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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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 여덟 시 반에 눈이 떠졌다.
여덟 해 동안 그 시각에 떠졌다. 아홉 시에 문을 열려면 여덟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하고, 그게 몸에 붙으면 알람이 필요 없어진다.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고 나서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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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은 걸어서 사 분이다.
가려면 갈 수 있다. 셔터를 올리고 불을 켜면 그건 가게다. 열쇠는 아직 내 주머니에 있다.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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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는 붙박이장 위에 올려 뒀다.
어제 저녁에 집에 와서 올렸다. 붙박이장 위에 상자가 셋 있었는데 넷이 됐다.
넷째 것만 새것이다. 나머지 셋은 이사 세 번을 열지 않고 옮긴 것들이다.
올리고 나서 손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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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청소를 했다.
여덟 해 동안 안 한 데를 했다. 냉장고 뒤, 세탁기 밑, 창틀 홈.
창틀 홈에서 머리카락하고 모래가 나왔다. 언제 들어간 건지 모르겠다.
세 시에 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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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가 길었다.
가게에 있으면 그 시간에 손님이 둘쯤 온다. 안 오는 날은 진열을 고치거나 재고를 세거나 영수증 철을 정리한다.
집에는 진열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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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켰다가 껐다.
켜 놓으니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안 듣고 있었다. 안 들을 거면 꺼야 한다.
껐더니 냉장고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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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은 밖에 나갔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가서 내렸다. 그쪽에 시장이 있다.
시장에서 두부 한 모와 파를 샀다.
값을 치르면서 아주머니가 물었다.
"오늘 쉬어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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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가 그쪽에서 세 정거장이다.
버스를 잘못 타면 그 앞을 지난다. 나는 잘못 안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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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두부를 부쳤다.
부치면서 프라이팬을 두 번 뒤집었다. 한 번이면 되는데 두 번 했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네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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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에 손이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앉아 있는데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검지가 엄지 쪽으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펜을 잡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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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해 동안 하루에 몇 줄을 썼는지 나는 세어 본 적이 없다.
겉봉은 하루에 열 장쯤 되고 많은 날은 스물세 장이다. 편지는 하루에 두세 통이고 한 통이 여섯 줄이면 스무 줄쯤 된다.
하루에 백 자쯤은 썼을 것이다.
사흘 동안 한 자도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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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면지다. 가게에서 가져온 뭉치 중 하나고 뒷면이 백지다.
펜을 꺼냈다. 검정이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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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고 나서 손을 두 번 폈다 쥐었다.
손님 앞에서는 안 하는 동작이다. 손님이 보면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면 손님이 자기 말이 어려운 줄 안다.
집에는 볼 사람이 없다.
세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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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게 없었다.
손님이 없으니 항목이 없고, 항목이 없으니 문장이 없다.
십 분쯤 그러고 있다가 나는 내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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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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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를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봉투 겉면에 이름 세 자를 쓰면 이십 초쯤 걸린다. 균등하게 놓고 끝을 맞추면 된다. 손이 알아서 한다.
이건 사십 초쯤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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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세 자를 봤다.
문 자의 첫 획이 다른 때보다 길었다. 수 자는 가운데가 벌어졌다. 진 자의 받침이 아래로 처졌다.
남의 이름을 쓸 때는 이렇게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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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이름은 칸이 정해져 있다.
봉투 겉면 가운데에 세 자면 세 자, 넉 자면 넉 자를 놓고 위아래 여백을 맞춘다. 여백이 맞으면 잘 쓴 것이고 안 맞으면 다시 쓴다.
내 이름에는 봉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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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썼다.
`문수진`
두 번째 것은 첫 번째보다 작았다. 그리고 조금 나았다.
세 번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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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세 번째와 거의 같았다.
다섯 번쯤 쓰고 나서 손이 익었다.
다섯 번째 것은 봉투 겉면에 쓰는 것과 비슷해졌다. 균등하고 끝이 맞았다.
나는 그 다섯 개를 나란히 놓고 봤다.
첫 번째가 제일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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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수 씨가 그날 그렇게 말했다.
이 글씨 안 바뀌셨네요.
육 년 됐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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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내 글씨는 지금과 안 닮았다.
대학 노트를 봄에 열어 봤다. 획이 크고 받침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자음 하나에 획을 두 번 그은 데도 있었다.
십 년이면 글씨가 변한다.
육 년은 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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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육 년 사이에 내가 한 일이 하루에 백 자다.
손이 굳은 것이 아니라 손을 굳힌 것이다. 봉투 칸이 좁으니 작게 쓰고, 작게 쓰려면 획을 아끼고, 획을 아끼면 손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각도로 움직인다.
여덟 해 동안 매일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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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 번째 것을 다시 봤다.
이게 제일 잘 쓴 것이다.
그리고 이게 제일 남의 이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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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돌아갔다.
문 자의 첫 획이 길고 수 자 가운데가 벌어지고 진 자 받침이 처진 것.
그건 잘 쓴 글씨가 아니다.
내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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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종이를 접지 않았다.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
저녁에 밥을 먹고 와서 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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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아침에도 여덟 시 반에 눈이 떠졌다.
일어나서 책상에 앉았다.
어제 그 종이가 있고 이름 다섯 개가 있다.
여섯 번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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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는 첫 번째와 비슷했다.
문 자의 첫 획이 길었다.
일부러 그렇게 쓴 게 아니다. 어제 다섯 번을 써서 손을 익혀 놨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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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익힌 것이 하룻밤이면 풀리는가.
여덟 해 걸려서 굳은 것이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여섯 번째와 다섯 번째를 나란히 놓고 오래 봤다.
다른 데가 세 군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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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군데를 손끝으로 짚었다.
문 자의 첫 획 길이. 수 자 가운데의 벌어진 폭. 진 자 받침이 내려앉은 정도.
세 군데 다 어제 다섯 번을 쓰면서 줄였던 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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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면서 나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생각했다.
여덟 해 동안 필적을 봤다. 손님이 옛 편지를 들고 오면 같은 사람 것인지 봐 달라고 한다. 나는 십 년 차이면 판단이 어렵다고 말한다.
지금 나는 하루 차이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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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차이는 아무도 안 본다.
볼 이유가 없다. 하루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 종이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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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세림한테서 문자가 왔다.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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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이 안 왔다.
십 분쯤 있다가 하나 더 왔다.
`국수 언제 먹을 거야`
나는 답을 쓰다가 지웠다. 두 번 썼다가 두 번 지웠다.
`이번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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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림이 답을 안 했다.
읽었다는 표시만 떴다.
`이번 주에`라고 쓰면 요일을 안 정한 것이다. 세림은 날짜를 정하는 사람이고 나는 안 정하는 사람이다.
여덟 해 동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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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종이를 다시 봤다.
이름이 여섯 개 있다.
첫째와 여섯째가 닮았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가 닮았다. 두 무더기다.
무더기를 만들고 나서 나는 그 생각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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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카운터에서 봉투를 셋으로 나눈 적이 있다.
그때도 손이 먼저 했다.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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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으니 이면지 앞면이 나왔다.
앞면에는 예전에 받아 적은 항목이 있었다. 언제 것인지는 모르겠다.
`병원 두 달` `간병인` `이름은 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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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세 줄을 봤다.
이 손님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얼굴도 안 떠오르고 언제 왔는지도 모르겠다.
세 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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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줄로 나는 편지를 썼을 것이다.
여섯 줄이나 일곱 줄로 만들어서 봉투에 넣어 드렸을 것이고, 그 봉투는 손님이 가져갔거나 상자에 들어갔다.
`이름은 안 씀`이라고 적힌 걸 보면 겉면을 안 쓴 것이다.
그러면 상자 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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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박이장 위를 봤다.
넷째 상자가 거기 있다.
열어서 열한 통 중에 이 손님 것이 있는지 보면 된다. 겉면에 이름이 없는 것이 넷이니까 넷 중에 있을 것이다.
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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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도로 뒤집었다.
이름 여섯 개가 나왔다.
펜은 옆에 있었고 자리는 남아 있었다.
나는 일곱 번째를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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