윤도 소정도 준호도 그 넉 달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원에서 그렇게 설명받았고 진단서에도 그렇게 적혔다. 기억이 지워진 것이 그들이 조종당했다는 증거였다.
이 사람은 기억한다.
"하성규 씨."
"네."
"기억나신다는 걸 검사님한테 말씀하셨습니까."
"했습니다."
"…….."
"그게 제일 불리한 대목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목소리를 안 낮췄다. 복도에는 우리 둘뿐이었지만 낮출 수도 있는 자리였다.
"안 하셔도 됐습니다."
"압니다."
"…….."
"그런데 열한 명은 자기가 뭘 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벽을 봤다.
"저는 압니다. 저 하나는 알고 있어야 그 사람들이 안 한 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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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찾지 못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열두 번째가 맞다. 설곡 화면의 얼굴 없는 사람도 그였고, 사 초 지연을 처음 뒤집은 것도 그의 맥이었고, 지하 선반 열두 번째 칸에 `귀환체`라고 적혀 있던 것도 그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열한 명의 귀 뒤에 손을 댄 것도 사실이다.
둘 다 사실인데 한쪽을 말하면 다른 쪽이 흐려진다.
법정은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골라야 판결이 나오니까.
"하성규 씨."
"네."
"둘 다 적겠습니다."
"어디에요."
"제 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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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그가 왔다.
여덟 시 사십 분이었고 어제와 같은 옷이었다.
"진료 되십니까."
"됩니다."
접수대에 앉히고 진료기록부를 폈다. 이름 칸은 이미 있었다. 어제 적어 뒀다.
손목을 짚었다.
고르게 왔다. 어제와 같았고 그저께와도 같았다.
"어떻습니까."
"고릅니다."
"또 그 말씀이시군요."
"또 그렇습니다."
나는 적었다.
`맥 고름. 결체 없음. 이상 소견 없음.`
두 번째였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본인 자발 내원. 진료비 지불. 진술 정정 요구 없음.`
"이건 뭡니까." 그가 물었다.
"오신 게 사실이니까요."
"…….."
"소견 없음만 적으면 몸 얘기만 남습니다. 오신 것도 같이 적으면 사람 얘기가 됩니다."
"그거 잘라서 쓰면요."
"자르는 건 저쪽 일입니다."
나는 펜을 놓았다.
"저는 안 자르고 적는 사람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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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만 원을 냈다.
어제와 같은 만 원짜리 두 장이었다. 접힌 자국이 여러 번인 돈이었다.
영수증을 끊어 이름을 적었다.
카본지 사본이 서랍에 남았다. 어제 것 아래에 오늘 것이 겹쳤다.
두 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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