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Fic
첫사랑이 나에게 보낼 편지를 나에게 맡겼다

3

첫 통

첫 줄에서 막혔다. 받는 사람 이름을 쓰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 여덟 해 동안 남의 이름을 몇천 번 썼다. 김 여사님께, 형에게,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손이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수진 씨에게, 라고 쓰고 나서 나는 그 다섯 글자를 한참 봤다. 이상한 건 글자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편지를 쓸 때 나는 늘 종이 반대편에 사람을 세워둔다. 그 사람이 이걸 읽고 어디서 멈출지, 어느 줄에서 종이를 접을지를 생각하면서 쓴다. 그게 이 일의 전부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내가 서 있었다. 첫 장을 버렸다. 두 번째 장에서는 이름 아래 한 줄을 쓰다가 버렸다. 두 번째 장에 쓴 줄은 이랬다. 오래 못 봤습니다. 지우고 나서 보니 지운 자국이 종이 뒤까지 눌려 있었다. 세 번째 장에는 아무것도 안 썼는데 손에 땀이 배어 모서리가 우글거렸다. 팔십 그램짜리가 세 장 나갔다. 종이값 계산이 안 맞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여덟 해 동안 나는 이 일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려운 건 손님이었지 글이 아니었다. 손님이 말을 못 하면 기다리면 되고, 너무 많이 하면 덜어내면 됐다. 나는 그 사이에 없었다. --- 열 시에 온 손님은 사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가방에서 얇은 수첩을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남색 표지였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펼치자 볼펜 글씨가 빼곡했다. 공사 일정 같은 것, 전화번호, 어딘가의 약도. "이 글씨로 써주실 수 있나요." "필적을요?" "네. 이 사람 글씨로요." 나는 수첩을 돌려서 봤다. 획이 두껍고 세로가 짧았다. 받침을 쓸 때 마지막 획을 끝까지 안 긋고 흘리는 버릇이 있었다. 급하게 쓴 사람의 글씨였다. "가능은 합니다." "가능은요?" "흉내는 냅니다. 감정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는 안 됩니다. 필압이나 속도까지는 못 따라갑니다. 아는 사람이 오래 보면 다릅니다." "오래 안 봐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수첩을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 "아홉 살이에요. 애 아빠가 삼 년 전에 갔고요. 생일마다 카드가 왔었거든요. 작년까지는 제가 대충 썼는데, 올해는 애가 글씨를 보더라고요." "봤다고요?"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는 수첩을 다시 봤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뭔가를 적은 장에는 날짜와 숫자 몇 개뿐이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아이가 나중에 알게 되면요." "알게 되겠죠." "그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자는 대답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말했다. "그때는 제가 썼다고 할 거예요. 지금은 아니고요." 나는 견본지를 한 장 꺼냈다. 먼저 수첩에서 같은 글자를 찾았다. 'ㅇ'이 많은 장을 골라 크기를 재고,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의 높이 차이를 봤다. 이 남자는 글자를 아래로 흘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흘렸다. 그러니 줄이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 그것까지 따라 해야 비슷해진다. 볼펜을 썼다. 만년필로 쓰면 선이 예뻐지고, 예뻐지면 다른 사람 글씨가 된다. 세 번 만에 받침 흘리는 각도가 맞았다. 아이 이름 석 자를 써서 돌려놓았다. 여자가 그것을 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그 손을 내리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거 얼마예요." "카드 한 장이면 만 이천 원입니다." "그것밖에 안 해요?" "네." 받는 사람에게 대필이라는 걸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게 두 번째 규칙이다. 여덟 해 동안 그 규칙 덕분에 잠을 잤다. 그날은 그 규칙이 조금 다르게 읽혔다. --- 세림은 오후에 와서 견본지 뭉치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 이거 필적 의뢰야? 오랜만이네." "응." "너 이거 진짜 잘하잖아. 예전에 나 대신 반성문 써준 거 기억나? 담임이 끝까지 몰랐다니까." "기억나."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연습해. 세 장이면 되잖아, 너는." 세림이 견본지를 넘겼다. 나는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세림은 종이를 넘길 때도 손등으로 한 번 쓸어 편다. "이건 다른 건데." 나는 버린 종이 세 장을 쓰레기통에서 꺼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뭐가 다른데." "글씨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흉내 내는 거라서." 세림이 웃었다. "야, 너 팔 년째 그거 하고 있거든?" 맞는 말이었다.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 저녁에 다시 앉았다. 그가 준 종이를 폈다. 첫 줄. 시청 앞 정류장. 비. 우산 하나. 나는 그 세 항목만 봤다. 항목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도움이 됐다. 그날 그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으니 지어낼 수 없고, 지어낼 수 없으니 쓸 수 있는 건 있었던 일뿐이었다. 있었던 일을 나는 알고 있었다. 수진 씨에게. 그날 정류장에 우산이 하나였습니다. 내가 반쯤 밖으로 나가 있는 걸 알고 계셨을 겁니다. 알면서 아무 말 안 하셨고, 나도 안 했습니다. 버스가 두 대 지나갔습니다. 나는 두 대 다 그냥 보냈습니다. 젖은 쪽 어깨는 그날 저녁에 말랐습니다. 그건 별일이 아니었습니다. 별일이 아닌 걸 십 년 동안 기억하고 있으면 그게 별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쓰고 펜을 놓았다. 세 문장을 더 쓸 수 있었다. 쓰면 좋아질 것도 알았다. 그런데 그 세 문장은 그 사람 것이 아니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팔십 그램은 이럴 때 빨리 마른다. 봉투에 넣고 접착제를 바르지 않은 채로 덮었다. 부치지 않을 편지에 풀칠을 하는 건 이상했다. --- 이재는 여덟 시에 왔다. 들어와서 스위치로 갔다. 나는 미리 하나를 꺼두었다. 그가 스위치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손을 내렸다. "다 됐습니까." "한 통이요." 봉투를 카운터에 올렸다. 그가 손을 뻗었고,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이재 씨." "네." "읽으실 겁니까." "아니요." "안 읽으실 거면 왜 쓰게 하십니까." 그는 봉투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내가 손을 놓았다. 그는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열어보지도, 뒤집어보지도 않았다. 가방 안에서 봉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안에 다른 봉투가 있었다. "수진 씨." "네." "이거 쓰면서 힘드셨어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 규칙을 그날 어겼다. "부치실 겁니까?" 그는 가방 지퍼를 올렸다. 지퍼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한 번 걸렸다. 그는 그걸 억지로 밀지 않고 조금 되돌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건, 한 번 해봤어요." "언제요." "오래됐어요." "부치셨는데 왜 또 안 부치십니까." 그는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문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멈췄다. 멈춘 자리가 하필 꺼둔 형광등 아래였다. "다음 통은 언제 될까요." "사흘이요." "사흘." "항목이 짧으면 이틀도 됩니다." "그럼 사흘로 할게요."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카운터에 남은 그의 종이를 접어 서류함에 넣었다. 넣기 전에 두 번째 줄을 다시 봤다. 학교 뒤 계단, 삼백원, 자판기 고장. 그날 자판기가 고장 나서 동전이 안 내려왔다는 것까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서 있었는지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십 년 동안 나는 그 사람을 지운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있던 자리만 남겨두고 사람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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