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일흔둘
수요일 아침에 가게 문이 잠겨 있었다.
내가 화요일에 잠갔으니까 잠겨 있는 게 맞다. 맞는데 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한 번 멈췄다.
들어가서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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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 비어 있었다.
세림의 앞치마가 없었다. 어제 아침에 봤고 매듭이 안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은 못만 있다.
내 것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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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들어가 봤다.
봉투 진열이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크라프트가 줄어서 한 줄이 뜨는데 그 자리에 흰색 작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내가 채웠다가 도로 뺐던 자리다.
쓰레기통이 비어 있었다. 어제 저녁에 안 비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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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다녀갔다.
열쇠를 갖고 있다. 여덟 해 동안 갖고 있었고 나는 한 번도 달라고 한 적이 없다.
몇 시에 왔는지는 모른다. 내가 엄마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왔을 수도 있고, 그보다 늦게 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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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에 종이가 한 장 있었다.
재고 메모다. 세림이 늘 쓰던 이면지고 손등으로 한 번 쓸어 편 자국이 있다.
흰 큰 것 스물넷
흰 작은 것 스물아홉
크라프트 열넷
파란 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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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숫자였다.
흰 작은 것이 서른둘에서 스물아홉으로 줄어 있다. 세 장이 나갔다. 어제 봉투만 사 간 손님이 있었고 그 사람이 흰 작은 것을 세 장 샀다.
크라프트는 지난주에 다섯 장이 나갔다. 그것도 맞다.
세림은 어제 낮에 여기 없었다.
없었는데 숫자가 맞다. 세어 봤으니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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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줄 없음.
넉 자다.
가져간 사람이 없다고 적었다. 없는 게 맞다. 칸을 열면 아무것도 없고, 세는 사람은 있는 것만 센다.
나는 그 줄을 오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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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아래쪽이 비어 있었다.
메모는 넉 줄이고 종이는 그보다 길다. 반이 넘게 남았다.
세림은 늘 거기에 뭘 적는다.
`이거 왜 다 꺼냈어` 같은 것. `내일 비 온대` 같은 것. `점심 안 먹었지` 같은 것.
재고와 상관없는 한 줄이 늘 아래쪽에 있었고, 나는 그걸 읽고 대답한 적이 거의 없다. 대답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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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반에 겉봉 일을 시작했다.
어제 맡은 청첩장이다. 스물세 장이고 다음 주 화요일까지다.
받는 사람 이름이 스물세 개 적힌 목록을 손님이 주고 갔다. 나는 목록을 왼쪽에 놓고 봉투를 오른쪽에 놓는다.
한 장에 이 분쯤 걸린다.
겉봉은 붓펜으로 쓴다. 볼펜으로 쓰면 손님이 돈을 낸 것 같지가 않다고 한다. 나는 만년필은 안 쓴다. 선이 예뻐져서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름은 세 자가 제일 많고 넉 자가 가끔 있다. 세 자면 봉투 가운데에 균등하게 놓고 넉 자면 아래를 조금 좁힌다. 손이 알아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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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장째에서 손이 멈췄다.
멈춘 이유는 없었다. 글자를 틀린 것도 아니다.
목록의 열두 번째 이름이 세 자였고 앞 자가 오 자였다.
오씨는 흔하다. 스물세 명 중에 하나쯤 있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나는 그 이름을 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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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에 스물세 장을 다 썼다.
말리려고 카운터에 늘어놓았다. 이름 스물세 개가 나란히 놓였고 다 남의 이름이다.
여덟 해 동안 나는 남의 이름을 봉투에 적어 왔다.
내가 이름을 못 적은 봉투는 하나뿐이고 그건 지금 엄마 집 식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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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안 먹었다.
대신 이면지를 한 장 꺼냈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넷째 권이고 토요일부터 갖고 다닌다. 가운데를 폈다.
여백에 한 줄이 있다.
`너 오늘 안 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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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이면지에 옮겨 적었다.
내 글씨로 적었다. 흉내 내지 않았다. 우리 일에서 흉내는 규칙이 아니고, 옮겨 적는 것은 규칙이다.
옮겨 적으면 손이 어디서 걸리는지 안다.
세 번째 글자에서 걸렸다. 오늘의 늘 자다. 받침이 두 개인 글자는 원래 걸린다.
흉내를 낼 때는 원본이 걸린 자리에서 똑같이 걸린다. 두 주 전에 그걸 해 봤고 아무것도 못 알아냈다.
옮겨 적을 때는 내 손이 걸리는 자리에서 걸린다. 그건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안 알려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 글씨를 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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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에 하나 더 적었다.
`유월 이일 비`
어제 사진 뒷면에서 본 것이다. 사진은 세림의 상자에 도로 넣고 왔고 나는 이 여섯 자를 외워서 왔다.
외운 게 아니라 짧아서 안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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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를 적을 때는 멈칫했다.
`언제까지요`
이건 내가 본 게 아니다.
엄마가 전화로 말한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종이는 십 년 전에 탔다. 엄마 기억이 원본이고 내가 적은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 일에서 그런 것은 흐리게 쓰거나 안 쓴다.
나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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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놓고 봤다.
마침표가 하나도 없다.
물음표도 없다. 엄마는 물음표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데, 있었으면 있었다고 했을 것이다.
셋 다 짧다. 여섯 자, 여섯 자, 다섯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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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힌 자리가 셋 다 본문이 아니다.
하나는 남의 필기 옆 여백이고, 하나는 사진 뒷면이고, 하나는 봉투에 든 종이 한 장인데 그 한 장에 그 한 줄뿐이었다.
읽으라고 적은 자리가 아니다.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자리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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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셋을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뭔가를 세고 있었다.
세림이 십 년 동안 나한테 적어 준 것을 다 떠올려 보면 재고 메모, 발주 용지, 냉장고에 붙이는 쪽지, 노트 여백이다.
편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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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적은 없고, 쓰게 하려고 한 적은 있다.
세림이 나한테 편지를 부탁한 적이 한 번 있다. 여덟 해 동안 안 앉던 손님 의자에 앉아서 돈을 내겠다고 했고 항목을 셋 줬다.
받는 사람은 세림의 어머니다.
그 편지를 나는 아직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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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어 보면 삼 주가 안 됐다.
그동안 나는 청첩장 겉봉을 쓰고 사과문을 쓰고 감사 카드를 썼다. 돌 답례 문구를 스무 장 썼고 오늘 겉봉을 스물세 장 썼다.
세림 것만 안 썼다.
이유를 대라면 댈 수 있다. 세 번째 항목이 그해 이월의 봉투였고, 그 봉투가 무엇인지 아는 데 여러 날이 걸렸고, 알고 나니 손이 안 갔다.
그건 이유고, 이유는 나중에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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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해 동안 세림은 이 가게에서 봉투를 만졌다.
하루에 몇십 장씩 세고 진열하고 팔았다. 손님이 고르는 걸 옆에서 봤고 두께가 두 가지인 크라프트를 설명했다.
한 번도 자기 걸 넣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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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은 적이 한 번 있다.
이월 스무날쯤 어머니에게 간 것. 파란 줄 봉투에 종이 한 장, 넉 자, 받는 사람 없음.
십 년 전이다.
그게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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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이 비어 있다.
서른여섯 장이 이 주 사이에 없어졌고 나간 기록이 없다.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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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면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넣고 서랍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어제 그가 두고 간 종이가 거기 있고 반으로 접힌 채다.
그것도 안 폈다.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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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손님이 셋 왔다.
봉투를 산 사람이 둘이고, 사과문을 맡긴 사람이 하나다. 사과문은 항목이 셋이었고 나는 다섯 줄로 만들었다.
손님이 다 좋다고 했다. 나는 값을 받았다.
받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게 오늘 제일 편한 십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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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문을 닫았다.
수요일은 세림이 나가는 날이다. 여덟 해 동안 수요일 오후에 세림이 없었고 나는 삼 년 전에 한 번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볼일, 하고 말았다.
오늘도 볼일을 보러 갔을 것이다.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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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에 재고 메모가 그대로 있었다.
넉 줄이 위에 있고 아래가 비어 있다.
나는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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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볼 말은 정해져 있었다.
봉투 어디 있어. 왜 안 나와. 그날 사진 네가 찍었어. 그 아래에 뭐라고 적으려다 말았어.
넷 다 물음표가 붙는 말이다.
나는 그중 하나도 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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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에 한 줄을 적었다.
`일흔둘 시켰어`
마침표를 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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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 나서 그 줄을 봤다.
발주는 금요일에 넣었고 월요일에 나갔다. 서른여섯에 서른여섯을 더한 것이고 파란 줄은 한 달에 두세 장 나간다.
일흔둘이면 두 해 치다.
왜 그렇게 적었는지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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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들고 진열대로 갔다.
파란 줄 칸은 여전히 비어 있다. 안쪽 판까지 손이 닿고 먼지가 없다.
나는 종이를 그 칸에 넣었다.
세워서 넣으니 위쪽이 조금 나왔다. 들어오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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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껐다.
문을 잠그고 골목으로 나왔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나는 세림도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빼앗을 생각은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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