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는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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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진하는 궤짝을 안 졌다.
마루에 놓인 채로 두고 끈만 풀어 옆에 놓았다. 변가가 마당에서 그것을 봤다.
"안 가시오?"
"갑니다."
"…….."
"그건요."
"두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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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가가 호미를 놓았다.
"어제는 지고 가시더니."
"어제는 지고 갔습니다."
서진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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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동안 오단이 이 궤를 남의 집에 둔 적이 있는지 그는 모른다.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것도 어제 알았다.
모르는 채로 두고 가는 것과, 없었다는 걸 알고도 두고 가는 것은 다르다. 오늘 그는 앞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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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말하시오."
"저녁까지는 내려옵니다."
"두고 가시는 건 알아서 하시오."
변가가 마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남의 짐 안 봅니다. 안 보고 안 만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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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규칙입니까."
"규칙은 아니고."
변가가 호미를 다시 들었다.
"안 보면 나중에 뭐라 할 게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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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먼저 마당을 나섰다.
보퉁이 하나를 메고 있었다. 그 안에 반권이 있다.
서진하가 뒤에서 걸었다. 등이 가벼웠다.
가벼운 것이 이상해서 두 번쯤 어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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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자리에 왔다.
어제는 여기서 왼손으로 바위를 짚고 오른손으로 궤짝 밑을 받쳤다. 세 걸음을 그렇게 갔다.
오늘은 두 손으로 짚었다.
한 걸음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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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어제와 같았다.
봉분 둘, 열 걸음 간격, 팻말 둘.
한지운이 옆으로 비켜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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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왼쪽 앞에 섰다.
무릎을 굽혔다. 흙바닥이라 바지가 젖었다. 두 손을 앞에 짚고 이마를 손등에 댔다.
일어나서 오른쪽으로 갔다.
같은 것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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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 아무 말도 안 했다.
표사가 죽은 자리에서 하는 말이 따로 있는지 그는 모른다. 오단에게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 없는 것을 지어내서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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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풀을 걷었다.
봉분 위에 마른 풀이 얹혀 있었다. 손으로 걷어서 아래로 던졌다. 두 봉분을 다 했다.
그러고 나서 팻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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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것을 두 손으로 잡았다.
나무가 삭아서 아래쪽이 물러 있었다. 흙에 박힌 데가 특히 그랬다. 잡고 흔들어 보니 조금 놀았다.
글씨는 굵고 끝이 뭉뚝했다.
`鄭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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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획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파인 자리가 깊었다. 칼로 판 것이고, 판 사람이 힘을 많이 준 것이다. 힘을 많이 주면 획 끝이 뭉툭해진다.
이 글씨를 그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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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갔다.
두 손으로 잡았다.
이쪽 나무는 왼쪽보다 덜 삭았다. 몇 해 뒤에 세운 것이니 그럴 만했다.
획이 가늘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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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손을 뗐다.
떼고 다시 댔다.
`鄭`의 첫 획이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획을 끝까지 안 긋고 중간에서 멈췄다. 멈춘 자리에 칼이 한 번 더 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세 자를 쓰면 한 자에서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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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앞에 앉았다.
앉아서 손을 무릎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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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년 동안 그는 오단이 쓴 것을 매일 봤다.
품삯을 적은 종이, 길에서 산 것을 적은 종이, 주막에 남기는 짧은 글. 오단은 많이 안 썼고 쓰면 짧았다.
그 사람의 획은 마지막을 끝까지 안 그었다.
끝까지 그으면 힘이 남는다고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남은 힘은 다음 글자로 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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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진하는 그 말을 글씨 이야기로 들었다.
열아홉이었고, 오단이 하는 말은 대개 물건 이야기였다. 끈은 이렇게 꼬아라, 짐은 이쪽으로 기울여라.
글씨도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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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아서 보니 그건 글씨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자를 다 쓰고 나면 손에 힘이 남는다. 남은 힘으로 다음 자를 쓴다. 남기지 않고 다 써 버리면 다음 자에서 손이 무겁다.
사십 년을 걸은 사람이 그것을 어디서 배웠는지 그는 모른다.
배운 게 아니라 그렇게 걸어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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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표사."
한지운이 뒤에서 불렀다.
서진하는 안 돌아봤다.
"네."
"…….."
"뭘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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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입니다."
"어느 쪽이요."
"오른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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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옆으로 왔다.
앉지 않고 서서 팻말을 봤다.
"왼쪽하고 다릅니다."
"다릅니다."
"…….."
"서 표사는 이 글씨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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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한지운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서진하는 팻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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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표두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
"어떻게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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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그 질문을 받았다.
대조할 것이 없다. 오단이 쓴 종이는 그가 한 장도 안 갖고 있다. 삯을 적은 종이는 삯을 주면서 넘겼고, 주막에 남긴 글은 주막에 있다.
행장 반권에도 오단의 글씨는 없다. 그는 적는 사람이 아니었다.
"없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
"뭐가 없습니까."
"대조할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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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보퉁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면 적을 수가 없습니다."
"압니다."
"…….."
"추측이라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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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가 팻말에서 손을 뗐다.
"추측은 근거가 있어야 추측입니다."
"…….."
"근거가 뭡니까."
"사 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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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그 말을 들었다.
"사 년 동안 봤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그건 종이에 못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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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붓을 안 꺼냈다.
꺼내려고 보퉁이 끈에 손을 댔다가 뗐다.
"안 적겠습니다."
"…….."
"안 적는 것도 적습니까."
"오늘은 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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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동안 거기 있었다.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이쯤 되는 산에서는 오후에 바람이 그렇게 분다.
봉분 위 마른 풀이 다시 얹혔다. 아까 걷어서 던진 것이 도로 올라온 것이다.
서진하는 그것을 다시 걷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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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먼저 일어섰다.
"서 표사."
"네."
"…….."
"이 자리에 오신 게 몇 해 뒤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한지운이 팻말 쪽을 봤다.
"나무가 삭은 걸로 보면 왼쪽하고 열 해쯤 차이가 납니다. 그보다 정확히는 못 말합니다."
"…….."
"열 해면."
"사십 년 전에 여섯이 죽고, 그로부터 열 해쯤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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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셈을 했다.
그 열 해 동안 오단은 궤를 지고 있었다. 그러다 이 산을 올라왔고, 나무를 깎아 이름을 새기고, 다시 내려가서 삼십 년을 더 걸었다.
넷째 자리에도 갔는지 다섯째 자리에도 갔는지는 모른다.
가 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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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기 전에 그는 팻말을 한 번 더 봤다.
왼쪽은 그해 여름에 세워졌다.
오른쪽은 몇 해 뒤다.
몇 해 뒤에 이 산을 올라온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궤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고 올라왔는지 두고 올라왔는지는 팻말에 안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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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자리를 지날 때 한지운이 앞섰다.
"서 표사."
"네."
"어제 저는 서 표사가 지고 올라오신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두고 오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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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릅니다."
서진하가 말했다.
한지운이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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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내려오니 해가 기울어 있었다.
변가네 마루에 궤짝이 있었다.
아침에 놓은 그대로였다. 끈이 옆에 놓여 있고 위치가 손가락 하나만큼도 안 움직였다.
변가는 마당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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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마루에 올라갔다.
궤짝 앞에 무릎을 굽히고 두 손으로 들었다. 들어서 등에 얹었다.
끈을 어깨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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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눌린 자리가 있다.
왼쪽 어깨의 한 자리다. 한 시간 지고 올라갔다 내려온 뒤로 거기가 계속 뻐근했다.
끈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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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어깨를 한 번 돌렸다.
돌리고 그대로 섰다.
마당에 개가 한 마리 묶여 있었고, 그 개가 이쪽을 보다가 도로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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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이 마당에서 보퉁이를 고쳐 멨다.
"오늘 밤에 여기서 자고, 내일 넷째 자리로 갑니까."
"그렇습니다."
"…….."
"며칠입니까."
"엿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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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하는 마루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어깨의 그 자리에 손을 얹었다.
얹었다가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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