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세 번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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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도윤은 화요일 여섯 시에 왔다. 문을 연 지 십 분도 안 됐을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가게를 한 바퀴 봤다. 접수대와 진열장과 진료실 문을 차례로 보고, 마지막에 벽에 붙은 종이를 봤다.
`이 진료실의 판정 기준`
한참 봤다.
"아픈 데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압니다."
"오면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됩니다."
나는 접수대에서 일어나 의자를 하나 더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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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앉아서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무릎을 두 번 문질렀다.
"형사님한테 들었습니다."
"…….."
"그 사람 이름이 나왔다고요."
"나왔습니다."
"여기서 나왔다고 하시더군요."
"진료 받으러 오셨습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또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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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 초침이 도는 소리가 났다.
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대로 있었다.
"원장님."
"네."
"그 사람이 저를 기억한답니까."
나는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했어야 하는 질문인데 안 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진료 중에 들으신 겁니까."
"…….."
"그러면 안 되죠."
도윤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 손을 봤다.
"근데 안 된다고 하시니까 기억한다는 뜻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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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고, 맞다고 하면 진료 중에 들은 말을 옮기는 게 된다.
도윤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발끝을 두 번 움직였다. 신발 앞코가 바닥을 스쳤다.
"저는 하나도 기억 안 납니다."
"압니다."
"넉 달을 통째로요."
"…….."
"처음에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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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제가 뭘 했는지 모르니까 사과를 못 합니다."
"도윤 씨가 하신 게 아닙니다."
"그건 병원에서 하는 말이고요."
"…….."
"창고에 열두 명이 있었으면 저도 그중 하나고, 그중 하나면 누군가한테 뭔가를 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기록에는 없습니다."
"기록에 없는 게 없었다는 뜻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장은 다섯 달 동안 내가 계속 만난 문장이었다. 방향만 바뀌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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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이 일곱 시쯤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문 앞에서 그가 섰다.
"원장님."
"네."
"그 사람 여기 또 옵니까."
"옵니다."
"언제요."
"모릅니다. 오면 옵니다."
도윤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
놓고 나서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기다려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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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은 한 시간 사십 분을 기다렸다.
그동안 손님이 넷 왔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도윤은 일어나서 벽 쪽으로 비켰고, 손님이 나가면 다시 앉았다. 네 번 다 그렇게 했다.
두 번째 손님이 편지지를 사는 데 오래 걸렸다. 진열대 앞에서 색깔을 고르는 동안 도윤은 서 있었다. 앉으라고 했는데 앉지 않았다.
일곱 시 사십 분에 내가 물었다.
"저녁 드셨습니까."
"아니요."
"편의점 다녀오십시오. 오면 제가 잡아 두겠습니다."
"안 오면요."
"안 오면 내일 또 기다리시면 됩니다."
도윤은 안 갔다.
여덟 시 십 분에 진료실에서 침을 정리하고 나오니 그는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를 보지도 않았고 벽시계를 보지도 않았다.
여덟 시 사십 분에 문이 열렸다.
도윤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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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규가 모자를 벗다가 멈췄다.
도윤을 봤다.
도윤이 일어섰다.
둘 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접수대 뒤에 서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안 했다.
냉장고가 한 번 돌았다.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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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규가 모자를 마저 벗었다.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민도윤 씨."
"네."
"…….."
도윤이 한 걸음 나왔다. 하성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기억하십니까." 도윤이 물었다.
"기억합니다."
"제가 어디 있었습니까."
하성규의 손이 모자를 조금 구겼다.
"창고 안쪽입니다."
"…….."
"문에서 보면 왼쪽 두 번째 줄이고, 그 줄에서 세 번째 자리입니다."
도윤이 그 말을 들었다.
듣고 나서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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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세지 않았다. 벽시계는 뒤에 있었고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도윤은 서 있었고 하성규도 서 있었다.
밖에서 차가 두 대 지나갔다. 두 번째 차는 창을 열고 있었는지 음악 소리가 잠깐 들어왔다가 나갔다.
진열대 위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오래된 등이라 가끔 그런다. 아무도 그걸 보지 않았다.
도윤의 어깨가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세 번째 자리요."
"네."
"그게 제 자리였습니까."
"…….."
"누가 정했습니까."
"제가 정했습니다."
도윤이 눈을 감았다 떴다.
"왜 거기였습니까."
하성규가 처음으로 눈을 내렸다.
"문에서 먼 쪽부터 채웠습니다."
"왜요."
"가까운 사람이 먼저 일어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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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이 의자에 앉았다.
앉으면서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사람의 동작이었다.
하성규는 계속 서 있었다.
나는 물을 한 잔 따라 도윤에게 줬다. 도윤이 받았고 마시지는 않았다.
컵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저는 그날 뭘 했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앉아 계셨습니다."
"그것만요?"
"제가 갔을 때 고개를 드셨습니다."
"…….."
"뭐라고 물으셨는데 제가 대답을 안 했습니다."
도윤이 컵을 내려놓았다.
"제가 뭐라고 물었습니까."
하성규가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여기 몇 시까지 있어야 되냐고 물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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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이 웃었다.
웃는 소리가 났는데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한 번 나오고 멈췄다.
"그거 제가 할 말이네요."
"…….."
"저 그때 다음 날 아침에 면접이 있었습니다."
하성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기억이 없는데 그건 압니다. 안 간 것도 알고요. 왜 안 갔는지를 몰랐습니다."
도윤이 컵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마셨다.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무릎에 놓았다.
"이 년 반 준비한 데였습니다."
"…….."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고요."
"…….."
"근데 안 간 건 압니다."
하성규가 모자를 쥔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 들으려고 기다린 거 아닙니다."
"…….."
"어디 앉아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
"이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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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그 뒤로 십 분쯤 더 그 자리에 있었다.
말은 거의 없었다.
도윤이 한 번 "그 사람들도 다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었고 하성규가 "합니다" 하고 답했다. 그게 다였다.
도윤이 먼저 일어섰다.
가면서 하성규 옆을 지나갔다. 어깨가 스칠 거리였는데 둘 다 비키지 않았고 부딪히지도 않았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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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규가 그제야 접수대 앞에 앉았다.
"진료 되십니까."
"됩니다."
손목을 짚었다.
고르게 왔다.
세 번째였다.
`맥 고름. 결체 없음. 이상 소견 없음.`
적고 나서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본인 자발 내원.`
펜을 놓으려다 한 줄을 더 적었다.
`민도윤 씨와 대면. 환자가 먼저 이름을 부름.`
"이것도 적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적습니다."
"이건 진료가 아닌데요."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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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만 원을 냈다.
영수증을 끊었다. 이름 칸에 세 글자를 적고, 뜯어서 그에게 줬다.
카본지 사본이 아래에 남았다.
서랍을 열었다.
어제 것과 그제 것이 겹쳐 있었다. 그 위에 오늘 것을 올렸다.
세 장이 됐다.
먹지에 눌린 글씨는 위로 갈수록 흐려진다. 맨 아래 첫 장이 제일 진하고 오늘 것이 제일 옅다.
세 장을 꺼내 접수대에 늘어놓았다.
첫 장은 이름 세 글자가 또렷하다. 그가 처음 말한 날 것이다. 그날 나는 이 초쯤 걸려서 적었다.
둘째 장은 조금 흐리다. 검사실에 다녀온 날이다.
셋째 장은 획이 가늘다. 손에 힘이 덜 들어갔다. 오늘 나는 이 이름을 세 번째로 적었고, 세 번째쯤 되면 손이 익어서 힘을 덜 준다.
같은 이름이 세 번 눌려 있었다.
날짜만 다르고 나머지가 같았다.
나는 그것을 한참 봤다.
봉투도 아니고 진술서도 아니고 그냥 영수증 사본이다. 법정에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만 원짜리 진료를 세 번 받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증명하지 않는 것을 나는 서랍에 넣었다.
넣고 나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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