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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을 짚으면 살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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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진료

간판 아래 아크릴 판을 새로 만든 것은 팔월이었다. 일 년 만이었다. 글자가 다 지워져서 밤에 안 보였고, 지나가던 사람이 문 앞까지 왔다가 그냥 간 적이 두 번 있었다. 새 판에도 같은 네 글자를 넣었다. 야간 진료. 밑에 한 줄을 더 넣을까 하다가 안 넣었다. 넣으면 뭐라고 넣어야 할지 몰랐고, 모르는 걸 간판에 적으면 안 된다. --- 대법원은 유월에 상고를 기각했다. 삼 년이 확정됐고 배준상은 칠월에 수감됐다. 태주가 알려 줬다. 전화로 짧게 말하고 끊었다. "끝났습니까." "형사는 끝났습니다." "민사는요." "유족 두 분이 준비 중입니다." "…….." "그건 몇 년 갑니다." --- 하성규는 사월부터 안 온다. 마지막 진료가 삼월 말이었다. 스물아홉 번째였고 그날도 맥이 고르게 왔다. 그날 그가 말했다. "원장님, 저 이제 안 와도 될 것 같습니다." "안 오셔도 됩니다." "…….." "아프면 오십시오." "아프면 오겠습니다." 그가 이만 원을 냈고 나는 영수증을 끊었다. 스물아홉 장이 됐다. 그가 문 앞에서 섰다. "원장님." "네." "제 이름 스물아홉 번 쓰셨습니다." "…….." "그거 다 세 봤습니다." --- 그 뒤로 한 번 연락이 왔다. 칠월에 문자였다. `경기도 쪽으로 갑니다. 물류센터 정직원 됐습니다.` `축하합니다.` `영수증은 가져갑니다.` `네.` `혹시 나중에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나는 답을 쓰다가 지웠다. 필요할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했는데 없었다. 재판은 끝났고 그의 형은 집행유예로 남았고 그 종이는 이제 아무 데도 안 쓰인다. `필요 없습니다.` `가지고 계십시오.` --- 서랍 안쪽 칸에는 카본지 사본 스물아홉 장이 클립으로 묶여 있다. 가끔 서랍을 열 때 손에 걸린다. 버릴까 하다가 안 버렸다. 진료 기록 보존 기간이 십 년이라 어차피 십 년은 둬야 한다. 십 년 뒤에 버릴지는 그때 정하면 된다. --- 팔월 셋째 주 목요일 밤이었다. 열한 시 사십 분이었고 그날 마지막 환자가 나간 뒤였다. 나는 접수대에서 진료기록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밖에서 무언가가 쓰러졌다. 쿵. --- 문을 열었다. 여자가 문턱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삼십 대 중반쯤이었고 우산은 없었다. 비가 안 오는 날이었다. "진료…… 끝났습니까?" "아직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부축해서 대기실 의자에 앉혔다. 산소포화도와 혈압부터 확인했다. 맥박이 빨랐고 혈압은 정상 아래쪽이었다. 체온은 정상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 "성함이요." "조현주요." 나는 접수대에서 진료기록부를 가져와 이름 칸을 채웠다. --- "어디가 가장 아프십니까." "명치가요." "언제부터요." "두 시간쯤 됐습니다." "오늘 뭐 드셨습니까." "저녁에 회식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톱과 눈동자와 목 주변을 봤다. 왼쪽 귀 뒤를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일 년 동안 나는 환자를 볼 때마다 그 자리를 봤다. 사백 명쯤 봤고 사백 번 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봤다. --- 손목을 잡았다. 맥을 짚었다. 빨랐다. 빠른 것 말고는 없었다. 결체도 없고 깊은 곳에서 밀려 나오는 힘도 일정했다. 살의는 없었다. 명령도 없었고 남의 리듬도 없었다. 일 년 반 전에 나는 이 손에서 그런 것들을 들었다. 지금은 안 들린다. 안 들리는 게 이 손이 무뎌져서인지 세상에서 그것이 없어져서인지 나는 모른다. --- 모르는 채로 나는 물었다. "토하셨습니까." "아니요." "등으로 뻗치는 통증은요." "없습니다." "왼팔이나 턱은요." "괜찮습니다." "…….." "식은땀은 안 나십니까." "안 납니다." 나는 벽시계를 봤다. 열한 시 사십사 분이었다. 들어온 지 사 분이었다. --- 벽의 종이가 접수대 옆에 있다. `하나. 응급 판정 전 최소 이십 분을 본다.` 이십 분을 보면 자정 사 분이다. 나는 그것을 봤고, 그다음에 환자를 봤다. 앉아 있었다. 명치를 누르고 있었지만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말을 할 때 숨이 끊기지 않았다. 이십 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십 분만 여기 계십시오." "네?" "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십 분은 보겠습니다." "…….." "그동안 아프시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 이십 분 동안 나는 옆에 앉아 있었다. 오 분에 한 번씩 맥을 짚었다. 네 번 짚었고 네 번 다 같았다. 세 번째로 짚었을 때 여자가 물었다. "뭐 보시는 거예요." "바뀌는지 봅니다." "…….." "한 번 짚으면 그때 어떤지만 압니다. 네 번 짚으면 어디로 가는지가 보입니다." "기계로는 안 되나요." "됩니다. 기계가 더 정확합니다." "근데 왜 손으로 하세요." "기계는 여기 없습니다." 여자가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 "있으면 쓰겠습니다." 여자가 물었다. "저기 붙은 건 뭡니까." 벽의 종이였다. "제가 정한 겁니다." "뭘요." "급한지 아닌지 정하기 전에 이십 분을 본다는 거요." "…….." "그리고 그걸 줄일 때는 줄인 사람 이름을 적습니다." "왜요." 나는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줄인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 자정 사 분에 나는 진료기록부를 폈다. `대기 이십 분 완료. 변동 없음.` `위장 증상. 응급 소견 없음.` 침을 세 개 놓았다. 명치 아래와 손등과 무릎 아래였다. 십오 분 두었다. 빼면서 물었다. "좀 어떠십니까." "내려간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병원 가십시오. 여기 말고 큰 데로요." "여기서 안 되나요." "됩니다. 그런데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제가 못 본 게 있는 겁니다." --- 계산은 이만 원이었다. 영수증을 끊었다. 이름 칸에 세 글자를 적었다. "이거 왜 이름을 적으세요." 손님이 물었다. "…….." "보통 안 적지 않나요." "적습니다." 내가 말했다. "…….." "제가 적습니다." --- 문이 닫혔다. 자정 이십일 분이었다. 나는 접수대를 닦고 진료기록부를 덮었다. 형광등을 하나씩 껐다. 마지막 것을 끄기 전에 진료실에 들어갔다. 침통을 열었다. 스물네 개 중에 오늘 여섯 개를 썼다. 여섯 개를 채웠다. 닫으려다 하나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봤다. 각도가 저절로 나왔다. 중원에서 삼십 년, 여기서 일 년 반. 이걸로 사람을 찌를 수도 있다. 삼십 년 동안 나는 그렇게 하는 법도 배웠고 몇 번 그렇게 했다. 같은 손이고 같은 물건이다. 무엇이 되는지는 오늘 밤 내가 무엇을 했는지가 정한다. --- 나는 그 침을 통에 도로 넣었다. 스물네 개가 됐다. 뚜껑을 닫고 진료실 불을 껐다. 접수대로 나와 마지막 형광등을 껐다. 문을 잠그고 나오는데 간판 아래 새 아크릴 판이 가로등 빛을 받고 있었다. 야간 진료. 일 년 전에는 이 글자가 흐렸고, 흐린 채로 두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은 새것이다. 내일도 여섯 시에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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