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을 걸었다.
관도는 강을 오른쪽에 끼고 돌았다. 물소리가 사흘 내내 같은 쪽에서 났다.
표기는 세우지 않았다. 세울 표기가 없으니 정할 것도 없는데 서진하는 아침마다 그것을 한 번 정했다. 오늘도 안 세운다, 하고 속으로 말하고 걸었다.
함표도 안 했다. 이 길은 소리를 내는 길인데 낼 이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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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궤짝을 한 뼘 들었다 놓았다.
오단이 하던 것이다. 사 년 동안 매일 봤고 왜 하는지는 안 물었다.
들면 무겁다. 어제와 같은지는 모른다.
나흘 동안 나흘 다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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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저녁에 한지운이 지도를 폈다.
주막 마루였다. 등잔을 가운데 두고 둘이 앉았다.
"내일 낮에 닿습니다."
"…….."
"강 나루가 붙어 있습니다. 검소가 나루 앞에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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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저."
"네."
"거기서 짐을 보인 사람만 배를 탑니까."
한지운이 지도에서 눈을 뗐다.
"그건 배중이 안 적었습니다."
"…….."
"안 적은 건 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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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등잔을 봤다.
"열면 어떻게 됩니까."
"적힙니다."
한지운이 손가락을 무릎에 댔다. 적을 것이 없을 때 하는 버릇이다.
"열고 적으면 그 궤는 본 사람이 있는 짐이 됩니다. 나중에 회읍에서 없다고 해도 이쪽에 종이가 있습니다."
"…….."
"셈으로는 여는 쪽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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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저는 여는 쪽입니까."
한지운이 잠깐 있었다.
"저는 적히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여는 쪽입니다."
"…….."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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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손가락을 무릎에서 뗐다.
"그런데 정하는 건 서 표사입니다."
"제가 정하면 한 소저는 뭘 하십니까."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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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낮에 나루에 닿았다.
검소는 나루에서 스무 걸음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지붕이 낮고 마당이 넓었다.
마당에 짐이 늘어서 있었다.
보퉁이를 풀어 놓은 것이 열 몇 개고, 수레가 셋이고, 그중 둘에 깃발이 서 있었다. 창기표국 것은 아니었다. 서진하가 모르는 국이었다.
사람들이 짐 옆에 앉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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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람이 마당을 돌고 있었다.
허리가 굽지 않았고 걸음이 짧았다. 짐 앞에 서면 손을 뒤로 지고 들여다보기만 했다. 만지는 일이 드물었다.
만질 때는 두 손으로 만졌다.
서진하는 그것을 보고 궤짝 끈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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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이쪽으로 왔다.
"등짐이오?"
"그렇습니다."
"내려놓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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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무릎을 굽혔다.
한 손으로 끈을 풀고 두 손으로 궤짝을 받아 땅에 놓았다. 놓을 때 소리가 안 났다.
노인이 그것을 봤다.
한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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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배웠소."
"표두 밑에서 배웠습니다."
"국 이름이 뭐요."
"연수표국입니다."
노인의 눈이 한 번 움직였다.
"없어진 지 오래된 국인데."
"압니다."
"…….."
"그 이름 오늘 세 번째 듣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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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궤짝 끈에서 손을 뗐다.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묻고 다니는 사람이 있소. 벌써 여러 해요."
"…….."
"이름이 뭡니까."
"이름을 안 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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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손을 뒤로 지었다.
"늘 같은 걸 묻소. 사십 년 전 그해에 이 나루를 지난 짐이 뭐가 있었느냐고."
"…….."
"연수표국을 묻는 게 아니라 그해를 묻소."
서진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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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창이오."
노인이 말했다.
"여기서 짐을 보오. 값은 안 받소."
"…….."
"왜 안 받으십니까."
"받으면 봐 달라는 대로 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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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이 마당 끝을 가리켰다.
거기 나룻배가 매여 있었다. 짐을 실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저 배는 여기서 적힌 짐만 싣소."
"적힌다는 건."
"풀어서 보이고, 내가 적고, 종이 한 장 받아 가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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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안 실소."
윤창이 손을 뒤로 지었다.
"화낼 일이 아니오. 이십 년 전에 이 나루에서 배가 하나 가라앉았소. 실은 짐이 뭔지 아무도 몰랐고, 건진 다음에도 몰랐고, 죽은 사람 셋 값을 누가 무는지로 삼 년을 다퉜소."
"…….."
"그 뒤로 이렇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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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궤짝을 봤다.
봉인이 둘이다. 하나는 사십 년 된 것이고 하나는 그보다 뒤에 붙은 것이다.
"못 엽니다."
"못 여는 것이오, 안 여는 것이오."
"안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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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못 건너오."
화를 안 냈다. 설득도 안 했다. 그저 셈을 말하는 얼굴이었다.
서진하는 그 얼굴이 배중과 어디가 다른지 생각했다.
배중은 말이 길었고 윤창은 짧았다.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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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노인장."
한지운이 처음 입을 열었다.
"봉인된 표물도 그렇게 하십니까."
"봉표 말이오?"
"네."
윤창이 한지운을 봤다.
"장궤요?"
"연수표국 한 장궤의 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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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이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봉표는 옛날에는 안 열었소."
"…….."
"어떻게 했습니까."
"달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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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수만 적고 봉인은 그대로 두는 것이오."
윤창이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서까래에 대저울이 걸려 있었다. 갈고리가 크고 눈금이 손바닥만 한 판에 적혀 있었다.
"도착해서 다시 달아 근수가 같으면 손 안 댄 것이 되오. 다르면 그때 따지오."
"…….."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까."
"안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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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하십니까."
"근수는 물이 들면 늘고 마르면 주오."
윤창이 말했다.
"비 오는 날 단 것과 갠 날 단 것이 다르오. 다투면 그 얘기가 나오고, 그러면 종이가 값을 못 하오. 그래서 지금은 풀어서 보이라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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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대저울을 봤다.
"그래도 답니까."
"달아 주오. 종이는 못 주오."
"…….."
"그럼 뭐가 남습니까."
"당신이 아는 게 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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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이 처음으로 궤짝을 두 손으로 만졌다.
밑면을 받쳐 한 뼘 들었다가 놓았다. 서진하가 아침마다 하는 그 동작이었다.
"짐을 진 사람이 자기 짐 근수를 모르는 건 못 봤소."
"…….."
"모릅니다."
"그럼 알고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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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짝을 저울에 걸었다.
서진하가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갈고리에 얹었다. 윤창이 추를 밀었다. 밀다가 멈추고 조금 되밀었다. 세 번 그렇게 했다.
저울대가 섰다.
윤창이 눈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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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근 반."
서진하는 그 말을 들었다.
숫자가 소리로 나오니까 궤짝이 처음으로 물건이 되었다. 지고 다니는 동안 그것은 무게였지 근수가 아니었다.
"스물여섯 근 반."
그는 소리 내어 따라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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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책을 꺼냈다.
앞장을 폈다.
"한 소저."
"네."
"그건 셈입니까 길입니까."
한지운이 붓을 들었다.
"지나온 자리에서 잰 것이니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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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 검소. 봉인 안 뜯음. 근수 스물여섯 근 반. 잰 사람 윤창.`
적고 나서 붓을 닦았다.
"오늘 날씨는 갰습니다."
한지운이 덧붙여 적었다.
"비 오는 날과 다르다고 하셨으니 적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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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이 저울에서 궤짝을 내렸다.
내려서 서진하 쪽으로 밀지 않고 그 자리에 두었다. 짐 주인이 자기 손으로 가져가게 두는 것이다.
서진하가 두 손으로 들었다.
"윤 노인장."
"말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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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전에도 여기서 달았습니까."
"여긴 이십 년 됐소."
"…….."
"그 전에는요."
"나루만 있었소. 나는 그때 저쪽 국에 있었고."
윤창이 강 건너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국도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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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궤짝을 등에 올렸다.
사십 년 전 이 궤짝이 어디서 얼마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오늘 들은 숫자가 첫 숫자다. 비교할 것이 없는 숫자이고, 비교하려면 회읍에 닿아 다시 달아야 한다.
그 사이에 무엇이 늘거나 주는지는 아무도 안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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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로 가면 건널 데가 있소."
윤창이 말했다.
"이틀 올라가면 여울이오. 물이 얕고 돌이 많소. 짐 지고 건너기가 좋지는 않은데 건너기는 하오."
"…….."
"겨울에는 어떻습니까."
"겨울에는 얼어서 오히려 낫소. 지금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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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나루를 봤다.
배가 짐을 싣고 있었다. 풀어 보인 보퉁이들이 도로 묶여서 올라갔다. 깃발 선 수레도 실렸다.
여기서 열면 오늘 건넌다.
열흘을 돌아온 것이 나흘 더 늘어난다. 그리고 그 나흘은 열흘처럼 이유가 있는 나흘이 아니라, 안 열었기 때문에 생긴 나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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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로 가겠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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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강을 봤다.
배가 떠나고 있었다.
한지운이 옆에서 책을 꺼내는 소리가 났다. 앞장이 아니라 뒷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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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 못 건넘. 열지 않음.`
여덟 자였다.
열흘쯤 전에 그은 줄 아래로 새 줄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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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궤짝을 한 뼘 들었다 놓았다.
스물여섯 근 반이었다.
팔은 여전히 어제와 같은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